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웅거_지식경제의 도래_지식경제를 포용적으로 만들기
로베르토 웅거는 하버드대학 법학과 종신교수다. 브라질태생인 그는 룰라대통령 재임시기 장기계획부 장관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 법학자다. 웅거의 생각의 뿌리는 1400년대 활동했더 니콜라우스 쿠자누사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무한과 유한 사이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무한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신과 인간의 거리는 모두가 동등한 거리를 갖는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러한 생각에서 나오는 민주주의, 법치주의, 생산력과 경제제도는 평등하면서도 무한으로 나아가려는 진보적 대안을 고민할 수 밖에 없다.
함께 읽는 협동조합 사람들과 함께 웅거의 저작 중에서 주체의 각성을 읽었고 두번째 저작인 민주주의 이후를 읽으면서 제도적맥락까지 이해했다. 지금은 경제영역으로 넘어와서 지식이 어떻게 생산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웅거가 생각하는 지식경제는 '재분배'에 있지 않고 '생산'에 있다. 생산하는 방식을 포용적이고 전위적으로 바꾸면서 그 중심에 '지식'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재생산을 위한 공장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상상력과 무한에 대한 잠재성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생산현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혁신기 기반되고, 자연스럽게 정보와 지식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은 그것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들을 돌아본다. 교육적-인지적-사회적-도덕적-법적 전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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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전위주의는 급진화된 전위주의이다. 포용적 전위주의가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또한 이 모든 부문의 각 부분에서, 광범위하고 다양한 여건들을 가로질러 확산됨에 따라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은 그 가장 심층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발전시킨다. 그러한 생산방식이 협력적 활동과 상상력 나아가 영구혁신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산방식의 참여자들에게 대량생산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코차원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포용적 권위주의는 청년기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특정한 종류의 교육을 또한 요구한다. 이러한 포용적 전위주의는 일반교육과 기술교육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기술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은 포용적 전위주의는 세계가 독일로부터 배웠던 기술훈련 모형을 거부해야 한다. 대량생산 시대의 경직된 기계도구들을 운영하고 엄격하게 구별된 직종과 전문직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직업별 및 기계별 기술을 강조하는 모델을 독일식 기술모형이라고 한다. 이러한 독일식 기술모형은 '히든챔피언'이라고 해서 한 영역에서 숙련된 기술공을 만드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 2차 산업이 주가 된 시대에는 맞는 방식이었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웅거는 독일식 기술훈련 모형을 일반적이고 유연한 고차원 능력을 중시하는 모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웅거가 이야기하는 4가지의 교육적 특성
1. 일반교육
2. 기술교육
3. 청년교육
4. 평생교육
포용적 지식경제 만들기
1. 상상력 : 교육의 방법이 분석적 능력과 종합적 능력, 더 일반적으로는 정보의 숙달보다는 상상력과 관련된 권능에 우선권을 부여해야만 한다.
2. 심층적 : 미래의 필수적인 능력과 정보의 활용능력을 발전시키는데에는 주제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백과사전의 온갖 개요를 암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3. 협력 : 교육이 사회적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교실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와 개인주의의 혼합보다 교육과 학습에서의 협력을 보장해야 한다.
