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지 한다. 내일의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대에서 신앙은 하나의 도피처에 불과했다. 적어도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면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나던 때는 말이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욱 괴로워진다. 불만에 차 있다가 반쯤은 포기하다가, 어떤 때는 손톱 밑에 때만큼의 희망을 가지고 잠이 들기도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불만에 차 있는 시간들은 말이다. 삶은 점점 붕 뜨는 것 같고,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도 지쳤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나에게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이젠 그만하고 싶다. 한번만, 아니 두 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데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내게 핀잔을 주거나 제지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힘은 엄청나다. 그 불만을 대안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 사회는 더 없이 좋아질 것이다. 내 주위에도 불만 많은 많은 사람들이 MCN(미친놈) 취급 받으면서 숨어지내는 것을 본다. 불만을 가진 것에 대해서 부담을 가지게 만드는 사회, 그래서 원래 그런거니깐 참던지 나가던지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나는 불만투성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제 앞길도 못 챙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넋두리라면 한 없이 풀어낼 수 있지만, 나는 이 불만을 그대로 두지 않을려고 한다. 계속해서 기록하고, 공유하고, 공감하고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대안을 찾고, 사람들을 모으고. 이 불만을 해결해보고자 한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그 다음 누군가에게라도 남겨 놓을려고 이렇게 매일매일 쓰고있다.
그때부터 였지?
아마도 생각해보면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3년째 골골대면서 삶의 의미를 다시 물었던 때가 아닐까? 취업도 아니고 진학도 아닌 무엇도 선택할 수 없던 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희망이나 즐거움을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아침에는 터벅터벅 인생의 나락길로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았던 노르베르트 엘리야스의 '문명화 과정'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종의 안도감이었는데, 나만 이런 고생을 하는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누군가는 왕이되고 누군가는 신하가 되며, 대부분은 종이 되는 시대에 궁전문화는 하나의 패션트렌드도 되면서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망울 속에 희망이란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왕 자체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좋은 부모, 집안환경, 머리좋은 유전자를 포함해서 좋은 환경을 가진 국가에서 태어는 나것이 '왕'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고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비관론에 빠지고 불만이 가득한 채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성인이되면 체념하면서 이 사회를 한탄하는 것도 죄악시하게 된다. 이미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항상 감사'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열심히 살아간다. 역시 이미 만들어진 흐름을 스스로 깰 수 없고, 깨고 싶지도 않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점점 사회는 궁전사회를 위한 긍정사회가 되어 간다. 사람들은 '너와 나는 달라!'라는 것이 차별이 아니라 역사라고 믿게 되는 시점이 온다. 그야말로 미처 버릴 것 같은 지경이 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노무현을 아직도 그리워하는지 점점 이해가 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기회를 공정하게 주면 사람들은 행복을 누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가진 조건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살아온 삶의 태도가 도전적이지 않거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 책임이겠지? 그럼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기회를 못 누린게 되기에 그 사람은 영영 제명해야 한다고 말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이, 기회만 있으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 영악한 기회주의자가 된다. 기회만 찾아서 대박을 터트릴 위대한? 희망을 품고.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바꿔 버리는 황금의 손 마이다스를 기다리며.
공정하다고 착각 하지 말자
기회가 아니라 조건이다. 오랜만에 마이클샌들의 책이 마음에 들었다. 능력주의가 만들어 놓은 이 사회는 그 시작 자체가 이미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들의 왕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조건'의 평등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복지국가 논의라고도 볼 수 있지만, 나는 다르게 들린다. 조건이 비슷해지더라도 차이는 생긴다. 그 다음부터는 진짜 인간의 내면과 세계관의 싸움이다. 좋은 태도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결국 또 그 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역량은 다른 방식을 작동하게 된다. 다른 방식의 역량 말이다. 그럼에도 이정도만 들어도, 불만이 조금은 가시기는 한다.
나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위대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반응과 흐름에서 만들어진다. 누구와 있었는가? 어떤 사람에게 배웠는가? 어떤 책을 만나고, 어떤 사건들을 경험했는가? 그 때 어떻게 반응했는가가 인생의 심연에 계속 쌓이면서 인간은 만들어진다. 백지로 태어난 인간이 하나씩 설계도를 그리고 그것을 실행해가는 가운데 인생의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진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위대한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고,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생각해보니, 언제까지 불만만 가지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움직여야 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로베르토 웅거를 만났다. 내가 가진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치로, 삶으로, 관계로 풀어낼 때 마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친구처럼. 웅거의 스터디는 계속해서 자극을 주고 영감을 준다. 보통 사람들을 깨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보통사람이라는 굴레에 갖혀서 계속 그렇게 살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동굴 밖으로 불러내야 겠다.
가장 존경하는 스웨덴의 재무장관이자 100년의 계획을 세운 비그포르스는 사람들의 불만을 모아서 하나하나 그것을 해결하는 가운데 잠정적으로 미래의 유토피아가 지금 여기에 실현된다고 말했다. 불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것으로 대안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조금의 살기 좋아지고 내일 아침이 일어나기에 괜찮은 날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가진 불만들을 다 적어 놓고,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려고 한다. 계속 찾아보고 안되면 물어보고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 하나의 결승점을 향해서 가는 달리기가 아니다. 인생의 숫자만큼 존재하는 광장이다. 오늘도 마라톤이 아닌 나의 길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