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p 한국 전시전을 다녀와서
살바도르 달리~ 이름만 들어도 먼가 있을 듯한 느낌은 시대적 상황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달리를 최고의 예술가로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고 흘러내리는 시계그림은 현대 초실실주의를 대표하면서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미술계에서는 거의 바이블급으로 추앙을 받는 이 상황. 심지어 뜨는 예술가이자 힙합을 하는 BeO에게도 "살바로도르 달리 앤 피카소"로 시작되는 Counting Stars에서 일약 활약을 담당했던 그 달리. 달리가 자신의 아내인 갈라를 모시고 한국에 왔다. 물론 그의 그림들이 왔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작품들을 140여종이나 선보였다.
다행히 월요일 쉬는 날을 맞이하여 낮에 방문했던 사람도 없고 한산해서 한참을 돌아보면서 즐기고 음미했다.회화를 볼 때면 꼭 음악을 듣는다. 특히 인상파와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볼 때는 어쿠스틱카페의 음악을 들으면서 즐기곤 한다. 어쿠스틱 카페의 The Ancient Sun이란 곳을 참 좋아하는데, 이 곡을 들으면서 회화를 보고 있자면 뭔가 예술가들의 혼이 춤을 추면서 나에게 걸어오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여윽시 다르지 않았다. 베르나르 뷔페전에서 받았던 인상인데 역시 달리전에서도 동일한 인상을 받았다.
인간은 과거를 동경하며 미래를 기대하지만 현재를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과거에 대한 향수이거나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있던 것들은 조금씩 더욱 빛을 발하고 없는 건들은 있어야할 자리를 점점 찾아오면서 기대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이 천재였다. 현재를 살아가지 않는 멍청이이자 미래와 과거를 왔다갔다 했던 천재. 그래서 프로이트도 아마 그런 달리를 알아본 것 같다.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까지, 생물학에서 핵물리학까지를 오르내리락하면서 달려온 달리에게 그의 아내 갈라도 지쳤던 것 같다.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달리는 초청장을 받아야만 갈라가 거주하는 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자~그럼 이제 달리전으로 들어가볼까.
https://www.youtube.com/watch?v=8_D01XJ8KOE
https://brunch.co.kr/@minnation/1406
1994-1926 천재의 탄생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피게에수에서 살바도르달리가 태어난다. 자신이 태어 나기도 전에 생을 마감한 형의 그림자를 어깨에 지우고 조숙함과 영리함을 동시에 두르고 살아간다. 그의 이름이 뇌수막염으로 생을 마감한 형의 이름이었다. 어쩌면 두개의 정체성을 살아가게되는지도 몰랐다. 운명이란 이렇듯 우연이 필연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와 친절한 어머니 그리고 아름다운 누이와 함께 카다케스의 여름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라몬피초는 달리에게 화가의 영감을 선물해주었다. 그러나 달리는 항상 무뚝뚝하고 우울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작품
아버지의 초상화와 에스 야네르에 있는집, 1920
알게르항구, 카다케스 1918
뒤에서 바라보는 카다케스 1921
스튜디오에서 그린 자화상 1919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사이
라몬피쵸는 피카소의 친구였다. 당시 유행한 입체파의 작품에 달리는 흠빡빠지게되었고 마침내 피카소를 만나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피카소의 집에 도착한 달리는 흥분한 나머지 교황보다 먼저 피카소를 알현했다고 자랑한다.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인상주의에 빠져있던 달리는 그의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바로 피카소와 같이 초현실주의에 입문한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 쌓여 있었던 환상과 두려움, 무의식과 자의식 사이에서 그는 모든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작품
정물화 1924
에스 야네르의 목욕하는 사람들 1924
두 인물 1926
1926년의 작품인 곱슬머리 소녀 Girl with currls를 통해 달리는 애로티즘을 시작한다. 주로 여동생을 중심으로 그리던 것과는 달리 여자 인물을 성적인 대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신체적인 성징과 맞물려 새상을 이런식으로 본 것이 아닐까? 인간은 보는 것과 먹는 것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법이니깐 말이다.
살바도르달리와 그의 영혼 갈라
1929년 달리는 운명의 뮤즈를 만난다. 당시 이미 폴 에뤼아르가 남편으로 있었지만 달리는 처음 갈라를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갈라도 역시 달리 안에 순쉬는 위대한 천재성과 순수함에 매료되었다. 1934년 1월 30일 그들은 마침내 결혼하게되었고 영원한 사랑의 항해를 시작하게된다. 갈라를 통해 달리의 천재성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되었다. 70대가 된 갈라는 푸볼 Pubol에 있는 달리가 선물한 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달리의 사랑은 50년동안 지치지 않았고 갈라는 이따금 그런 지치지 않는 열정에 지치곤했다.
초현실주의; 손으로 그린 꿈 속의 사진들, 1927-1939
1929년 파리 괴망스 갤러리에서 초현실주의 단독전을 펼쳤다. 달리는 꿈과 무의식 안에 자유가 펼처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당시 유명했던 프로이트의 정신현상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어느새.달리는 초현실주의그룹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고 루이스부뉴엘과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영화도 만들게 되었다. 달리는 편집광적 비판기법을 사용해서 기존의 초현실주의 기법이었던 오토마티즘을 벗어나서 편집광적 환각에 의해 꿈과 현실을 이어붙이는 작업을 하게되었다. 세계에 숨어있는 현실의 그림자를 편집광처럼 붙잡아서 현실에 꼬매 붙였다. 달리는 이중의 이미지 기법을 사용하였다. 시각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한 화면에서 보여주고자 했다.