4. 변증법 : 모든 주제와 방법은 적어도 두 개의 대조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교육은 사회의 어떤 권력도 학교를 자신의 추종기구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은 국가와 가족의 영향력을 통제하고 나아가 학생과 교사가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교육에서 중요한 긴장을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정치적, 법적, 재정적 수단을 갖추어야 한다. 지식경제의 원동력은 '정치사'와 '정신사'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의사결정의 결과가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바꾸고, 시장질서를 어떤 식으로 구성해왔는지의 역사를 아는 것과 문명의 발달과 인간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서 '어떻게 나의 좌표가 여기가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생산의 도덕적 문화에서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신뢰와 재량 수준의 고양을 유지하는 작업방식뿐만 아니라 특징적이고 까다로운 특성들을 지닌 협력관행의 향상에 있다. 중요한 쟁점은 도덕적 생산기반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우리의 의도에 따라서 실천가능한지 여부이다. 지식경제가 도덕적 문화를 기반하지 않으면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세계와 정치질서, 사회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
작업장 내에서 지휘통제에 기초한 노동분업에 대한 접근 방식은 재량의 여지를 봉쇄하고 신뢰를 권력과 감시로 대체한다. 경직된 기계의 작동을 모방한느 작업의 반복적 성격은 생산적인 과업들의 전문화된 집행자들에게 집행을 담당하고 있는 바로 그 계획을 다시 정의할 기회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고용계약의 암묵적 조건은 생산과정을 지시할 모든 나머지 재량이 법과 단체협상의 제약 안에서 소유자가 임명한 관리자들에게 유보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기성제도에서 생산적 자원과 기회의 분산적 접근을 조직하는 중요한 법적 장치들은 통일적인 재산권과 이에 부응하는 계약법상의 장치로서 쌍무적인 미이행계약이다.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다른 도덕적 문화를 요구하고 그러한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포용적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도덕적 환경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그러나 포용적 전위주의는 결코 그자신의 도덕적 기초의 만족스러운 건축가일수 없다. 그러한 기초도 의도적인 행동의 결과여야만 한다. 신뢰와 재량의 향상은 계획이 집행 과정에서 수정됨에 따라 생산적인 업무의 계획수립과 그 집행의 차이를 이완시키고 경쟁에 맡기는 활동과 협력에 맡기는 활동의 차이를 상대화함으로써 순차적으로 발전한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인지적-교육적 요구사항과 법적-제도적 요구사항의 진보가 이루어져야 사회적-도덕적 진보가 일어난다
협력체제의 기여도 판단하기
1. 협력체제가 최대다수의 경제주체들의 재능과 역량을 어느정도 사용하고 이들에게 생산적인 자원과 기회에 대한 접근기회를 어느정도 확장하는지이다.
2. 협력체제가 협력의 요건과 혁신의 요건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지 여부이다.
협력적 사례
1. 교육 협력적 사례는 '학생-학생, 학생-교사'의 협력관계를 만들기이다.
2. 국가와 시민사회의 협력은 국가가 진행하는 교육과 시민사회가 진행하는 교육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 교육을 한다고 하면 국가에서 예산과 제도를 만들고 진행을 시민사회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3. 세번째는 돌봄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돌봄은 한 주체만 가능하지 않다. 온 마을이 필요하다.
사회적 연계-지식경제의 포용성
1. 사회상속제가 안정적인 지식경제를 이끌어가는 기반이 된다. 출생시에 모든 사람에게 그가 삶의 전환점마다 융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 상속분, 사회의 생산자산에 대한 지분으로 제공함으로써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의 패키지를 발전시킬 것이다.
2. 변화의 기회로서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회의 기성구조를 부분적이지만 누진적인 재구성에 더 개방함으로써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동시에 재정비할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시장경제의 제도적 안배들의 누적적 수정을 요청한다. 고립적 전위주의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더욱 강력하게 규제하거나 누진세와 사회적 권리와 이전지출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고자 우리가 지금까지 실천해왔던 것에서 더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규정하는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해야만 한다.
제도적-법적 기초들의 발전 3단계
1. 1단계 : 기회의 포용적 공유
가장 선진적인 새로운 생산방식의 후보자인 신흥기업들에게 유리하게 생산자언과 기회의 접근을 넓히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1단계 과업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최선의 경로를 실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을 조직하는 데에 조력해야만 한다.
자본과 선진기술, 이와 연관된 관행과 능력, 필수적인 숙련기술을 갖춘 노동력, 접근성을 모두에게 공유해야 한다. 이러한 공유가 법적인 기반을 가지고 제도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 2단계 : 관계 형성
정부와 기업관의 관계라는 수직축과 기업들 간의 관계라는 수평축에서 생각해보자.
기존의 문제는 정부의 팔길이 규제와 정부관료가 하양식으로 부과하는 동북아시아 모형이다.
그러나 규제모형이 아니라 관계형성을 통해서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가야하고, 이것을 위해서 제도적인 기반이 만들어저야 한다.
3. 3단계 : 재산권
저작권, 특허권 및 현행법상 유사한 권리들은 지식재산의 지주로서의 특출하고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지식재산을 생산에서 혁신적인 활동을 조직하고 장려하며 보호하는, 더 광범위한 방법들의 일부로 개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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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개념
1. 가소성
상온에서는 고체상태로 존재하지만 열을 가하면 부드러워지는 플라스틱 소재의 특성을 의미한다. 사회경제적 제도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고에너지를 분출하는 민주정치가 필요하다는 사고와 연결된다.
웅거의 이상적인 사회상은 고도로 가소적이고 실험주의적 사회이고, 구조로 말하자면 구조들을 갖지 않는 구조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맥락보존적 활동과 맥락변경적 활동 사이에 격차가 매우 줄어든다.
