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지식을 전하는데 급급했다. 따라가야 할 것도 많았고 정말 밤을 새야만 알 수 있는 지식들도 있었다. 몰입하고 지치고 그럼에도 결국 학위를 끝내고 조금은 여유를 찾은 것 같다. 누군가처럼 기억력이나 머리가 좋아서 금방 이해하는 IQ를 가진 것도 아니기에, 매번 밤을 새서 미래의 생명을 현재로 끌어다 써야만 겨우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다 보면 언젠간 도착하는 목표가 아니었다. 겨우겨우 올라가면서 도대체 언제 끝나지라는 말을 수백번 되내인 것 같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항상 실망하기에 기대감을 낮추는 사람들의 선택처럼, '이 다음에는 무엇인가있겠지'가 아니라 '일단은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앞만보고 가보자'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시간이 좀 생겼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쉬어도 괜찮은 시간!
왜 밤만 되면 '고야'가 생각나는 것일까? 침묵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라서 그런가.
1. 낭만이란 무엇인가?
이제야 조금씩 저녁에 달리기를 하고 있다. 매일 달리기 하는 즐거움으로 살았는데, 코로나 혹은 미세먼지 혹은 과제로 달리지 못했더니 몸이 말이 아니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음악을 듣고, 책을 듣고, 영미문학을 들으면서 영국과 미국, 세계를 돌아다니고 온다. 예전에는 '낭만'이라는 것이 누군가와 멋진 여행을 하면서 좋은 풍경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들어서 드는 생각은 '나만의 여유를 가지고 삶을 돌아보는 것'이 낭만이라고 정의하는 중이다. 달리면서 드는 생각들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예전에 하던 고민들보다 수위는 한층 더 깊어지고 해결책은 더더욱 안 보인다. 그래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일단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이야기보다는 듣기를 더 열심히 했던 것도 같다.
시간의 무게를 더해가면서 낭만이라는 것은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면서 여전히 이상을 품고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꿈꿀 수 없으면 과연 인간인가?에서 시작해서 현실을 창조해나가지 못하면 과연 인간인가?까지.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낭만이라면 나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놓고 현실로 돌아오면 수 많은 가치들이 서로 싸우고 있고, 이웃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으며, 나는 빈털털이에 한탄만 해야하는 것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제리코, 메두사 호의 뗏목 / 현실은 이와 같은게 아닌가? 마치 낭만주의화가들이 진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이.
어릴적부터 산동네, 임대아파트를 전전긍긍하다보니 '불쌍하다'는 말을 듣는게 싫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닌데, 어떤 계급처럼 지하 밑으로 숨어 버리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소리낼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의 언어를 잃어 버린 사람들! 그러나 존재하고 숨쉬며 마땅히 인간으로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 연민이나 공감보다는 그냥 내 존재자체가 그랬던 것 같다. 공감이라는 단어도 말이 공감이지 내가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으니 한번 이해해보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평등은 어릴적부터 내 몸에 학습되었고, 무엇인가 열심히 해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주식을 하거나 부동산을 하거나, 책을 내거나, 사업을 하거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들 투성이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좀처럼 '가치'를 지킨다고 남을 돕는 직업을 갖거나, 정직하게 투기아닌 투자를 안한다고 주식을 안하거나 하면 삶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더 싼거, 오래쓸 수 있는 거, 조금이라도 마음을 값싸게 채워줄 수 있는 것으로 손이 갔다.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생각을 다르게 하면 다른 삶을 살수 있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서 게으름이나 나태, 생각의 허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나를 깨워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결국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런 생각을 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환경, 사람들, 어릴 적 기억,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이런 것들이 받쳐 주어야 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빈곤한 환경,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주변 사람들, 어릴적 학대받은 기억이나 사고의 트라우마, 네자리를 못넘는 통장잔고. 이런 것들 속에서 생각을 다르게 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용기를 내서 불굴의 의지로 성공한 사람들의 신화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손가락에 꼽아야 한다. 그러니 환경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본받거나 멋있게 여기는 판단의 반대쪽에 그렇게 못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답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구조에 낀 체 갈려나가고, 아이들은 자라서 운명이 정해 놓은 길을 지우지 못하고 '세상은 원래 그래'라고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나름대로 노력은 해 봤으나 뾰족한 수도 없이 고민은 깊어지고 좌절은 점점 쌓여 갔다.
답이 없다. 상자 속에 갇힌 사나이처럼, 내가 경험한 것들을 그대로 계속 경험할 경우에 나는 이 상자에서 나갈 수 없다. 환경, 사람, 경험, 이해, 지식, 학습, 한계, 자본과 같은 연결고리에서 규정된 상자 속에서 나는 빠져나갈 수 없다. 갇혀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나올 게 없다. 중요한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다시 이 상자를 찢어 버리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는 것이다. 갇힌 곳에서 그 상태를 한탄만 하지 말고 그냥 인정하고 이제 나갈 궁리를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나만 나가면 안된다. 그래서 도전이다. 같이 나가야 한다. 상자 속에 갖힌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기운을 북돋아서 같이 가야 한다. 그러니 더 큰 도전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하기로 하는 것부터 일단 가슴이 뛴다. 할 수 없는 것들을 도전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래서 일단 달기를 다시 시작했다. 무작정 달리는 것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그러면 안되겠단 생각보다는 움직이고 있는 내 몸이 뇌와 반응하여 무엇이든지 움직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운동'을 하면 온도가 올라가고 온도가 올라가면 변할 수 있는 '가소성'이 증가한다. 달리다 보면 상념이 상상이 되고, 더 달리다가 보면 상상이 어떤 상징이 되어서 떠오르는 때가 있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걸을 소설로 쓰지만 나는 어떤 제도나 시스템 그리고 방법을 생각한다. 그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정보와 지식을 찾아보고 사람들을 찾아본다. 그 다음날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한동안 달릴 수 없을 때는 온 몸에 힘이 빠진 것과 함께 정신의 기운도 빠져 버려서 스스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할 수 없었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달리고, 한계에 대담하게 접근하고 내가 피하고 싶었던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할 수록 두려움은 사라졌다. 나태와 함께 손잡고 나타나던 허무주의와 순응주의도 멀리 도망갔다. 지친 몸도 다시 하루 4시간이면 거뜬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몸과 정신, 영혼과 마음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상자를 나갈 생각을 해야겠다.
