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는 나를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웃들은 나와그것의 관계이다. 이웃들은 배경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일단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나를 위한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자신의 신념으로 굳건한 사람들이 많다.
두번째는 나를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준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마치 '제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 제게 보람이 생겨요'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도와주는게 아니라 첫번째 방법의 조금 확장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는 이웃을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완전히 버리고, 이웃을 위해서 온전히 나를 버리는 것.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해하고 말이다. 좋은 것 같다. 이웃을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없고, 이웃만 있게 된다. 그러나 내가 없기 때문에 사실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다. 사실은 이것이 더 문제가 된다. 이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수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고귀한 것 같지만, 수단화된 자아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윤리도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더 많은 이웃을 위해서 더 적은 이웃을 죽이고 희생시키고, 그렇게 얻은 목적에 대한 평가도 없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자신이 없고 이웃만 있는 사람말이다.
네번째는 이웃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나를 나눠주는 것이다. 그럴려면 내 안에 먼저 좋은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나를 가꾸고, 이웃을 위해서 나를 돌아보아 정말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나와 너'의 관계가 열린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열등감의 대상으로 스스로 비하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스스로 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아마 주변에서는 많이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은 신기하게 그 사람의 삶에 생명이 있다. 매일 나눠주는 생명의 빵처럼 나눠줄수록 넘쳐나는 생명이 있다. 생수의 강물처럼 매번 흐르는 냉수가 있는 사람이다. 설명은 이렇게 했지만, 가끔 '아 이사람하고 있으면 정말 살 것 같아. 먼가 풍성하고, 먼가 좋은데 그냥 같이 걷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런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유진피터슨의 '부활을 살라'에서 사랑의 4가지 언어를 '이웃'버전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랑은 그 중심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목적과 수단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목적 자체만 구성원으로 가지기 때문에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머라고 표현하거나 이유를 될 수 없다. 그냥 모든 것이 사랑이다. 목적론으로 만들어진 왕국에서 모든것이 목적임으로 굳이 그걸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계속 고민하지만, 외로운 길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항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입하고 있으니깐.
문제는 목적'이 설저되고 나면, 반드시 수단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단이 목적과 하나가 되는 일원론이 아니면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수단화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이웃들의 수단이 된다는 생각을 해보면, 갑짜기 마음이 확 사라지고 생수의 강물이 끊기고, 빵이 더이상 재상되지가 않는 것 같다. 기-승-전-예수님'이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이셔서 그냥 걸으셨다. 그냥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 십자가를 만나고 그길 가운데 부활을 만나는 것 같다.
선악과의 따먹은 인간의 최종 목적은 목적을 판단하여,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을 구분하여 수단과 목적으로 위계지우는 것이 아닐까? 자기도 망하고 이웃들도 망하는 것, 그게 악'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탄식이 아닐까?
그럼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가 지금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비전, 미션, 전략 등등의 것들이 사실은 사랑이 없는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다만, 사랑으로 할 때는 우리의 모든 삶이 사랑 외에는 표현할 것들이 없다고 말이다.
외로운 길이라서, 좁은 길이라서, 오솔길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 분이 부지런히 따라오라고 하시니깐 나는 그냥 걷는다.
걸어가는 모습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한참을 걷고 난 후에 사람들이 내 등뒤에서 사랑을 느끼지 않을까? 왜냐하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때는 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이 아니라 그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 때문이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