2. 사회상속
사회상속은 원래 개인상속을 부인하고, 공동체가 상속을 하고 공동체가 신규 참가자에게 출발자금을 제공하고, 이러한 제도를 세대에 넘어 지속시키는 방식이다.
중세 길드 조직에서 관행화되었으며 19세기에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이 이를 전사회적인 제도로 구상하였다.
1830년대에 토마스 스킷모어는 연중 사망자들을 총합재산을 사회가 상속하고 연중 성년에 이른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누는 방식을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발상에서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과 같은 현대적인 재분배적인 세제가 탄생하였다.
오늘날 고율의 상속세로 세대 간의 불평등을 조정한다. 이러한 상속세가 재분배조치를 위한 도구로서 연결성을 확고하게 갖는지 의문이며, 신규진입자의 기본자산으로 활용되는지는 더욱 의문이다.
3.
민네이션, 생각
웅거는 사민주의를 비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부드럽게 타협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더 좋은 사회가 가능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는 오히려 개량주의 한 측면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사정위원회'는 사실 문제를 해결한것이 아니라 '합의'한 정도인 것이다. 이것은 가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종착지는 아니고 최종국면이 아니라 시작에서 아이스브레이킹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에 집중하고 결과는 자유롭게 열어 놓는 것이다. 결과에서 민주주의를 이룰려고 하는 것은 전면적이 아니라 사후약방문격이라는 것이다. 나는 일면 이 이야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균형적으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나의 생각이 너무 점진적이여서 웅거의 우려처럼 그 열정을 중간에 다 써버리지는 않을까?이런 고민도 든다.
웅거는 '자유사회주의'라는 측면에서 사회의 다양한 형태의 기업이 존재하고 그에 맞게 생산을 극대화하면서 실험주의적 경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영구혁신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혁신과 협력은 서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협력체계에서 혁신이 발생하면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초기에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질문을 만들어 보면 인지적 교육적 요구가 안 받혀주거나, 사회적 도덕적 요구가 이뤄지지 않거나, 법적 제도적 요구가 맞혀지지 않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고립성은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과는 다른 폐해를 낳는다. 이러한 고립성은 또한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인구를 가진 최고 부국에서조차 노동자의 대부분을 생산성이 낮은 일자리에 속박시킴으로써 이들을 왜소화시킨다. 이러한 고립성은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능력을 계발하고 인성을 표현하는 데에 불충분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위축된 삶을 강요한다. 포괄적인 지식경제의 더 높은 목적은 일상적인 경험을 변혁함으로써 왜소화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다.
현재 고립적인 형태의 지식경제 밖에 머무는 다수의 사람들은 타인을 돌보도록 요구하는 역할을 통해서 왜소화를 실제로 회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돌봄경제가 현재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특징들을 갖게 된다면 돌봄경제는 또한 변혁될 수 있고 그 경제주체와 수혜자들의 역량을 동시에 더 훌륭하게 강화할 수 있다.
더 깊고 광범위한 형태의 지식경제의 원대한 가치에 대한 통찰을 심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인성의 자체 형성에 대한 경제활동의 위상에 대한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견해를 고려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케인스 둘 다 가까운 미래에 희소성의 정복을 예견하였고 이러한 정복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으로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희소성의 극복을 통해 우리는 생계(개인과 사회의 유지)를 위해 노동해야 할 혐오스러운 짐을 벗어버릴 수도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생산적인 노동이 모두 희소성의 지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는 불가피한 도구적인 필연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들』의 저자인 케인스에게 도래할 희소성의 극복은 우리가 경제적 필요에 의한 일로 우리 자신을 낭비하지 않고 사적인 숭고함들(최고의 경험형태)에 헌신하도록 허용해줄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고타강령비판 서문』의 저자인 마르크스에게는 일련의 생산양식들의 시련에 의해 가능해진 생산력의 발전은 희소성의 극복과 더불어 종점에 도달할 것이다. 희소성의 극복은 계급사회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현재소비를 초과하는 잉여의 강제추출을 확보하기 위한 계급구조는 지금까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일단 희소성의 제약에 놓인 계급구조의 기능적 기반이 사라지면 경제적 필요에 의해 인성의 한 측면만을 표현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침으로써 개인에게 거세를 강요하는 노동의 분업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지면에서 나는 이러한 희소성 개념과 노동 관념을 모두 다 거절할 이유를 제시하겠다. 