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맥마이클_거대한 역설 3장
국제개발협력의 역사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이다. 물론 그 전부터 세계은행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다루어졌지만 전후 망가진 유럽세계를 재건하기 위한 방식으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마셜의 이름을 따서 마셜플랜이 시작된다. 마셜플랜은 미국이 유럽의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해리트루먼이 이야기한 '트루먼 독트린'의 일환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의 핵심은 공상주의 세력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경제적 원조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확산해야한다는 논리이다. 다음과 같이 해리 트루먼의 취임사를 들여다 보자.
우리는 우리의 과학발전과 산업진보의 결실이 저개발국의 발전과 성장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대담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계획 속에 낡은 제국주의를 위한 자리는 없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민주적으로 공평한 거래 개념에 기반한 국제 개발 프로그램이다. 인류가족이 품위 있고 만족스러운 삶, 모든 사람의 권리인 그러한 삶을 살게 하려면 가장 불운한 취약계층이 자기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우리가 돕는 길밖에 없다. 민주주의만이 그런 과업에 필요한 역동적인 힘을 제공할 수 밖에 없다_해리 트루먼 1949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
이러한 논리는 미국에서 시작했지만 이전에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마치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의 원칙이 각국의 독립운동을 시작하도록 촉진한 것처럼 말이다.
독립된 자치정부라 해서 하루아침에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치정부가 수립되면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행위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각국에서 필요한 내부 사회혁명의 길을 닦을 수도 있다_나아지리아의 민족주의자
그렇다면 저발전은 1949년 1월 20일에 탄생한 셈이다. 이날 전 세계 2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저발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날 이후 이들은 정녕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잃게 되었고, 타자의 현실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이 거울은 저개발국 인민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제시한 것은 서구권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소수 인류였다_멕시코의 지성 구스타보 에스테바
이러하여 개발프로젝트라고 불리우는 공산주의를 막으려는 제 1세계의 노력과 새로운 구조주의를 만들어내려는 제2세계 소련의 냉전이 만들어지는 70년대 전까지 각국가는 재건을 위한 가열찬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오늘은 개발프로젝트의 국제적인 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GATT와 브레튼우즈체제 그리고 금태환 제도와 WTO를 살펴보고, 70년대 이후 전세계적인 개발프로젝트의 확산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개발프로젝트가 냉전과 만나서 발전국가 모델이 나온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지구화프로젝트가 만들어지면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화의 시대가 진행된다.
개발의 본격적인 시작은 브렌튼우즈 제도에서 시작한다. 브레튼우즈체제는 1944년 미국 뉴헴프셔 브렌튼우즈에서 진행한 44개국이 참여한 통화 금융 회의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국제통화기구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만들어지고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도가 탄생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전후 시작되는 냉전이라는 국제 정치 관계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제를 제건하기 위해서 양자간 방식은 마셜플랜으로 다자간 형식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적용했다. 마셜플랜은 성럽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서구식 자유 기업 시스템을 받아들이도록 재정을 지원하는 '양자간' 프로그램이었다면, 브렌튼우즈는 국제부흥개발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을 중심으로 제3세계에 재정지원을 통해서 국제무역을 활성화하는 '다자형' 프로그램이었다.
개발프로젝트 구성요소
보편적 요구에 근거한 조직화 개념(생활수준 향상, 합리성, 과학적 진보로서 개발)
경제 성장을 위한 국가적인 틀
개발 도상국과 선진 개발국을 묶는 국제원조 틀(경제와 군사 원조), 그리고 개발 도상국의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성 확보
산업화를 우대하는 성장 전략
농업의 산업화를 장려하는 농업개혁 전략
투자를 관리하고, 국내에서 계급적 정치 동맹으로 이루어진 발전동맹(산업 성장을 지원하는)형성하는 발전국가 전략
지역, 계급, 젠더, 인종, 종족에 따라 국가와 시장에 깊이 자리잡은 새로운 불평등을 통한 개발의 실현
그러니깐 미국은 1:1로는 마셜플랜으로 접근하면서, 시스템적으로는 전세계적인 브레튼우즈 제도를 운영한 것이다. 브레튼우즈는 제도는 댐이나 고속도로, 발전소와 같은 국가기반 시설인 인프라투자에 집중되어 있었고 대규모 환금작물 재배에도 투자를 하였다. 이러한 브렌튼우즈 체제는 제 1세계적 편향을 띄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5대 주주국들이 세계은행의 통제권을 지배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사회비율로 나타나게 된다. 세계은행의 총재는 미국 대통령이 선임, 국제통화기금의 촟재는 유럽강대국들인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 임명되었다. 또한 자본집약적 서구 기술에 대한 수입 의존성을 강조하게 된다. 국제통화기금은 수혜국에 신용공여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후에 국제법에서 중요한 논쟁이 되는 자주권침해가 시작된다.
