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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09. 2023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베르톨드 브레히트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지 압니다!

우리가 아플 때마다 사람들은 선생님이

우리를 낫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선생님께선

사람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근사한 학교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또 선생님의 지식을 위해 돈을 쓰셨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저희를 낫게 하실 수 있겠지요.


저희를 치료하실 수 있나요?


누더기 옷이 벗겨진 채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희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우리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를 한번 흘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우리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이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지요?


너무 많은 노동과 너무 적은 음식이

우리를 약하고 마르게 만듭니다.

선생님은 처방전을 내주셨지요.


몸무게를 늘려라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갈대에게

젖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선생님께선 저희를 위해 얼마나 시간을 내실 거죠?

선생님 댁의 카페트가 보이네요.


오천 번 쯤 진료하면

하나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마도 선생님은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시겠죠. 


저희 집 벽 습기찬 얼룩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_베르톨트 브레히트




베르톨드 브레히트의 시와 기형도 시인의 마음을 왔다 갔다 한다. 우울한 시들을 읽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우울함이 전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남의 어느작은 방에서 몇 킬로그램인지도 모를 만큼 쌔까맣게 타버린 채로 태어난 내가 자라면서 연희동 산동네를 지나서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불우한 청소년 생활을 하던 때를 이해받고 싶어서 우울한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해도 좋을 만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교육에 대한 대리보상을 받고자 하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이렇게 가방끝도 길어지고 있어보이는 글도 쓰고, 논문을 멋지게 아는척 이야기하기도 하고 철학을 과감하게 그림으로 그려버리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여기서 행복을 느끼지는 않는다. 


누군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 나는 행복하다


비참한 삶이란 사실 노동으로 얼룩지고 돈이 없어서 한끼도 못 먹는 것에만 있지 않다. 내일을 생각할 때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 모두 '비참한 삶'의 현실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빈부격차를 떠나서 모두에게 언젠가 다가오는 절망선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려고 치면 아무리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해도 적어도 몇십년에서 몇 백년이 걸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잠이 든다면, 그 사람이 얼룩진습기에 발을 담구고 있던 누더기가 되는 곰팡이옷을 입던 상관은 없다. 내일은 희망적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넘어선 사람이다. 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매우 많은 사기꾼들을 미래를 담보로 해서 현실을 팔아먹는다.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항상 '소격화'를 중요시한다. 소격화란 문제의 중심에서 그 중심을 가장자리로 놓아 버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중심의 공백'으로 불러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에서 그는 '진료'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진료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노동자의 삶 자체가 바꾸지 않는한 계속 누더기 옷과 습기찬 방에서 아픈 곳을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면 베르톨드 브레히트의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결국은 구조를 바꾸어야 하고 혁신을 혹은 혁명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누군가를 계속해서 습기찬 작은방에서 새는 비를 맞으면서도 내일을 절망으로 놓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진료가 끝나면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번에 새로나온 신형 외제차를 타고 내일을 푸른희망으로 놓는 일들이 시작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삐에르부르디외는 '세계의 비참'이라는 책에서 세계의 비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보통 사람은 어떤 것을 인지하는 거리가 있다. 인지하는 거리가 넓으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녀들을 넘어서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국가, 세계의 문제까지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지거리가 넓은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지거리가 짧은 사람은 세계의 비참이라는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가 아무리 비참해지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가족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짧은 인지거리에서 나온다. 도스도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나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책들에서는 이러한 짧은 인지거리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19세기 망해가는 러시아의 귀족들이 가진 짧은 인지거리를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오늘과 같은 시를 읽으면서 세계의 비참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먹먹해지고, 다음에는 눈물이 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지 않는데 나만 행복한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반대로 다른 사람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나의 미래와 다른 사람의 미래가 모두 희망적'이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런 미래를, 그런 내일을 희망하면서 오늘을 다르게 살 수 있고, 순간의 선택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최근 늘어나는 뉴스에서의 범죄거리는 의도적인 것도 있지만 실제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사회의 단상이다. 다 같이 행복해지지 않으면 세계의 비참은 누더기 옷처럼 우리의 외부에서부터 마음의 중심까지 타들어 올 것이고 눅눅했던 방안의 습기는 조금씩 나의 눈가를 지나서 나의 심장까지 저며들어 올 것이다. 


배워서 남주자!


배워서 남을 주는 방식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같이 만드는 미래를 셋팅하는데 있다. 그러나 나는 한걸음을 걸으면서 미래를 매번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과거의 나의 모습이 계속 내려오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때 그 아이가 이제 커서 내일을 함께 만드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으니 이제는 과거의 그 아이에게 미래의 너의 모습을 소개시켜줄 때도 된 것 같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 과거가 발목잡은 역사 속에서 미래를 횃불로 밝히는 사람. 역사의 뒤안길에서 걸어와서 함께 만들어갈 다리를 만드는 사람. 그럼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늘도 시를 읽고 시인의 마음을 읽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다. 


베르톨드 브레히트의 미소와 아이의 표정이 절묘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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