우리는 인류가 예견할 수 있는 어떤 미래에 희소성을 극복할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희소성의 그늘 아래서 노동을 계속할 필요성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전망들이 위축시켜야 할 필요도 없다. 지식경제의 더 깊고 보급된 형태 아래서 우리는 도구적 노동관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노동에서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견해에서 이러한 주제를 재고함으로써 포용적인 전위주의의 더 높은 목적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희소성의 부담이 곧 제거될 것이라는 견해를 의심할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지식경제는 생산과정에서 투입변수의 증가에 대한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을 완화시키거나 심지어 역전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력의 달성은 희소성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경제의 많은 영역에 대한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확산조차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희소성의 지속을 예상하는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역사적 사회들이 낡은 형태를 교정하는 경우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예속과 배제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모든 역사적 사회들은 국가 내부에서 또한 국가들 간에 권력투쟁의 결과로 새로운 형태의 예속과 배제를 발생시킨다. 희소성은 더 이상 승자들을 괴롭히지 않는 순간에도 패자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나의 실례가 대량생산의 사양길에서 불안정고용의 증가현상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속과 배제의 발생을 방지할 가장 좋은 전망은 경제에서의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과 정치에서의 고에너지 민주주의의 발전을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안전한 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향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줄곧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의 투쟁이든 다른 형태로든 권력투쟁에서 새로운 전향들과 구축된 이익과 불이익의 새로운 사례들로 놀라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불평등의 영구적 발생은 경제사에서 맬서스의 이론[인구론]에 의해 심화된다. 이러한 시련의 희생자들은 아동을 노년의 경제적 불안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나아가 희망의 징표로 삼을지도 모른다. 이제 [인구] 다산성은 희소성이 극복될 날을 (심지어 무기한으로) 지연시킬 것이다.
희소성의 장구한 여파를 예상하는 두 번째 이유는 지식경제가 욕구와 소비를 인정하는 데에 더 큰 기회를 창출하더라도 욕구와 소비의 모방적이고 충족불가능한 성격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생산공학 수준에서 지식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제품과 서비스의 탈규격화와 맞춤제작을 허용하고 소규모의 비교적 비싼 장인적 제조형태보다는 저가제품의 대량시장도 허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진적인 제조업과 지식심화적인 서비스의 이와 같은 특징적인 잠재력은 모방적인 욕구에 더 큰 여지를 제공한다. 대체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생명의 보존과 재생산이라는 근본적인필요성들을 넘어서는 인간의 욕구는 고정된 내용을 갖지 않는다. 인간의 욕구는 타인들의 본보기에 의해 쉽게 납치를 당하고 이러한 본보기는 본디 내용을 갖지 않은 욕구를 충전시킨다.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의해 가능하게 된 맞춤제작은 모방을 구실로 개인적 갈망의 겉모양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욕망할 수 있는 더 많은 것이 그리고 모방할 더 많은 욕구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인간의 욕구는 단순한 모방일 뿐만 아니라 공허하고 부동(浮動)하며 총족불가능하다. 생존의 필요를 넘어서 특정한 물건에 고착됨으로써 인간의 욕구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도 우리에게 보장할 수 없는 것(우리 각자는 각자가 선택한 것이고 세상에는 그를 위한 무조건적인 장소가 있다는 것)에 대한 선불금으로서 특정한 물건을 원하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는 충족불가능하다. 우리는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을, 조건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을, 무상한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특수한 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거기에서 얻어내려는 욕구의 좌절은 우리를 영원한 추격전으로 몰아세운다. 나아가 지식경제 시대의 생산의 새로운 특징들은 추격전을 계속해야 할 구실을 배가시킨다.
욕구가 충족불가능하다면, 희소성은 종말에 이를 수 없다. 우리에게 더 이상 원하는 바가 없는 상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희소성은 욕구와 견주어서만 측정할 수 있다. 무제한의 욕구는 무제한의 수요를 의미하지 않는다. 수요는 욕구를 구매력으로 전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에 대한 수요제약과 동시에 공급제약이 존재한다는 점과 경제성장에서 공급측면의 제약에 대한 돌파구가 수요측면의 제약에 대한 조응하는 돌파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욕구를 무제한적 것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모순이 없다.