세계은행은 제1세계에 유리하게 운영되었다
세계은행의 차관은 효과적이었지만 그 조건은 대부분 제1세계에 유리한 조건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 투자가 아니라 생산적 투자를 강조한다던지 대규모 자본집약적 프로젝트를 통해서 투라를 편리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서구의 기술 이전을 후원하고 제3세계국가들을 제도적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셋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3세계가 제1세계에 의존도를 높일 수 밖에 없었다. 화석연료와 화학비료 그리고 살충제와 교잡 종자 같은 에너지 의존형 기술이 필요한 집약적 농업개발에 차관을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개발프로젝트의 표준규범을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면서 제도의 제국주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이것이 오해인지 아니면 의도인지는 판단하기에 나름이지만 제3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원천기술에 이전이 아닌 응용기술을 수입해서 사용하는 정도에 그친 것을 볼 수 있다.
세계은행이나 국제부흥개발은행의 프로젝트인 브레튼우즈체제에 대한 반대급부는 당연히 제3세계 국가들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을 비동맹운동이라고 부른다. 제 1세계의 동맹에 대한 제 3세계 국가들이 모여서 77그룹이라고 하는 UNUNCTAD를 만들었다. 1964년 3월 제네바 제1차 UNCTAD총회에서 77개 개도국이 ‘77개국의 공동선언’(Joint Declaration of the Seventy- Seven)을 채택한 것을 계기로 UNCTAD 내에 비공식의 개도국 교섭단체로 창설된 기구이다. 77 그룹의 기본목표는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공존하는 유엔총회와 그 전문기구인 UNCTAD, UNIDO, IMF 등에 있어서 주요 경제문제에 관한 개도국의 대 선진국 협상능력을 제고시키는 데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비동맹그룹의 탄생은 칼포라니가 이야기한 '이중운동'의 패턴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1세계가 주도하는 개발프로젝트의 질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프로세스를 만들어 갈려고 하는 움직임 말이다.
전후질서가 어느정도 정리되고 나면 마셜플랜과 개발프로젝트를 통해서 혜택을 톡톡히 본 신흥공업국들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고 불렸던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 한국에 브릭스라고 하는 브라질과 멕시코, 인도이다. 이들은 제2차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하여 글로벌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제조업과 농업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특히 제조업의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과 같은 제3세계국가들의 산업재편과 함께 제 1세계의 미국과 같은 국가들의 농업의 발전은 명암대비가 극명하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개발프로젝트에 의해서 형성된 국제분업 구조가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제조업과 농업의 차이가 국가별로 진행되는 이유에 대해서다.
왜 제1세계에서는 상업형 농업이 발전하고 제 3세계에서는 제조업이 확대되었는가? 이러한 경향은 국제분업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이유는 개발프로젝트의 정치적 구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는 개발프로젝트에 따른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으로 인해서 자국에서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유치산업전략'이라는 산업정책을 사용했다. 반면에 제1세계에서는 GATT의 영향아래 농가 보조금 정책을 실시하여 제1세계의 농업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니깐 제 1세계에서는 안정적인 농업발전을 통해서 잉여 농산물을 해외로 수출하면서 판로가 확보되었고 제 3세계는 아직 수출대체를 위한 인프라확보와 기술개발, 인재육성의 시기이기 때문에 국제무역에 제조업 분야에서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제분업의 양상이 제조업 무역보다는 '식량원조레짐'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주요 곡물인 밀과 쌀의 수출의 경우 1970년대만 해도 주요한 수출국은 미국이었다. 세계의 굶주린 국가들에게 제 1세계에서 생산된 곡물이 수출된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현재는 미국에만 해도 5개의 메이저 회사들이 세계시장의 80%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농업을 산업화로 모델링하는데 성공하여 국내정치적인 차원에서 지지자들이 상당수가 농민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관세장벽을 세우고 보조금 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국내 생산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다보니 잉여 농산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 3세계 산업노동자들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농촌-도시간의 이전이 실행되었다. 오히려 이때는 제 1세계가 농촌의 역할을 하고 제 3세계가 한창 발전하는 도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정책적으로는 공법480(PL-408)호가 발효된다. 주요 내용은 농산물의 현지 통화로 저렴한 가격에 상업용으로 제공할 수 있는 지원 법안이었다. 이를 통해서 미국의 농업경제와 제 3세계의 산업화 육성계획이 서로 상호보완성을 가지면서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제3세계 정부들은 원조받은 식량을 자신들의 '개발동맹'인 공산품 제조부문과 노동자를 포함해서 도시 전문직 종사자와 중산층에게 혜택을 주기 시작했다. 따라서 제3세계에서는 국가의 수입 '밀' 소비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소농 경작이 수입 밀의 대규모 증가로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산업노동력이 확대되면서 소농들이 대부분 농촌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때가 우리나라는 70년대 서울에 20대 초반의 '식모'라고 부르는 계층이 생긴 이유이기도 했다.
