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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26. 2021

파도를 피한다고 맘이 편할까?

괴로운 밤을 맞이하는 감상

자주 감상에 젖는 밤이 잦아 진다. 무엇인가를 집중하고 몰두하면 더 많은 답을 알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갈 수록 수면 위에서 볼 수 없었던 더 많은 질문들이 똬리를 틀고 한 없이 잡아 땡긴다. 인간의 마음 속에 길이 있다면 이 길은 하나로 난 길은 아닐 것이다. 감정을 빼고, 느낌을 빼더라도 생각으로 얽힌 실타래만 해도 한가득이다. 한 사람의 고민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풀리지 않은 숙제같은 질문들, 그것들은 한 사람 인생 안에서만도 켜켜히 쌓여서 에베레스트산같이 높아져만 갔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세상은 곧 그게 진짜인줄 알았다. 그리고 누구나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오히려 바보로 놀려지곤 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한가지의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곧 자연스러운 서열화가 이루어졌다. 생각이 나태해지면 권위주의는 자연스러운게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기 싫어하면 곧 그 사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체주의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말해 머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혹여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가던 길을 잠시 멈춰서 '이 방향이 맞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팔만대장경을 몇 만번이라도 쓰겠다. 


그 문제라는 것은 단순하다.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은 별다른 저항 없이 우리 삶 속에서 구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보다는 그 문제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문화'를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복잡해진다. 한 사람의 문제가 문화라는 우물에서 독을 푼 것 같이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아득해지면서 정신을 잃을 정도다. 


룰라에서 탄핵까지라는 제목으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netflix.com/title/80190535



청년시절 브라질의 룰라대통령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훔친적이 있다. 좋지 않은 학벌, 평생 노동자로 헌신했던 그의 인생에서 브라질의 한 순간은 보우사 파밀리아라는 정책으로 빛났다. 저소득층들이 빚에서 해방되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으며 기나긴 빈곤에서 벚어나게 했던 기본소득 정책. 그의 정책으로 인해서 브라질은 세계 7위까지 경제가 성장했으며, 국민의 행복도도 증가했다. 그러나 지금은 군의 쿠테타를 옹호하는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룰라대통령을 투옥시켰다. 


민주주의는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수단이다. '민주주의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고민은 진보 안에서도 아나키스트와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가 서로 뒤엉켜서 싸운다는 것이다. 진보는 갈등으로 막하고 보수는 뇌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자유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무한의 자유를 늘리려고 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성향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 한편에 있다. 다른 한 편에는 시민들의 평등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민주주의자들이 있다. 이보다 위에는 공화국을 유지하여 국가라는 단위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 중에 공화주의자들이 있다. 


어쩌면 지금 당면한 머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니 조국이니 하는 사람들은 공화주의자의 편에, 공정성과 평등을 바탕으로 절차의 문제를 개인으로 소급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자의 편에 서서 싸운다. 이러는 가운데 기본소득이나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으로 침투하는 것을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있다. 자라온 과정이 달라서 인지 서로 추구하는 가치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문제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고 경쟁한다는 것이다. 이겨야 하는 경쟁상대를 넘어서 쓰려트려야 하는 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MXXVS6Hil4

악동뮤지선의 새로운 곡 '전쟁터'


미쉘푸코는 말년까지 권력의 통치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통치성이란 삶의 곳곳에 어떤 원리들이 스며들어서 사람들이 모를 만큼 지배성을 갖는 일종의 원칙을 뜻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가 통치성이 되면 삶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민주적이고 평등한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경쟁'이라는 원리가 통치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이기기 위한 방식이 진행되는데 경쟁의 원리가 통치성이 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합동', '협력', '상생'과 같은 원리들이 중요한 협동조합이나 사회혁신의 분야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그 자체로 가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통치성은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지배한다. 내가 겪고 있는 수 많은 문제들은 이러한 통치성이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부동산이든 투자이든, 정치권의 경쟁이든,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협력하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통치성의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체스판'을 짠 사람의 의지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세부적인 선택은 자신이 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하겠지만. 자신이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이 최초부터 의도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lGgJWaPkYnE

"나는 파도만 볼 줄 알았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지 못했소" / 영화 '관상'의 마지막 장면


파도가 인다. 높으면 높을수록 파도의 위엄에 뒷걸음질치게 된다. 몇 만번의 파도를 맞고 나서야 그 파도가 스스로 인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들, 한명회와 관상쟁이의 싸움처럼 '통치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모르게 사람들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밤이면 쉽게 잠을 못 이룬다. 공부는 괴로운 것이다. 계속해서 바람이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참고만 있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 모른척 하는대로 살아갈 것인지. 바람을 가르러 나간다고 해서 과연 맘이 편할까? 모른척한다고 해서 내 삶은 평화로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를 생각한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때부터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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