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무게를 가지고 추억 속에서 걸터 앉아서 의미를 만들어 준다. 깊게 페인 생각의 자국마다 기억들이 스며들어서 비온뒤 땅에 스며든 촉촉한 단비처럼 가끔은 여유를 주기도 하고, 삶의 깊은 맛을 담아내는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문학작품을 읽다가 문득, 나의 뒷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게 '끌림'과 누군가에게 '머무름'을, 끌리는 연애와 머무르는 결혼에 대해서 견주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정리하면서 많은 영화들이 스쳐갔고, 소설들도 생각이 났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겪은 일들과 내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까지 모두 쏟아 놓으니 풍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안톤체호프의 소설 중에 '미인'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남자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어떤 여관에 들린다. 그런데 그 여관 주인의 딸이 너무 아름다워서 정신을 빼앗긴다.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그 딸의 동정을 살피던 주인공은 딸이 다가와서 주문을 하려고 하면 가슴이 뛰어서 말을 못하고 뒤돌아서서 떠나가면 계속해서 그 딸을 주시한다. 이렇게 주인공은 뛰는 마음으로 잠을 못자고 아침까지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려고 하다가 결국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체호프는 담담하게 '미인'이라는 소설에서 말한다. '그 사람이 미인인 것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체호프는 100년전의 언어로 들려 준다. 끌리는 순간에 그 아쉬움을 접으라고 말이다. 욕망을 실현하라고 외치는 요즘 티비 광고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게 '끌림'은 끌리는 그대로 놓아두고 머무를 곳을 찾아서 떠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그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끌림'을 붙잡는 순간 많은 일이 일어난다. 연애가 시작되기도 하고 결혼이 성사되기도 하고, 때론 범죄가 일어나기도 하며, 불륜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끌림의 '유통기한'이 짧다는 것이다. 언젠가 잡아 당겼던 그 끌림의 힘은 멈출 것이고,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아쉬움은 쉽사리 진부함이나 식상함으로 바꾸어져 버릴 것이다. 끌림을 손에 잡는 순간 끌림은 더 이상 끌림이 아니다. 그것은 머무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끌림의 힘은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소유욕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소유하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매력이거나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매력이거나. 예나 요즘이나 그 매력은 '귀여움'이나 '아름다움'이나 '섹시한' 매력이다. 그 매력을, 그 끌림을 잡으려는 순간 연애는 시작되고, 그 끌림을 놓지 못하는 순간 결혼은 시작된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결혼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끌림에 의해서 결혼한 이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는 적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년이 걸린다. 끌림에서 깨어나기까지 자신에게 충실해져야하고 솔찍해야 져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곳에 앉아 있기를 원하는지 모르는 이상 계속해서 끌려다릴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아쉬워서라는 말로 그 상황들을 표현해 버릴 수도 있다.
에곤쉴레, 둘.
2. 우연과 필연 사이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40가지가 넘는 정의를 내렸다. 그 중에 하나가 끌림에 대한 정의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끌림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기회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연'이라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다가온 것이고, 매번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깐 '끌림'은 우연한 기회에 나에게 기쁨을 주는 어떤 상황, 사건, 모습,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끌림은 매번 다른 만족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와 맥락에서 나온다. 사랑은 반대로 필연이다. 상대방이 앞에 있어서 매번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필연인 만남이다. 따라서 우연함에서 오는 '설레임과 기다림'보다는 필연적인 지속관계에서 오는 안정감과 공유하는 감정이 핵심이 된다.
필연으로 연결된 관계에서는 그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기쁨의 원인이 된다. 그러니깐 그 사람의 유머감각이나 스타일, 미소나 환하게 웃는 건강한 치아나, 풍성한 머리결을 넘어서는 필연은 바로 그 사람 자체가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연인들이 헤어질 때 하는 이야기는 "나를 나 자체로 바라봐주면 좋겠어, 나의 아픔도 나의 일부야, 나를 인정해주면 안되?"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아마도 처음에는 끌림에 의해서 상대방을 만났고 그 끌림의 우연이 사라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원했을 것이다. 그 끌림이 계속 유지되도록.
사랑을 어디서 배울까? 성숙한 사랑은 무엇일까?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는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의 말의 깊이를 재어보느라 몇일 밤을 세어본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그런 영혼의 깊이가 없는 말이라도 지속적으로 그 존재를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정직하게 서서 버티는 것은 처음에는 그 사람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험이고 도전이고 시험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곧 그러한 버팀, 받아들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스스로 멋진사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조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사라지거나 퇴화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사랑한 사랑으로 버티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버팀이 결국 지속을 만들어 낸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수 많은 끌림 가운데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그 끌림을 손 잡고, 사랑이라고 말해버리고서는 뒤돌아 버리지 않았는가? 정직하게 돌아보면 정말 그렇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으나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깐 결국 헤어졌겠지? 그러고 나는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가 왜 그 사람을 좋아했지? 우리정말 사랑했을까? 그래도 빨리 깨달아서 다행이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것은 나의 문제였고, 나의 미성숙함이었다는 것을. 우연에 기대여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끌림'의 기쁨을 붙잡으려고 파울로 코엘료를 불러내어 '오~! 자히르'라고 외치는가 하면, 알랭드 보통을 앉혀다 놓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물어보지 않았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냥 이렇게 오랫동안 나의 진실과 마주치는 것이 오히려 필요했던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성숙해서 결혼한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스스로에게는 어느정도 필연성을 바라볼 수 있고 지속적으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우연적인 매력에 끌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한기지. 피카소는 매번 이렇게 '끌림'을 주는 뮤즈를 찾아 다닌 것 같다. 예술가들이 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모두 끌림에 의해서 붓을 들고, 펜을 들고, 사진기를 들었을테니까. 예술가가 되어서 끌려다니는 시간이 끝나가는 것 같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에 나오는 여신의 이미지.