공법480호 주요내용
농산물을 현지 통화로 저렴한 가격에 상업용으로 제공한다.
기근 구호용 농산물은 무상으로 제공한다.
현지 전략적 원자재와 미국적 농산물을 물물 교환한다.
이를 통해 제3세계 국가들은 식량 원조 대상 국가에서 상업적 통상국가로 전환하게 된다.
식량원조의 영향
한국 : 쌀농사 관리와 산업 생산 중심지에 대한 노동력 제공을 정부가 중앙 관리함으로써 식원조가 성공적이 된다. 여기에 가장 많은 공헌을 세운 곳은 바로 '농협'인 농업협동조합이다.
콜롬비아 : 식량원조로 인해서 기존의 1차 산업인 농업 중심으로 운영되던 콜비아의 농업부문이 붕괴된다. 식량원조의 영향으로 새롭게 식량신민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식량원조의 주요한 수원국은 인도, 한국, 브라질, 모로코, 유고슬라비아, 남베트남, 이집트, 튀니지,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타이완, 필리핀 등이다. 물론 이후에 필리판 같은 곳에서는 쌀의 품종을 개량하는 우리나라의 농촌진흥청이 설립되지만 식량원조 초기에는 주로 미국의 도움으로 식량원조를 받았다.
식량원조의 영향은 자연스럽게 각국 정부가 자국 농산물 진흥이 아닌 수입농산물로 대체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특히 밀의 대한 수입은 급속도로 늘어나는 도시인구를 감당하기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이에 따라서 식량원조에 동원된 농산물이 수원국의 주식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했다. 식량의존도는 자연스럽게 수원국 국민들의 식사패턴과 취향까지 설계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식량의존도가 늘어가면서 소농 경작이 감소하고 산업 노동력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제 1세계의 농부들이 제 3세계의 산업노동자를 양성한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노동력 유입을 통해서 제 3세계는 빠르게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경제성장과 함께 도시과밀화를 동시에 맞게 된다.
전형적인 발전국가가 한국이기 때문에 위에서 이야기한 식량원조의 영향이 모두 한국에서 적용되어 버린다.
대충자금(Counterpart Fund)
대충자금이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대외원조 공여조건에 따라 피원조국 정부가 특별계정으로 적립해야 했던 자국 통화를 말한다.
대체로 적립금 중 5%는 전략물자구입 또는 미국이 파견한 기관의 운영비용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95%는 미국의 동의 하에 수원국의 통화안정과 경제안정을 위해 사용되었다.
대중자금은 대리충당자금의 줄인말로 특히 식량원조 시 지불해야하는 자금을 국내 은행에 개설된 미국 계좌에 원조액과 같은 금액만큼 자국의 통화로 입금한 돈을 말한다.
이를 통해서 미국은 수원국 내의 미국기업에 대한 융자와 현지에서 생산된 각종 상품과 서비스 대금, 무역박람회 개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식량을 주고 그에 따른 비용을 현지에서 받아서 현지에서 미국이 쓸 돈을 충단한 것이다.