희소성의 무기한 존속을 예상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지식경제가 출현하는 사회에서 욕구들과 수요들(타자의 개인화된 서비스와 배려에 대한 우리의 청구와 관련된 욕구들과 수요들)의 부분집합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맞춤제작의 경우에도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필경 쇠퇴할지도 모른다. 기계는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직업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 상호간에 서비스와 배려에 대한 우리의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만약 서비스와 배려가 공짜로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구입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타자로부터 확보한 모든 특수한 이익은 우리 각자가 가장 원하는 것(그가 자기 인정의 기초이자 타인에 의한 인정의 기초로서 세상에 하나의 안식처를 가지고 있다는 보장)의 대용품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의 증가하는 상대적 중요성은 희소성이 종식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증한다. 모든 서비스는 그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무조건적인 장소의 징표로서 숨은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용 가능한 서비스의 한정된 재고에서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지배적 지위를 독립자영업과 협동기업의 결합에 양보한 경제에서 배려에 대한 필요도 역시 충족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섬에서 타인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줄이고자신의 삶에서 타인들의 부재를 보상하기 위해 물건들을 비축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을 했다. 그는 사물들의 비축을 타인에 대한 의존성의 기능적 대체물로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체품의 결점과 불만은 곧 분명해진다. 심지어 로빈슨 크루소조차도 [하인] 프라이데이가 필요했고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꾸몄다. 그조차도 사물의 비축을 친구나 동포의 사회로 대체하고 싶었다.
지식경제의 융성은 이러한 사실들을 바꾸지 못한다. 그것은 이러한 사실들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제공한다. 지식경제의 융성은 우선적으로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개인화된 서비스로 노동력을 이동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이러한 필요는 시간이 흐르면 약화된다)와 타인과 그 서비스에 대한 우리의 필요(이러한 필요는 시간이 지나면서 증가한다)에 더 큰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누적적 자산효과를 통해 그렇게 한다.
마르크스와 케인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현재까지도 경제생활에서 가장 집요하고 보편적인 규칙으로 남아 있는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을 완화하거나 역전시키는 생산형태 하에서 희소성의 중요도가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희소성을 극복할 전망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어떠한 노동분업 하에서 도구적 노동관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와 케인스는 생산체계에서 노동을 희소성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되고 우리를 더 큰 가능성에서 멀어지게 하는 적나라한 필연성으로 파악하면서 도구적 노동관을 당연시하였다.
도구적 노동관은 일종의 세계 포기에 해당된다. 우리가 희소성의 부담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또한 이를 제거할 때까지는 이러한 노동관은 우리의 물질적 생활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고차적 속성들을 통찰할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의 한 부분을 바꾸려고 노력함으로써 노동이 우리 자신을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게 한다는 이상은 이러한 노동관에 따르면 물질적 욕구가 우리를 생산의 수레바퀴에 더 이상 묶어두지 않은 사회에서만 적실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까지는 혜택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사회질서에서 배교자로 살아가는 고립된 예술가나 사상가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특권에 수반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투쟁으로 소진될 것이다. 이 행복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편익들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통찰력, 미덕, 행운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경제생활은 항상 제약의 영역이다. 자유는 이제 경제 안에서의 자유라기보다는 경제로부터의 자유이다.
어떠한 경제체제나 생산방식도 제약 없는 자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산이 제약뿐만 아니라 자유의 영역이 될 수 있는 범위는 경제적-정치적 체제에 따라 다르고 생산방식에 따라 다르다. 지식경제는 내가 설명한 수단과 방향으로 심화됨에 따라 자유의 경험에 대한 개방의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지식경제는 현재 고립적인 형태에서 보여주는 표층적 특성보다는 그 심층적 특성(수확체증의 잠재력, 발견으로서의 생산의 재구성, 신뢰와 재량의 강화)을 통해 더 많은 것을 한다. 지식경제는 그러한 심층적인 특성의 결과라기보다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보급에 대한 인지적교육적,사회적-도덕적, 법적-제도적 요구사항들 덕분에 더 많은 일을 한다. 나아가 지식경제는 그러한 요구사항의 충족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러한 조건의 충족에 우호적인 배경조건의 결과(문화에서 실험주의적인 충동의 급진화와 정치에서의 고에너지 민주주의)로서 더 큰 역할을 한다.
지식경제는 경제로부터의 자유[해방]보다는 경제 안에서의 자유를 제공할 잠재력을 가진 하나의 분리된 생산방식으로 파악되기보다는 지식경제의 전진을 반드시 야기하는 실천과 사유에서의 원대한 운동으로 파악된다. 우리가 생산노동에서 그 지지구조로 더 멀리 나아갈수록, 경제생활에서 제약과 자유 간의 균형을 이동시킬 잠재력은 그만큼 더 커지게 된다. 지식경제는 그 요원한 잠재력을 달성하기 위한 유인책들의 맥락에서 하나의 생산방식으로서, 종합 패키지로서 해방적 약속을 견지한다.
