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Oct 17. 2021

오징어게임과 오징어

그 눈을 떠

눈을 뜨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 앞에 지나가는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의 척추에서 나는 소리, 하루종일 같은 자리에서 미래를 지우고 있는 노숙인들의 눈빛, 매일 지하철 손잡이를 소독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분들의 손가락, 내일은 나아지겠지라고 하지만 지금은 라면한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대학생. 눈을 뜨기 전까지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정신병처럼 허공속에서도 계속 보여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오징어 게임도 역시는 역시였다. 


재미있고 신기하며 흥미롭고, 소름돕는 반전. 보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기능중에 하나인 '소재로 이용해 먹음' 말이다. 예전에 기생충이란 영화를 보면서 '기생충과 개새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기생충의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이용해 먹었다고 나 혼자 허공에 호되고 욕을 해댔다. 물론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옷에서 김치 냄새 나는 사람들에게서 가난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감독과 비까뻔쩍하게 차려 입은 배우들은 '나는 그 배역과는 다른 사람이야, 이렇게 멋지고 세련되었는데 그 때는 영화하려고 그렇게 살을 찌우고 불쌍하게 보이거야'라고 한 것처럼, 오징어 게임도 역시는 역시였다.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그들이 연기한 배역들은 여전히 현실에서 지옥속에 살지만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같을 길을 가는 동료라고 생각했어


적어도 오징어게임을 중반까지 몰입하면서 우리는 같은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야 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가 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한계와 희망을 잃어 버린 삶의 방식에 공감하면서 무엇인가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인줄 알았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이 모두 끝나고 나서 세계적인 흐름을 타자, 점점 '구별짓기'는 시작되었다. 조명되지 못했던 무명의 배우가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원래 스타였는데 이제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도 하고. 무엇인가 '나는 달라'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거리를 넓히면 넓힐수록 사람들은 열광했고, 대상이 되었던 배역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오징어가 되어 갔다. 오징어처럼 흐물흐물 절망의 늪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눈에서. 모든 사람의 눈을 감긴 오징어 게임은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1369#comment


사람을 대상화 시키면 자신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가난을 대상화시키면 가난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인정을 받는다. 페미니즘을 대상화시키면 젠더이슈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사람들 가운데 유명해진다. 빈곤을 팔아 먹든, 차별을 팔아 먹든. 문학은 그 자체로 변화의 길을 잃어 버린 것 같았다. 무엇인가를 교환하지 말라고 문학은 일부러 상징을 비틀었는데, 무엇인가를 계속 교환하기 위해서 문화산업은 일부러 상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상징 아래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물 밑 속에서 오징어가 되어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결국 그 오징어들은 사람들이 씹어대는 안주가 되었다


아무도 오징어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모두가 오징어가 되는 가운데, 게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예술은 세상을 바꾸거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오징어 게임은 '현실에서도 희망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오징어 게임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라는 명제를 기가 막히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오징어가 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심심풀이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보통 '빈곤포르노'라고 하면 빈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그 빈곤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하는 관점은 '존엄이나 존경'이 아니라 '불쌈함과 가엾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 이미 '구별짓기'가 시작된다. 나는 그들과 다른데,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라고 하는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그리고 그 연민은 절대 자기가 있는 자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자신의 자리에 감사하면서 계속해서 그 연민의 대상들을 그 자리에 놓아두어야만 가능해 진다. 


모든 것을 게임으로 만들었다


영등포역을 지나오면서 보이는 풍경들. 서울역을 건너오면서 눈에 밟히는 광경들. 외면할 수 밖에 없는 나의 시선을 끌어 잡은 어느날, 나는 거기서 신의 눈과 마주쳤다. '이렇게 놓아 두면 안되,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제발 눈을 떠!'라고 하는 신의 간절한 호흡. 나는 그러나 외면하고 돌아서며 행복한 상상을 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말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비겁하게 게눈을 감추고 내 앞길을 부지런히 걸어갔다. 나는 그렇게 내 길을 걸어갈 수록 부지런히 오징어가 되어 갔다. 눈의 촛점이 점점 없어지고, 내게 주어진 것에만 초점을 겨우 차리는. 그러는 동안 오징어 게임은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화면 뒤로 가라 앉히고 모든 것들을 게임으로 만들었다. 가난은 게임에서 진 자들의 몫이었고, 풍요는 게임에서 이긴 자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였다. 권리와 권리가 싸우면 더 힘 센사람이 가지게 되어있다. 


그 눈을 떠


다소 냉소적이 되었지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수면 아래 가라 앉은 이들을 다시 복권시키고, 스크린 뒤로 숨어 버린 사람들의 인생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예술에 이젠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열심히 이용하고 소재로 사용하고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하지 머.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문제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 문제의식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박제할 뿐이다.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지옥같은 가난과 고난 속에서 저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현실에서 희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가져오는 방법을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 이제는 눈을 떠야 한다. 오징어들의 다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단 나부터 오징어에서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 눈을 떠!!


오징어인 사람은 오징어게임을 할 수 없다


가난을 뼛속까지 경험해 본 사람은 오징어 게임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부르지 않는다. 빈곤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까발리면서 그 사이세 잇속을 챙기는 짓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용히, 보이지 않게 오징어가 된 사람들을 다시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겠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미디어가 주는 생각의 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오징어다. 그리고 계속 게임을 당해야 한다. 설득당할 것인가? 흥미를 느낄 것인가? 매력을 느끼며 좋아요를 누를 것인가?와 같은. 누르는 순간 우리는 오징어가 될 것이다. 그 게임에 참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오징어이다. 


외모로 등급을 나누던지, 재력으로 순위를 매기던지, 학벌로 줄을 세우던지. 언젠가 누군가에 대해서 우리는 오징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징어가 아닌 사람이 만든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치열한 경쟁과 비난 속에서 야유를 뚫고 오징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기까지. 오징어들의 게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배우라고 하면서 가난을 이용해 먹고, 희망을 잃어 버린 사람들의 꿈까지 사회적인 차별로 이끌어내는 감독에서 이 들을 바친다. 부디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h8ZWfWQo8k4

매거진의 이전글 불만을 모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