공법480의 발효는 제 3세계의 국민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주식의 체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쌀중심의 식단을 가지고 있던 제3세계 아시아계의 사람들이나 카사바나 감자와 고구마 같은 식량을 사용하고 있던 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 '밀' 중심의 식단을 사용하도록 요청했다. 이것은 미국산 곡물인 대규모생산이 가능한 '밀'을 중심으로 상업용 판매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였다. 밀을 원료로 하는 빵은 소비하는 가운데 단순히 빵만 먹지 않고 딸기쨈이나 땅콩버터 그리고 옥수수나 셀러드같은 다른 잉여 농산물도 소비해야하기 때문에 수출에 있어서 배가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배경에는 미국 농업생산성 증대 프로그램이 있었다. 1950년대에서 20여년간 이 프로그램에 따라서 미국 농업은 제조업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이것을 식량제국 food-empire라고 부른다면 제국의 장기적 결과는 현재의 기후변화와 GMO 그리고 환경파괴로 나타났다. 대규모의 식량을 재배하기 위해서 석유를 이용한 기계화 무기비료, 고엽제같은 살충제, 초제를 사용하면서 산업형 영농을 추구했던 결과였다. 자연생태계의 질은 점점 악화되고 토양침식과 토양의 염도 증가와 침수증가, 지하수 고갈과 같은 문제가 더불어서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환경의 파괴에 대한 학자들과 국민들의 우려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레이첼칼슨의 '침묵의 봄'이 1962년 발간된다. 침묵의 봄은 제초제로 인한 식물과 곤충의 감소가 최종포식자인 새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봄이 되어도 울어줄 새가 없어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제초제의 발전은 베트남전쟁 당시 '고엽제'로 발전하였고 고엽제 피해자들이 지금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개발프로젝트가 남겨 놓은 상처는 아직도 전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지구환경회의가 열리는 것은 20년이 더 지난 1992년 리우데자이루에서였다.
식량제국이라고 부를만큼 거대한 양의 곡물을 생산하면서 잉여생산물이 많아지자 가축을 먹여도 될 만큼 풍부해졌다. 사료용 곡물 공급이 늘어나면서 사료용 곡물만 생산하는 기업과 동물단백직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전문가가 축산업을 발전시켰고, 이는 전세계적인 가축 사육의 복합체를 만들어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의 효과였으며 정책적인 지원과 예산 편성을 통해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서 제3세계 국민들의 식단은 '밀'과 함께 '동물단백질'을 기반으로 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식단의 변화는 계속되는 수요를 가져왔고 점차 제3세계 식탁에는 밀로 만든 빵과 동물단백질을 기반으로 하는 식단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축산업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식단의 변화로 얻게된 수요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시 미국에서 만든 사료용 곡물을 수입하는 일들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 이전에는 밀을 판매하던 가공업자들은 점차 가축사육 방식의 변화에 맞게 육우용 가공 사료, 돼지용 사료, 가금류용 사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 3세계의 농업도 재형성이 되어 갔다. 가축사육의 확대는 전 지구적인 차원의 가축복합체livestock complex가 형형되었다.
녹생혁명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녹생혁명은 식물 품종 개량용 농업 기술 '혁신 패키지'를 일컫는 말이다. 전세계적인 농장이 되어가는 시기 더 높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는 식용작물을 만들기 위해서 록펠러재단 멕시코연구수와 필리핀소재 포드 재단이 공동연구를 시작했고 결국 나이지리아와 콜롬비아의 열대 작물 연구소에서 농업기술의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71년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이러한 연구를 발전시켜 국제농업연구자문그룹을 출범했고 전세계에 연구소 및 유전자 은행을 설립하게 되었다. 녹색혁명은 미국식 화학 농업 모델이 제 3세계로 전파되는 주요한 매개 통로가 되었다.
녹색혁명의 결과로 효율적이고 기계화된 농업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농업인구의 축소를 불러왔다. 이른바 농업의 현대화가 일어나면서 마치 1920년대 찰리채플린이 '공장노동'의 실장을 고발한 것처럼 '농업노동'은 대규모 기계화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혁명의 시간을 맞이했다. 개발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부분이 없지 않다. 기본적으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1차산업인 농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업인구는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확대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경향은 개발도상국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개발의 역사의 관점에서 '생산주의'의 등장은 이러한 예상을 뒤엎었다. 우리는 이것을 '녹색혁명'이라고 부른다.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 엄청난 실험과 품질개량을 통해서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시기를 이른다.
