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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25. 2021

아브젝시옹과 크리스테바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김선하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라캉에서부터 리쾨르를 지나서, 크리스테바까지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이번에 교수님께서 책이 새로 나와서 한 권을 보내주셨다. 역시는 역시다. 꼼꼼히 꾸준히 써 오셨떤 글들을, 생각들을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이라는 주제로 모두 모아 놓으셨다. 요즘들어서 다시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책을 선물해주셔서 다시 서문부터 정독하는 중이다.



1.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그가 놓친 것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다소 억압된 기억과 간간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충동 사이를 오가는 존재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의 심리 구조 가운데 꿈과 무의식적 증상들을 분석해 들어가면서 종교를 신경증과 병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관점은 20세기 동안 인류가 경험한 삶과 거주지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기술과 정치는 우리의 자연적 거주지로부터 우리를 더욱 분리했고, 다시 한번 유목민으로 변화시켰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이용한 국경없는 항해자들, 정치적 박해를 피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망명자들까지 세상은 유목민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권위와 법, 가치체계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 문제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도 해석되었다.

프로이트는 문명의 발전을 본능의 단념, 즉 충동희생과 보상이라는 경제학적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인류 문명은 삶의 본능과 파괴 본능 사이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문명 발달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설명되었다. 자연과 투쟁을 벌이면서 문명은 신에게 두었던 권능을 사람에게 부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사람은 문화인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죽음 본능이 사람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문명 속의 불만의 형태로 그 공격성과 파괴성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여기에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원초적 적개심과 파괴 본능을 감추기 위한 죄책감이 자리 잡는다. 이 죄책감의 기원은 아버지 살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죄책감은 문명이 공격성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 같은 것이며, 또한 유일신교의 핵심이다.

신은 우리가 죽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덧입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존재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종교는 우리 속에 숨어 있는 파괴 본능과 공격본능을 순화시킨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종교와 문명에 대한 설명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죄책감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헤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지만 결국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지프의 운명을 떠안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신 없는 자유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불안을 끌어 들인다. 우리는 문명 속에서 이 끝나지 않는 불안의 근원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곧 프로이트가 끝낸 지점에서 매듭을 풀고 다시 매듭짓기 위해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우리가 찾는 지점은 적개심과 공격성이 아버지 살해에 대한 죄책감으로 순화되는 지점보다 더 근원적인 곳이다. 종국에 그것에서 우리는 죄책감이 아닌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_김선하 교수님


유목민은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노마드다. 갈곳을 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운동력도 있지만 언제나 불안한 방향성을 담지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정착할 곳을 잃어 버린 근대의 인간들을 '액체 근대' 속의 시민이라고 불렀다. 누군가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그 액체성을 벗어 버릴 수 있는. 프로이트가 본 것은 원인이 아니라 어쩌면 '증상'이다. 자본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지 못한 것들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다.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들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면 사람들은 자신이 정주할 공간을 더 이상 거주하지 못하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그 정주한 공간을 빼앗긴 사람들의 증상이 마치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는 이런 프로이트에게 말한다. '너의 관점은 오직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일원론'이 아니라 '이원론'이어야 한다. 세상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초아아라는 이상과 원초아라는 욕망 사이에서 한가지를 선택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프로이트의 시각에는 '시간'이 빠져 있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빠져 있는 시간'의 개념은 항상 '4차원'의 현실이 아니라 '3차원'의 비현실 속에서만 그의 이론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증상'인 것이다. 4차원에서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증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아직 해결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으면서, 움직이면서 그 원인들이 실시간으로 반응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정주한 상태에서 바라보면서 하나의 관점에서, 상호적인 시차로 사랑하는 것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계속 찾으로면 하는 행위가 '욕망'이 되는 것이다. 라캉도 마찬가지다. 이 욕망의 그래프에서는 '정주'의 개념에서 인간이 가장 안정적일 때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과 의지가 잘 잡히지 않는다. 인간이 욕망이라는 그래프에서 시소를 타는 동안 '진실한 시간'이 흘러가는 4차원의 시간은 모두 그림자가 되거나 환영처럼 보인다. 이것을 승화시킨다고 해서 바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욕망은 언제나 증상으로만 알 수 있게 된다.




