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결과를 낳는다_대로우 밀러
어느날 한 일꾼이 이탈리아의 어떤 산에서
큰 덩어리의 대리석을 파내기 시작했다.
풍요 또는 풍성함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자연자원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애니미즘 : 인간은 자연에 속해있으며 근원적인 영들, 조상들에 대한 숭배자가 된다.
유신론 : 인간은 제 2의 창조자이며 위임받은 권한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며, 풍요롭게 만드는 청지기이다.
세속주의 :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를 만들어내며 세상 속에서 누리는 존재이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소비자'로 불리운다.
힌두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창조란 세상에 멋진 것들을 들여온 것이 아니다. 창조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의 분해와 붕괴를 의미했다.
이성적이고 인자한 창조자가 이 세계를 불가사의한 새로운 형태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일성을 지닌 자연을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산산조객낸 것이었다.
힌두교 신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창조를 초월적인 존재가 자기 스스로를 제한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의 목표는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가 그에게 세상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묻는 사람들을 묵상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과연 부처가 되기 위해 구도의 길에 있는 어떤 자가 이 창조의 신비를 알고자 에너지를 낭비하겠는가? 부처는 창조 이전을 목표로 삼았다.
만일 창조자가 존재한다면, 그는 아마도 무자아가 소멸되고 싶은 욕구, 환생을 하고 싶은 욕구,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욕구를 창조해 낸 이일 것이다.
불교도들의 주님은 무의 하나님이며창조적 인간으로서의 어떤 모형도 제시하지 않는다.
유신론적 우주론은 어떤 창조자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창조자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무력한 이신론자의 공상의 산물이 아니다. 창조자는 여전히 그가 지은 모든 것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집을 직접 설계해서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로 삼아 계속해서 세워가진다.
다윗은 왕되신 하나님을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로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으로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이 세상은 마친내 우리 마음과 지성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지성이 텅 비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황폐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굳어 버린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자비가 없어질 것이다. 사름은 그 마음 속에 품은 대로 그렇게 된다라고 솔로몬이 말했듯이 사람이 사는 세상도 사람이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했다.
인간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안에 위치한다. 이는 그 자연을 그대로 놔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강한 충동과 부르심을 가지고 인간의 예술을 통해서 자연ㅇ르 일구기 위해서 이다. 또 자연의 능력을 개발하고 완성시키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예술은 자연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데, 이는 자연의 생명체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군다나 또 다른 체제를 병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 안에 감추어진 채 놓여 잇는 힘을 자물쇠로 열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연에서부터 생겨나는 의지력으 ㄹ통제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