미국의 대부분의 기업과 대학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주의 방식은 대학이 확보한 대규모의 토지에서 농업기술모델을 실험하고 평생교육시스템을 가르쳤다. 특히 상업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대학교 커리큘럼은 농업의 현대화를 통한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노동집약적인 농업에서 자본집약적인 농업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서 농업기술을 중심으로 생산력의 증대가 일어나면서 농업노동인구는 줄게되게 대규모의 생산력을 가진 기업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업들은 대규모로 수확한 농산물을 전세계에 수입하면서 이른바 '세계의 농장'이 되어갔다. 여기에는 당연히 멜서스식 인구정책에 대한 '농업적 대처'방안으로 대량생산을 통한 농산물 수요탄력성이 기초가 되어 있었다.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위기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농업현대화를 추진하고 세계의 농장을 개발해야 하다는 논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또다시 농업자본주의 혹은 농업 제국주의 관점과 기술주도 정책이 만들어낸 개발프로젝트의 일종이었다.
녹색혁명이란
전통적 농업과 달리 품종개량, 화학비료, 살충제와 제조제 따위의 과학기술을 농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식량 생산량의 획지걱 증가를 이룬 혁명을 말한다.
농업분야에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가 미국국제개발청(USAID)총재인 가우드William Gaud는 녹색형명이라고 칭하여 이후에 녹색혁명으로 불린다.
1941년 멕시코는 다수확품종과 화학비료, 농약을 이용하여 밀 수확량 3배 향상과 옥수수 수확량을 2배 증가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5년 통일벼 일명 필리핀IR667을 개량했다.
현대 농업기술의 발달은 노약의 투입, 영농의 기계화, 종자개량과 유전자 조작을 통한 신품종 식량생산의 증가를 맞이하고 있다.
생산량의 증가에 비해 생태학적 관점에서 경작비용의 증가, 환경저항성의 감소, 토양의 산성화, 농약오염의 초래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입장에서 녹색혁명을 비판받고 있다.
화학 산업과 에너지 부문이 결합된 ‘석유 농업’이 녹색 혁명 기술의 확산을 가능하게 했고 그와 동시에 녹색 혁명을 장려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제3세계에 합성 비료의 보급을 확대하여 제공함으로써 농업이 에너지 부문에 더욱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다수확 품종은 살균제, 살충제, 대규모 관개 시설, 화학 비료 사용에 의존했다.
전통적인 녹엽 작물은 ‘잡초’로 재분류됨으로써 윤작 방식으로 재배되던 ‘농민 음식’은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다른 한편 개발프로젝트가 냉전프로젝트로 발전하는 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팽팽한 대립은 근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각각 자본주의모델과 공산주의 모델의 대립각을 만들고 있으니깐 말이다. 미국이 녹색혁명으로 생상력을 증대시키면서 대규모 농업혁명을 이룰 때 중국은 오히려 노동력을 중심으로 농업을 발전시킨다. 1921년 강서성에서 설립한 중국공산당은 1049년 신중국혁명이 이르는 기간까지 지주들이 독점했던 전체 농지 중에서 45%에 이르는 토지를 소통과 무토지 농민들에게 재분배한다. 재분배한 토지는 정부의 계획하에 '집단농장'형식으로 운영되었다. 토지의 집단 농장화 덕분에 저고용 상태의 잉여노동력을 노동현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고, 수자원관리에 대한 투자와 지역기업을 농업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중앙집권화된 경제와 산업정책으로써 농업정책은 분권화를 통해 기초 보건과 농촌교육을 활성화 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중국식 모델은 이루에 인도총리 네루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인도의 농업의 변화를 겪는다. 인도는 당시 각지주와 상인들이 장악한 상태였지만 녹색혁명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 식량생산량을 늘리려고 시도했다. 물론 인도에 '대충자금'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녹색혁명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1964년 네루가 사망하고 나서 파키스탄과 전쟁에 들어간 사이에 인도양의 계절풍의 영향으로 식량생산이 20%나 감소했다. 사회적인 불균형탓으로 이에 따라서 비하르주에서 10만명이 아사하는 결과가 나왔다. 인도정부는 급히 쌀 1000만톤을 수입해서 위기를 넘기고 적극적으로 녹색혁명에 매진한다. 필리핀의 농업연구소와 멕시코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적의 종자를 도입했고 이에 따라 '인도식량법인'을 설치해 식량의 구매와 운송, 보관과 분배를 관리했다. 공공분배시스템이라는 기구를 만들어서 1억 6000만기구, 곧 전체 인도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사라믈에게 식량을 지원했다.