2. 크리스테바가 찾은 것과 우리가 찾는 것


크리스테바는 현대 사회가 운명적으로 살아왔던 거지주를 상실함에 따라 인간을 뒷받침해주던 본래적 장소와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파괴될 위협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차적 안정성의 파괴가 인간의 생물학적 승화하고 상징화할 수 있는 최종적 지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안정적인 거주지, 부모, 나아가 종교의 상실이 야기하는 불안에 주목한다. 이러한 탐색을 크리스테바의 멜라니 클라인 읽기에 의존하면서,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의 실체에 맞닥뜨리고자 한다. 멜라니 클라인이 선택한 길은 거주지 상실에 따른 고통 자체와 원초적 고향상실의 장소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거주지를 신속하게 다시 건설하기 위해 고향 상실의 문제를 억합하는 것이 아니라 주거지 박탈, 원초적 분리 그 자체 속에 "거주"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을 둘러싼 욕망과 억압으로 인한 문제에 문을 열었다면, 클라인은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간에 심리적 공간의 파괴와  정신적 삶의 멸절로 이어진 광기(정신병) 분석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광기는 인간 심리의 추진력이면서 동시에 한계이고, 오늘날 개인의 삶에서 뿐 아니라 가장 격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목도되는 현실이다. 정신분석은 그러한 광기를 통해 현시대를 말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광기는 무시되거나 일축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말해지고 쓰이며 사유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일시적 상태이고 창조성의 무한한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 광기를 통해 진리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이다. 정신분석은 심리적 병을 치료하고 병든상태를 분석함으로써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경험에 내재하는 논리적 과정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어떤 조건에서 그러한 과정이 증상으로 퇴화하는지 설명하는 법을 배운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_김선하 교수님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는 이분법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자체가 이미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된 상태에서만 생각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모순적이다. 분리되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사실 정신분열증 이전에 인지부조화에 가깝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주지가 언젠가는, 갑짝스럽게 박탈될 수 있다는 의미는 단지 몸을 옮겨다니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삶도, 심리적인 공간도 옮겨야 한다는 면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무너뜨린다. 여기에 정착할 수 없다는 현실의 삶은 잠을 자고 있어도 계속해서 유랑민처럼 꿈속을 헤메이는 사람과 같다.


멜라닌 클라인의 대상관계 이론에서 나는 어떤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것은 '대상과 맺어진 관계가 기준점이 되어서 다른 관계들을 맺는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멜라닌클라인도 유아기에서 정신이 만들어지는 시기를 집중하지 않았을까? 초기에 인간의 두뇌가 자라나면서 대상과 맺게되는 기본관계가 앞으로의 관계들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나타난 증상은 그 자체로 부정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미래를 열 수 있는 현재의 열쇠라는 것을 본다. 고통이 그 사회에 심층을 보여주는 방식이듯이, 정신병은 그 사람의 심층에 쌓여져 있던 것들이 의식을 뚫고 현재화되는 무의식이 아닐까?


안나프로이트가 말하는 증상-진단-처방이라는 관점을 조금만 비켜보면, 증상-이해-치유라는 방식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오히려 크리스테바는 라캉이 달성하고자 했던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주이상스의 대면'이 전에 '욕망'이라는 것이 기준점으로 제시되는 이상 해결은 힘들다라고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도, 라캉도 욕망을 기본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인간의 본질을 '사랑'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어려운 도전이었겠지만 크리스테바는 계속해서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구불구불한 세상에서 직선을 그어 간다. 물론 그 직선은 다른 사람들이 보이엔 곡선이지만, 나중에 구불구불한 것들이 펴지면 그것이 직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https://brunch.co.kr/@minnation/1148







책소개


아브젝스옹이란?

아브젝시옹(abjection)은 혐오, 비천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말이다. 이 말은 문화적으로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그런데 멜라니 클라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따라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아브젝시옹이라는 비천함은 생후 최초로 만나는 대상(어머니의 젖가슴)과의 분리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뜻한다. 스스로가 비천하게 되면서 한 생명을 분리하는 과정은 그 생명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고통과 사랑의 시간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주체가 되기 위해 비천하게 여기던 대상에 대한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다. 경계가 흔들릴 때마다 이 기억이 되살아나 자기는 자기로서 유지될 수 있다. 자기로 사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버리고 혐오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있는 혐오와 공포의 출처이다.


지난 20세기와 새천년 초반의 기술과 정치는 인간을 자연적 거주지로부터 분리했고, 다시 한번 유목민으로 변화시켰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위성 방송과 인터넷을 이용한 국경 없는 항해자들, 정치적 박해를 피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망명자들까지 세계는 유목민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에 의해 공간의 의미가 흔들리면서 더욱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불안감은 생존의 문제와 닿아있고 삶의 질과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 분명한 대안없이 미래로 던져져 있는 인류에게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생각의 돌파구가 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거기에 대해 뾰족한 돌파구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현재 삶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혁신의 길이 있음을 제안한다.

그 길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본 문명 해석에 대한 길을 가로지르는 방식이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형태로 공격성과 파괴성이 문명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여기에 사람이 사람에 대해 품는 적개심과 파괴 본능을 숨긴 죄책감이 자리 잡는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잘살게 될수록 미워하게 되고 경계해야만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 관점에 반대하는 시선이 있다.