프로이트를 찾아간 달라는 꿈의 해석에서 영감을 받아 프로이트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1938년 나르키소스의 변형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는 청년의 열정에 대한 인상만 남겼을 뿐 인정을 받지는 못한다. 달리는 프로이트가 개발해준 인간 내면의 3가지의 구분을 마음대로 휘저었다. 무의식을 의식속으로 꺼내 놓고 그것을 다시 현실로 표현하는 기법이 후반부로 갈 수록 그를 천재 혹은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어쩌면 8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미디어와 리믹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이미지이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혼란스러운 이미지였을까를 생각한다. 누구나 시대를 몇백년이고 몇십년이고 앞서서 산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이들에게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곤 했다.
작품
다가오는 밤의 그림자 1931
시간의 속도 1931
수에즈 1932
무제(맑은날씨의 지속) 1932
형태학의 메아리 1935
자바의 마네킹 1934
유령마차1933
이교도의 흔한 풍경 1937
볼태르의 흉상 1941
1940년 미국에서의 새로운 기회
이미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달리는 친한 친구였던 앙드레 브르통과도 의견차이를 드러내고 1938년 '내가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라고 하면서 초현실주의 그릅과 단절한다. 미국에서의 달리는 캔버스를 뛰어넘어 연극과 헐리우드 영화에도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5년 나가서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달리는 이를 통해 1951년 신비주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핵물리학에 대한 접근과 함께 스페인 전통의 신비주의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생물학적 관점을 보여준다. 그의 안에서 물질, 원자 감정, 전통과 신비함은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
작품
광란의 트리스탄 프로젝트 1944
가을 소나타 1945
붕괴된 다리와 꿈 1945
백조깃털의 원형 속 평형상태 1947
네로 코 주위의 탈물질화 1947
임신한 여성이된 나폴레옹의 코 1945
다시 영원한 포트이가트로, 1950
1948년 달리와 갈라는 분주한 미국생활을 접고 포트이카드로 돌아온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면서도 르네상스 전통에서부터 과학과 생명, 종교에 대한 의식들을 발전시킨다. 이제 달리에게는 무의식과 의식의 연결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 주가 된다. 점점 미쳐간다고나 할까?
작품
정오noon 1954
포트이카드의 풍경 1950
옷을 걸치고, 전속력으로 빛을 앞지르는 내 아내 데콜데의 살 1954
시각적 환상에 대한 탐구, 1960-1970
달리는 외적 현실과 내적 현실을 동시에 표현하기 위해서 편집광적 비판해석, 이중 형상, 스테레오스코피, 홀로그래피,4차원 탐구와 같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달리는 극장미술관을 197년 설립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장소에 모두 모으게 된다. 체계적으로 혼란을 창조해야 더욱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다. 모순적인 것들이 새로움을 창조한다ㅜ
작품
구름속 전투 1979
후안 데 에레라의 입방체 연구에 대하여 1960
환각을 일으키는 투우사 습작 1969
갈라의 방 1974
영원불멸한 거장들의 천국
미술사의 거장들처럼 칠하는 법부터 배워라. 그 후에 원하는 대로 하면된다. 그럼 모두가 너를 존경할 것이다.
작품
아비뇽의 젊은 여인들 1970
전사 혹은 로스 엠보자도스 1982
지질학적 메아리, 미켈란젤로 피에타 재해석1982
무제, 엘 에스코리알의 마당에서 벨라스케즈의 어릿광대 돈 세바스찬 드모라 재해석 1982
민네이션 감상평
달리의 천재성과 통합성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그림은 아니었던 듯하다.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을 꺼내놓는 방식도 너무 투박하다고 생각했다. 투박하다는 것은 어떤 가상을 떠올려야만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달리의 광적인 행보는 사실 편집증적 회화기법으로 나타나는데, 자신의 머릿속에 모아온 모든 이미지들을 쏟아놓는 느낌이 들었다. 프로이트로 치자면 초자아의 명령을 피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모슨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이 물신화해서 화폭에 고정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거장은 이미 기준을 넘어서 스스로 선을 창조하고 공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달리의 그림은 초보자인 내가 평가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달리의 삶이 그렇게 평화롭거나 멋져 보이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욕망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남자가 자신의 부인에게 거리감을 두면서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은 매력이 없다는 것일테니, 아마도 달리를 직접 만나면 별로 매력을 못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자리를 옮겨서 삼청동길을 걷고 생각하는 사이에 내가 사는 현실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이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꼭 따로 가져야만 존재가 가능한 위치로 도망가 버렸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사치이고 어떤 이에게는 재산이 되는 듯한 사회에서 달리의 작품은 가격은 비싸지만 나에게는 한갓 프린트된 포스터로 밖에 안보였다. 다소 달리에 대해서는 실망을 많이 느껴서 그런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