녹색혁명의 결과
녹색혁명의 확대는 국내적 측면과 국제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각국가들의 농업생산성이 향상되고 각종 농산물들이 도시 지역에 공급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수입대체 전략으로써 녹색혁명은 일부 특정 국가에서는 성공해서 식량원조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의 생산력의 증대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이러한 수입대체 전략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지 지금도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은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식량원조 프로그램은 녹색혁명을 통해서 만들어진 종자개량이나 화학비료와 같은 기술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었다.
각 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대충자금을 통해서 농기업 활동과 녹생혁명 기술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미국의 국제개발처나 세계은행과 같은 기관은 이러한 관점에서 '차관'을 제공하여 녹생 혁명 기술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교잡 종자와 농사에 필요한 투입물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소득이 있어야 했고 형편이 괜찮은 농가는 다수확 품종재배를 통해서 소득도 늘고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농가는 점점 몰락하게 된다.
기계 농법과 화학농법의 도입으로 농촌에서도 고용의 기회가 줄게 되었고, 기계식 농법은 그 자체로 도시의 공장을 농촌으로 옮겨 온 꼴이 되었다.
개발프로젝트는 경제 성장이라는 국내전략과 다자간 지원이라는 국제프로젝트가 만나면서 다층적인 실체가 되었다. 개발이 이루어지는 곳은 불균형한 발전이 일어났고 세계적으로 볼 때 과거 식민지 국가들은 세계의 농장이 되거나 세계의 공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모델의 수출로 인해서 세계의 공장들은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녹색혁명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개발프로젝트의 기술을 도입한 국가마다 농촌이 재형성되고 도시의 거대화로 인해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엠마누엘 월러스틴의 지적처럼 세계사적으로는 중심부인 개발을 시행하는 공여국과 주변부인 수원국의 관계가 남북관계 혹은 종속이론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중심부인 도시와 주변부인 농촌이 서로의 권력관계를 정립하는 시간이 되었다. 농천에서는 도시로 이주하는 청년들 때문에 일손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녹색혁명으로 인한 기계식 농법과 종자개선으로 오히려 도시로 쫓아내는 격이 되었다. 1970년대 서울로 상경한 농촌지역의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세계의 공장이 된 도시의 공장으로 들어가 수출산업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또한 개발프로젝트는 자연스럽게 중국이나 소련의 방식인 집단농장이나 베이징컨센서스와도 연결되었다. 중국의 경우 1949년 신중국을 건국하고나서 모택중의 수하에서 자체적으로 문화혁명을 거쳐서 국가의 주도하에 경제발전과 농촌발전을 꿰했지만 이도 신통치 않았다. 1980년대 말에는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흑묘백묘이론을 제시하며 개혁개방을 이루었고 정치는 공산당이 관리하지만 경제는 자유시장의 체제를 어느정도 인정하면서 때에 따라 국가가 개입하는 베이징컨센서스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중국은 지금까지도 세계의 공장이기는 하지만 언제라도 국가가 개발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고, 냉전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보호무혁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이렇듯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발프로젝트로 새롭게 재편되는 질서를 가지게 되고, 냉전프로젝트 하에서 각각의 제도들을 안착시켜 나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제까지 제도와 프로젝트가 만들어 놓은 결과인 것이다.
다음은 수업시간에 토의했던 내용들이다. 사회학 전공인 분들도 있고 과학기술학 전공, 물리학 전공도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는 포인트들이 발생했다. 역시 과학기술학협동과정의 매력은 이러한 융합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름대로 드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역사의 이론화, 이론의 역사화
맥마이클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너무 기능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게 되면 특수한 맥락과 과정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맥마이클은 세계적인 흐름이 구체적인 제3세계의 맥락속에서 일반론을 어떻게 보완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볼 때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보편적인 시대적인 맥락과 어떻게 맞다아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는 농지개혁이 매우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유상몰수 유상분배와 같은 정책의 제안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의 아이오와주립대학의 경제학자들이 만든 '소농민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조그마한 자기땅을 가지게 되면 자유주의에 대한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소농들이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땅이 필요했고 땅이 없는 사람들은 이제 탈농을 해서 도시로 모이게 되는 과정이 생기는 것이다.