이 약속의 내용을 노동의 성격과 지위라는 관점과 생산방식과 정신적 경험 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완적으로 고찰해보자.
문명의 역사에는 세 가지 주요한 노동관이 있었다. 처음 두 가지 노동관은 역사를 통틀어 인류를 뒤덮고 있다. 세 번째 노동관은 최근의 혁명적인 발명이다. 첫 번째 노동관은 도구적 노동관이다. 희소성의 멍에 아래서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 역사가 목격해온 불평등한 사회에서 부담해야 했던 노동에 관한 관점이다. 구원과 인간성은 다른 곳, 즉 불가피한 노동 감옥 바깥에 있는 가족생활과 인격적 관계들 속에 존재할 것이다.
두 번째 노동관은 명예로운 직업으로서의 노동관이다. 사회적 노동분업 아래서 존경과 자기존경 또한 생계수단까지 제공해주는 지위, 전문직, 특수직 노동에 대한 견해이다. 그러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회와 경제에서 일련의 안정된 일상과 예정된 역할을 수용하는 대가를 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욕구와 도덕적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다. 그러한 직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실을 불가피하게 수용해야 한다. 즉 사회에서 무언가 되기 위해 노동의 분업에서 엄격히 제한된 장소를 받아들이고 달리 선택했더라면 되었을 법한 자신을 포기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특정한 사람으로 전환한다.
세 번째 노동관은 변혁적 소명관이다. 민주주의와 낭만주의의 시대의 발명으로서 나중에 지구적 낭만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정치적 교리들203의 날개를 달고 전 세계에 전해진 노동관이다. 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세상의 일부를 바꾸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를 더 위대하고 자유롭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지위와 여건에 대한 우리의 초월성을 긍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개념적 세계에게 마지막 결정권을 넘기는 대신에 그 결정권을 우리 자신에게 유보해야 한다.
변혁적 소명관을 그저 환상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이를 실천하는 일은 소수 엘리트 혁신가들과 지도자들의 전유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이러한 실천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견지한다. 지식경제는 현재의 고립적 형태로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게다가 지식경제가 그러한 약속을 지킬 전망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심화시키고 확산시키려는 운동에 달려 있다. 이 운동의 요건 중 가장 직접적으로 이러한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노동의 법적 지위의 변화, 즉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을 점진적으로 (위장된 임노동이 아닌) 독립자영업과 (대안적인 재산권체제에 의해 조직된) 협동기업의 결합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경제의 안배들, 교육의 성격, 정치의 조직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경제현실에서 변혁적 소명관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변혁적 소명관이 살아있는 한, 그러한 소명관은 자유의 기본적인 측면(우리 활동의 습관적인 구조틀의 형세를 전환함으로써 우리의 권능을 강화하는 능력)을 공유할 전망을 보유한다. 그 가장 급진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는 우리가 만들고 참여하는 사회적 개념적 세계들과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들 속에 있거나 심지어 있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 우리 자신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 아닌 실제에서 긍정한다.
지식경제는 심화되고 확산됨에 따라 생산방식을 상상력의 작용과 더욱 근사한 형태로 만든다. 정신의 이중성에 대한 개념을 기억하라. 한 측면에서 정신은 기계와 닮고 공식과도 같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상상력의 양상으로서 정신은 반기계적인 것으로서, 나름의 정립된 전제들에 도전하고 정신이 습관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을 넘어서 앞으로 밀고 나간다. 정신은 형성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 정신은 우선 직접적인 현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다음 그러한 현상을 (관심의 대상이 인접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변모하는 양상들의) 다양한 변형들 아래서 포섭함으로써 현상을 파악한다.
상상력은 정신의 작동방식에서 초월이기 때문에 자유다. 이전의 어떤 생산방식보다 상상력에게 더 많은 여지를 제공하는 생산형태는 자유의 진보를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가 오로지 경제로부터 자유[해방]보다는 경제 안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정당화한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지식경제는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불평등을 줄이는 것 그 이상을 수행한다. 지식경제는 우리를 함께 끌어올리고 우리에게 공유된 위대함을 제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미래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의 물질적 삶의 기록은 상상력의 길고도 머뭇거리는 승리에 관한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