4.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들과 그것을 만들어가는 기술
몇번이고 달리는 내내 정재승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혁명은 어떻게 오는가'의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기여코 다시 '기술'의 문제에 도달했다. 대학원에서 '정책학'을 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이제 이것을 접목시킬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 왔지만,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막막함이 앞섰다. 기술정책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도전도 해보았으나 오히려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술을 중심으로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았다. 세상을 해석하는 곳에서 멈추지 말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을 하기 위해서 어떤 실을 꿰어야 할까라는 고민.
히피들이 꿈꾸던 세상에 기술이 결합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게 이상주의적 현실주의, 즉 낭만주의가 아닐까?
1968년 프랑스에서는 20세기 제일 중요한 혁명이 일어났다. '금지된 것을 금지하라'라는 구호에 맞게 모든 낡아빠진 질서를 철폐하고, 기득권들을 몰아내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68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68혁명은 수 많은 히피들과 락앤롤 문화를 만들어냈고 프랑스 사회는 수평이라는 구호를 넘어서 실제로 제도들이 바뀌기 시작했고, 대학의 서열도 파괴되었다. 유럽전역을 넘어서 미국과 일본까지 넘어왔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68혁명의 덕을 보지 못하고 독재정권에 가리워졌다. 겨우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68혁명을 이야기하는 정도니까. 그런데 유럽과 미국에서는 수 많은 히피들 중에서 '실제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을 만들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튜어트 브랜든은 생물학을 전공하고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whole earth catalog를 만들어서 우리 지구에 빈번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명된 제품들을 소개했다. 1960년대에 10대를 보냈던 켈리포니아의 청소년들은 히피와 테크놀러지를 결합했다. 시대와 세대가 만나서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냈다.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어냈고, 삶을 바꾸어 냈다.
명상과 기술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원래 하나였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기술은 68혁명이 담고 있는 평화와 사랑, 평등의 개념이었다. 물론 이들을 모두 잘했다고 칭찬하거나 치켜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닫혀진 사회라는 단단한 껍질을 부숴트리고,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했떤 이들의 노력을 생각해보자면 달리는 내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세상을 좀더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유플랫폼을 만들어내고, 평화가 깨지는 이유는 의사소통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자신들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트가 만들어진다. 위키피디아 같은 사이트는 모두가 백과사전을 만들어 간다. 문제는 기술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만드는 이유와 사용방식이다. 또한 대안으로서의 기술을 생각해보면 이상주의자가 서서히 현실에 발을 내딛고서 현실주의자가 되어 가는 것을 그려볼 수 있다. 절망적인 지점에서 나는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Whole Earth Catalog
Whole Earth Catalog
5. 그럼 이제, 해결해야할 문제들
그 동안 제 1의 기계의 시대에서 살았던 예전에 모습을 뒤로 하고 이제 제 2의 기계의 시대로 넘어간다. 그동안 미안한 마음으로 가두어 두었던 고민들을 풀어 놓는다. 문제와 대안을 매칭시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술들을 만들어내거나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영속석이 필요하면 제도를 만들어야하고, 세력이 필요하면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해야 한다. 진보와 빈곤에서 헨리조지가 말한 '지대'에 따른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갱노노'와 같은 기술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지대에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생산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 수 있지라는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빅데이터와 데이터레이크 사이에서, 아톰과 비트 사이에서 자유롭게 뛰놀면 알고리즘을 가지고 놀면서도 양자와 우주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상상력도 필요하지만 칼 세이건의 치밀함도 필요하다. 비트코인에서 얻어지는 이득을 넘어서 이더리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블록체인이 민주화를 어떻게 증진시킬지를 고민한다.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장애가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고민하는 것과 함께, 노동이 사라진 미래에서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계속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자기혁신과 형질전환이 필요하고 미친 상상력을 미친 실행력으로 풀어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하지 않고 싶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 않다. 앞으로 계속해서 꿈꾸고 포기하지 않고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출처와 연결점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하루키처럼 달리고 상상하고 두뇌를 우주로 열어 놓고 기도를 한다.
풀죽어서 쓰던 글이 다소 용기낸 젊은이같은 인상으로 마무리 한다. 우리시대에, 다양한 세대를 넘나드느라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다시 힘을 얻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이상주의자이겠고, 때론 다른이에게는 현실주의자이겠지만, 여전히 그 둘을 잇는 낭만주의자가 되고 싶다. 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별을 볼 수 있는 관점과 그 시간이 열렸을 때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가지기 위해서 다시 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