이 책은 우리 내면의 혐오와 파괴 본능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고,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나와 이웃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준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문화 기호학적 시각과 폴 리쾨르의 해석학적 관점을 통해서이다.
이 책은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공포와 혐오의 기원’에 관한 크리스테바의 연구로서 아브젝시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2부는 ‘프로이트의 종교분석을 넘어서’는 폴 리쾨르의 상징 해석학이 그 내용을 이룬다. 그런데 1부와 2부는 비천함과 숭고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각각의 글은 따로 읽어도 내용이해에 문제가 없겠으나 전체적으로 연결된 내용을 찾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목차


프롤로그 :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1부 아브젝시옹에 대하여: 공포와 혐오의 기원에 관한 연구
-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 읽기

1장 아브젝시옹에 대한 방법론
1. 부정과 아브젝시옹
2. 거울단계에 앞선 전(前) 오이디푸스기
3. 아브젝시옹의 예: 쫓겨난 것
4. 불안의 원인: 쇼즈와 대상 a
5. 희열과 정동
6. 억압과 아브젝시옹
7. 아브젝시옹과 나르시시즘
8. 나르시시즘과 ‘코라’
9. 초자아와 아브젝트
10. 도착성, 또는 예술성과 성스러움

2장 무엇을 겁먹는가
1. 불안의 대상
2. 공포증-결핍 : 결핍된 은유
3. 결핍과 공격성
4. 무에 대한 환각과 나르시시즘
5. 공포증 환자가 욕망하는 ‘대상’: 기호

3장 더러움에서 오염까지
1. 어머니에 대한 공포증과 아버지 살해
2. 근친상간 금지, 명명할 수 없는 것과의 대면
3. 공포증과 신경증 의식으로서 오염
4. 오염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5. 두 힘 사이에서: 남성과 여성
6. 오염 의식과 모권
7. 음식물과 오염
8. 여성들의 출산 능력에 대한 공포: 인류학적 연구
9. 오이디푸스의 아브젝시옹과 정화 작용

4장 성서 속 혐오의 기호학
1. 정/부정의 대립: 여성
2. 인간/신의 구별: 음식물
3. 육체의 경계: 할례와 나병
4. 성적인 동일성에서 언어로, 혐오에서 도덕으로
5. 가증스러움의 아브젝시옹
6. 시체의 가증스러움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쫓아낸다

5장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
1. 안/밖: 아브젝시옹의 내면화
2. 아브젝시옹의 정신화와 승화
3. 죄, 신으로부터인가 여성으로부터인가
4. 참회의 말과 행복한 죄

2부 성스러움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
- 폴 리쾨르의 『해석에 대하여』, 『역사와 진리』, 『타자로서 자기 자신』과 함께

1장 프로이트 종교 분석의 가치와 한계
1. 항문에서 입으로, 똥에서 돈으로?
2. 오이디푸스와 승화
1) 운명 대 진실
2) 승화와 상징
3. 꿈과 시
1) 리비도에서 가치의 차원으로
2) 교육과 문화
4. 믿음과 종교
1) 성스러운 것의 애매성
2) 고고학과 목적론
3) 성스러운 것과 악
4) 믿음과 상징
5. 프로이트와 함께, 프로이트를 넘어서
1) 억압된 것의 회귀를 넘어서
2) 원초적 환상을 넘어서
3) 아버지 형상을 넘어서
4) 믿음과 말
6. 죄의식과 위로
1) 부친 살해에서 소유, 힘, 가치의 영역으로
2) 위로의 변증법
7. 호교론도 아닌, 절충주의도 아닌

2장  제도를 통한 구속
1.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2. 그리스 교부들의 창조와 하나님 형상 이해
3. 제도를 통한 구속 가능성
1) 소유의 정치·경제 영역
2) 가치의 문화 영역
4. 텍스트를 통한 자기 이해

3장  자본주의에서 ‘좋은 삶’에 대한 모색
1. ‘좋은 삶’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
2. 타자와 함께, 타자를 위하여
3. 정의로운 제도들에서: 나와 너에서 각자로
4. 빚진 존재와 선물 교환의 도덕
5. 자본주의에서 잘살기

에필로그: 고통은 광기보다 강한 법이다



저 : 김선하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지도로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폴 리쾨르(P. Ricoeur) 해석학으로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경북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연구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리쾨르의 주체와 이야기』, 『종교와 철학 사이』 등이 있고, 논문으로 「프로이트의 의식과 자아에 대한 리쾨르의 해석」, 「의식, 신체 그리고 인간에 관한 논의 : 스트로슨의 칸트 비판과 인간 개념에 대한 고찰」, 「말하는 주체와 자기 화용론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행위, 사건 그리고 행위 주체 : 앤스콤, 데이빗슨 행위이론에 대한 리쾨르의 비판과 종합」, 「인격적 정체성과 자기성」, 「새로운 과학문화를 위한 해석학적 모색 : 설명과 이해의 변증법」, 「들뢰즈의 시간론에 대한 고찰 :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허구 이야기를 통한 시간에 대한 고찰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분석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죽음에 대한 고찰」, 「무덤과 글쓰기 : 리쾨르의 죽음 이해」, 「퍼스 기호론에 대한 고찰」, 「바디우의 시적 진리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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