3. 정신과 육체 사이 중요한 것은
정신적 사랑만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는가하면 정신과 육체의 결합을 강조하는 사랑도 있다. 후자쪽에서는 에로스가 정신을 동반한 강력한 사랑이 되지만, 전자쪽에서 에로스는 욕망의 발현된 금지의 영역으로 보여진다. 사람마다 어릴적부터 가지고 있던 불문율이 있다. 대게 '무엇을 하지 말라~'라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자라는 성장기 '~이것은 안된다'라는 것들로 가득찬 세상에서는 '비밀로 몰래 할 수 있는 것들의 세상'이 따로 열린다. 왜 그것이 안되는지에 대해서 배우지 못하고, 권위적인 폭력이나 규정적인 폭력의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금지당하는 것에 익숙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정신과 육체의 이원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부모인가, 사회인가에 따라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들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결혼과 연애에 관련해서 이러한 관점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매력은 육체의 신선함?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의 끌림은 정신적인 '뇌색남'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소유한 것들'로부터 매력과 끌림을 얻기도 한다. 사회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사람은 육체든 정신이든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것을 나누는 순간 머릿속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보여지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나 모두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기는 또 쉽지 않다. 그래서 샤르트르는 타자가 자신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존재의 무'가 형성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시선을 빼앗아 가는 순간, 그 끌림으로 인해서 자신의 내면은 텅 비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득차는 방식이 다른 것이 고민의 대상이다. 무엇이 가득차느냐? 그것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생각의 흐름이나 이미지의 잔상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생각의 과잉이나 육체의 과잉은 다른 이를 생각할 때, 특히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를 생각할 때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내가 사람을 볼 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과잉이 생겨버리면 그 사람이 내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내 안에 과잉된 그 이미지나 생각이 그 사람을 '뮤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육체와 정신의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그것을 보는 나의 생각이다. 내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과잉된 이미지나 생각이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남미의 정열적인 리듬은 오히려 새로운 감정을 동반하게 한다. 그것은 남부유럽의 지나친 낭만과도 약간은 떨어져 있고, 북아메리카의 자본주의에 기반한 소유의 매력과도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것 같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사람과 즐겁게 리듬을 주고 받는 사이. 그러니깐 그 리듬은 언제까지라도 끊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 리듬 때문에 춤을 추게 되고, 음악을 같이 듣게 되고, 함께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튜닝해 가는 것이다. 남미의 음악은 특유의 감정과 가사들이 가슴을 후벼팔때가 많다.
아마도 지금까지 열심히 공원을 달리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겠다. 나름대로 리듬을 맞춰가면서 몸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달리는 내내 세계문학과 경영서적들을 오디오 북으로 듣는 것. 이렇게 누군가 같이 뛰면서 정신과 신체의 리듬을 같이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름대로의 취향이긴 하지만 생각과 육체의 분리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매력이 끌림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같은 의미에서는 지속성을 갇는 리듬이 아닐까? 우리의 심장도 나름의 리듬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두뇌에서도 사실은 매번 달라지기는 하지만 주파수라는 리듬을 가지고 있고, 대화에서도 주고 받는 리듬이 있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리듬이 아니다. 육체의 리듬과 정신의 리듬이 하나로 만나는 자리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있고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4. 머무름을 위한 다른 시선
결국은 머무름이다. 한 곳에 앉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그 사람이 오면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책을 읽고 인생을 이야기하고. 그 사람의 영혼 안에 내가 머므르고, 그 사람이 내 안에 머므르고. 그러면 머무를 수 있는 나의 내면의 공간이 어떤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보다 내면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아침기운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머무름을 위해서는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의 내면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공간들에 배치된 것들. 결국 그것들과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그러한 배치들이 다른 누군가와 만나서 함께 바꾸어 가는 '이사가 가능한, 인테리어 재배치가 가능한' 사람이 머무름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끌려서 도착한 곳은 누추한 고립된 마음의 단칸방이고, 어쩐 땐 낭떨어지고, 어떤때 하얀 도화지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사막과 같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의 한가운데 일 수 있다. 끌림의 시작은 화려하고 매혹적이고 향기가 나고 즐거울 수 있으나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결국 끌림과 머무름은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누구인게 '나는 네게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기 전에, 나의 내면에 상대방이 머무를 공간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안전하고 편안하며, 포근한지를 돌아보는 것. 그렇게 서로가 내어준 공간을 트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결혼이겠지? 같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공유해도 계속해서 서로 지나다닐 수 있고 오히려 더 포근해서 그 사람의 집에서 더 있고 싶어하는 공간. 그것이 끌림에 현혹되지 않고 머무름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물론 끌림이 아예 나쁜 것은 아니지만, 끌림은 조금 줄이고 머무름을 늘리는 것이 함께 걸어가기에 좋은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무 끌림에만 치중했던 걸까?하는 고민과 자성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