보통 도시유입은 pull팩터와 fush팩터가 있는데 한국에서의 70년대 청년층의 이동은 무조건 도시로 가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조그마한 개인소유의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로는 평균 자녀 5명 이상의 식구들을 먹여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농민 만들기 프로젝트'와 다르게 소련이나 중국같은 경우는 '인민공사' 혹은 '집단농장'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시장과 민주주의_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기
세계체제이론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거시변수가 미시변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라는 국제변수가 시장이라는 국내변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다시 시장이라는 국내변수가 국내정치라는 국내변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시 국내정치가 다시 국제정치의 변수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요즘시대에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로비가 발생하고 있다. 1년전에 화재가 되었던 대통령실을 미국이 도착한다는 사실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국내정치적인 요소에 더 취약한 국가는 오히려 '1위대표제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들이다. 영국의 브랙시트가 그랬고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 그랬고, 한국의 포퓰리즘이 그랬다.
그래서 이렇게 본다면 거시변수가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시기가 있고, 미시변수들이 거시변수를 움직이는 시대가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국내정치요소가 국제정치요소를 바꾸는 것들 말이다.
또한 아직도 미시변수가 거시변수를 바꾸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면 트루먼 독트린과 같은 변수들은 오펜하이머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 국내정치요인에 의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후약방문격으로 거대흐름을 읽는다는 미명아래 세계체제론에 압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항헤게모니, 그람시
뒤틀리는 사회혁신이라는 책에서는 대항헤게모니적 개입을 위한 비판을 보면 사회혁신이라는 방법론 자체가 그람시가 말하는 대항적인 지적, 도덕적, 문화적 우월성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사이에서 대항헤게모니를 생각해보자.
그람시는 서구 자본주의 지배 수단이 강제력과 설득력으로 나뉘며, 전자는 억압적인 수단을 통해, 후자는 헤게모니를 통해 각각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람시 사상의 독창성은 사회변혁이 단순히 정치적 혁명으로만 이뤄지는것이 아니라 기존 헤게모니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의 확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즉, 사회의 전통적인 관계, 문화유형, 생활양식이 재창조되기 위해선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이 수반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획득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의 지적․도덕적 리더십이 대항헤게모니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또한 지구적 대안 세계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세계사회포럼이세계화 진영에 맞선 대항 헤게모니 조직으로서 어떤 의미와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는지 고찰한다.
그람시의 주장대로 대항 헤게모니가 지적·도덕적·문화적 우월성에 입각한 설득과 동의에 기초하여 구성된다면, 자본과 권력에 맞선 대안 세계화 진영의 헤게모니 획득은 비록 시간이 걸리긴 해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것이다.
대항헤게모니에서 대안헤게모니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지구화프로젝트 이후에 지속가능발전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개발의 물질성, 사다리걷어차기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을 쓴 커즈와일은 역사상 6번째의 특이점이 있었다고 한다.
개발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영역이 있다. 메타버스, AI, 우주산업이다. 물론 여기에 애플은 XR이라고 하는 확장현실을 이야기했다.
메타버스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개발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다가 생성형 AI가 나오면서 넘어갔지만 다시 오지 않을까?
AI는 인공신경망이 만들어지면서 특이점을 처음 맞았고, 생성형 AI의 출현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특이점이다.
우주는 화성이냐 달이냐의 싸움인데 여전히 개발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냉전이이미 찾아왔다.
1949년에 만들어진 인도공업대학 졸업생들이 구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를 점령했다.
어떻게 보면 제3세계라는 구분은 없어지고 있는 새로운 조건이 등장했다.
물론 단서는 있다. 오늘 뉴럴링크에서 인체실험 대상자를 모집한다는
https://brunch.co.kr/@minnation/3542
https://www.foodban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164
https://economist.co.kr/article/view/ecn201501060002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rladudrl78&logNo=220286865510
https://brunch.co.kr/@minnation/707
http://www.krei.re.kr/krei/researchReportView.do?key=159&biblioId=397332&pageType=004
http://www.ym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07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100225/26426320/1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1070779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