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도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_정호승
석양이 반쯤 뒷모습을 보이고 작별인사를 했다. 싱그러운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긴 시간의 공백을 메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로의 공백의 깊이가 한 순간에 육지로 드러났고 빈 공간이 없이 가득찬 대화를 나눈다. 때로 그는 눈물을 보였고, 때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기쁨에 젖은 탄성이 들리는가 하면 우울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시간들을 낭송하듯 들려주기도 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거대한 세계가 하나의 시간에 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세계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이야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초대를 받고 초대에 응한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이야기에 초대되어 한 사람의 깊은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에서, 그 바람보다 더 세차게 불어오는 나의 마음에 어떤 감정들을 느꼈다. 느꼈는데 표현할 수 없는 벅찬 마음, 깊은 애도 그리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 최후의 인간이자 최초의 인간인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런 장벽없이 시간을 넓혀갔다. 무한으로 나아가는 관계라는 것은 이런 것일까? 소중한 옛날 친구를 만나는 이 시간에 해석되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그를 보내고 혼자 걸으면서, 그 동안 수 없이 참아왔던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걸어오는 내내 세찬바람처럼 몰아닥친 삶의 여정에 나즈막하지만 말없이 막아주고 있던 그늘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어떤 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했다. 끝난 지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우리가 교차한 지점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의 시작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녀는 계속해서 그 곳에서 자신의 길을 갈 것이고, 나는 이 길을 걸어서 또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멀어지는 내내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살아줘서, 그렇게 그 길을 가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사랑하는 그를 생각하면서도 나도 또 누군가의 햇살이 되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를. 언제 다시 그를 만날지 모르겠다.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지만 어떤 관계를 넘어서 같은 방향을 가는 소중한 친구가 여전히 그 길을 타박타박 눈물을 흘리면서도 걷고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과 위로의 미소를 짓고 걸어간다. Scarborough장터에서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길, 낭만도 기쁨도 즐거움도 생기발랄했던 대화도 모두 추억으로 넣어 놓고 다시 나의 길을 간다.
안톤체호프의 소설 '미인'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인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어떤 숙소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그 숙소의 딸래미는 그렇게 미인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미인에서 잘 보이려고 했지만 주인공은 쑥스러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친내 떠나는 날 아침 주인공은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가자!"라는 말에 마음을 닫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주인공의 마음 속에서 미인은 다가갈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동경하는 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안톤체호프의 사실주의는 이렇게 현실을 꿰멘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아닌 건 아니고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고, 되는 것 되는 것. 할 수 있음의 없음도 존재하고, 할 수 없음의 있음도 존재하는 세상. 그렇게 미인은 그 주인공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외로움과 다르게 그리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원했던 시절, 그리움으로 사무친 이의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눈물과 그늘 사이에서 우리는 이렇게 그리움으로 가득 메운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가? 아침마다 뿌옇게 앞을 가리는 안개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그를 만나고 하루종일 만남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해 본다. 정신의 깊이를 체험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밤. 다시 제대로 살아보아야 겠다는 말을 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그리고 그 때는 조금 더 깊은 울림으로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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