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사회의 상 6장_대안적 수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과학사회학을 전공으로 지식사회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데이비드 블루어의 '스트롱프로그램'에 대해서 공부하고 과학적 지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특별히 '지식과 사회의 상'이라는 책을 함께 공부하면서 과학적 지식이 사회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려면 그 이론이 증명의 방식으로 쓰고 있는 수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수학에 대한 이해는 결국 그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수학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지식사회학은 이런식으로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러면 그 원인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고 그것이 다시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만든다. 오늘은 6장을 발표했다. 너무 어렵다.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일단은 정리를 해보았다.
데이비드 블루어는 1942년 영국 더비에서 태어났다. 킬 대학, 캠브릿지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과학철학으로 유명한 Mary Hesse에게 사사했다. 실험심리학 연구로 학위를 받았는데 과학지식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사회학적으로 사용하여 '확장'시켰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식과 사회의 상'이다. 데이비드 블루어는 지식과 사회의 상에서 지식사회학이 지금까지 과학지식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전달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과 경험적 연구를 발달시켜오지 못한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지식사회학이 과학이라는 성스러운 활동에 대한 위협이 되어 왔기 때문이지 결코 지식사회학이 과학의 내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의 결여때문이 아니라라고 주장한다. 블루어는 토마스쿤을 필두로 한 후기경험주의 과학철학과 뒤르켐의 지식사회학,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을 더함으로써 과학사회학의 스트롱 프로그램을 탄생시켰다.
현재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과학지식도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설명하는 원인과 같은 종류의 원인을 가지고 설명해야 한다. 이른바 대칭성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 과학사회학에서 하나의 준거점이 되었으며 수 많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블루어는 이러한 논쟁에 대해서 오일러의 정리를 비롯해서 수학에 대한 역사-사회학적인 사례 연구를 통하여 이론적 주장을 뒷받침한다. '지식과 사회의 상'은 과학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통하여 과학지식의 사회적 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아래는 과학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3가지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과 자식의 상'은 과학사회학의 방식으로 과학과 사회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연구의 3가지 접근법
과학철학 :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과학의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해서 세상에 보여준다. 과학이 외부 세계에 대한 진리를 표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과학의 합리성 자체는 사회, 문화, 정치 등의 과학 외적 요인들과나는 관계없다. 과학은 내적으로 순수한 논리로 구성되며 합리적인 재구성이 가능하다. 과학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과학을 통해서 외부세계도 진리를 알 수 있다.
과학사 : 역사적으로 과학의 성장과 퇴보를 자세하게 기술한데 역점을 준다. 과학발전의 합리적 재구성보다는 수 많은 우연들이 겹쳐서 현재의 과학을 이루어냈는가에 더 관심을 가진다. 이론의 합리성과 경험의 타당성에 대한 평가보다는 역사적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에 관심이 더 높다.
과학사회학 : 과학의 내용을 지식사회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로 로버트머튼과 벤-다비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구조기능주의적인 시각에서 과학의 제도적 발전을 설명하였다. 블루어와 반스, 셰이핀, 매킨지는 에딘버러학파로 불리며 각 국가의 과학발전의 과정 및 과학활동의 성장의 제도적 조건과 전통적인 지식사회학적 접근(과학지식의 생성과 변화, 타당성의 결정요인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을 포함한 과학사회학을 주장하였다. 이는 과학사회학의 강한프로그램(The Strong Programme in the Sociology of Science)로 발전하였다.
사회적 조직만큼 수학이 다양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슈타르크(Stark, 1958 p162)는 "영원히 그 내용상 자기동일적인 수의 과학은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슈팽클러는 '서양의 몰락'(Decline of the West, 1926 p59)에서 "그 자체로서의 수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몇 가지의 문화가 존재하지 때문에 몇 가지의 수의 세계가 존재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슈팽글러의 책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수학의 토대에 관한 논평'(1956)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대안적 수학의 가능성이라고 해두자.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이 본 것은 무엇이고 슈팽글러가 주장한 것은 무엇일까?
6장에서 밝히려는 것
대안적 수학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어떤 기호로 그것이 인식될 수 있을까?
무엇이 대안적 수학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이번 장에서는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예측이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수학과 수학이 아닌 것간의 불연속뿐만 아니라, 수학 내의 불연속과 변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사점들이 좀 더 완전히 밝혀지고 설명되어야 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이 인식되려면, 우리는 다른 가치관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가치 중에 하나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상의 역학에 대한 관심이다. 이 문제는 프레게와 밀에 대한 논리와 관심이 있으며 7장에서 다룰 '논리와 수학사상에서의 협상'에서 더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수학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접근에 이어 대안적인 수학의 가능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이제 남은 과제는 '논리적 필연성'으로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p249
대안적 수학은 기존의 수학적 지식과 추론방법을 벗어나기 때문에 '오류'라고 인식된다. 그러나 대안적 수학에서의 '오류'는 체계적이고 완고하고 기본적이여야 한다. 일반적인 수학에서는 '합의'는 수학의 본질이다. 그러나 대안적 수학에서는 논쟁이 특유의 성질이 된다. 인지적인 참을성이 필요하다. 대안적이라는 단어를 '도덕'에 빗대에 보면 대안적 수학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대안적 도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절대적인 도덕을 확신하는 시대에 이에 대한 대답을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의 도덕법전을 신이 부여한 것을 생각한다. 확신에 찬 도덕적인 법칙들에 대해서 '대안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본성을 깨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도덕적 절대주의에 대한하는 유일한 방식은 절대주의자들이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당연시하는 것이 대안적 도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대안적 문화체계들이 한 문화의 생활 속에서 확립되어 있고 깊이 배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만 대안적 도덕 체계에 대해서 인정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적'이라고 하는 것들이 인정받는 방식은 그 나름의 '체계'를 갖출 때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수학에서도 찾는다면 그것은 대안적 수학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문화적 공통성 속에서 대안적 수학이 살아남는 길은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의해야하는 실재는 수정된 밀의 이론에서 가정하고 있는 '자연세계와 사회세계'이다. 이것은 경험적 사회과학에서 관찰된 믿음의 형태가 가진 단일성, 다양성이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이다. 5장에서 살펴본 수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은 대안적 수학에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대안적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4가지 형태의 변이_사회적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요소
수학의 광범한 인지적 양식의 변이 : 1은 수학인가
결합, 관계들, 사용들, 비유들을 결정하는 틀들의 변이, 수학에 부여된 형이상학적 함의들의 변이 : 피타고라스적인 수와 플라톤적인 수
계산과 수학적 기호의 조작화에 붙여진 의미의 변이 : 무한소
결론을 증명한다고 믿어지는 추론의 엄격함과 형태의 변이 : 2제곱근의 형이상학
(다섯번째 원칙은 이러한 과정의 '논리적 필연성이며 7장에서 다룸)
오늘날과 다르게 초기 그리스에서 '1'은 수학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예를 들면, '1은 수가 아니다', '2는 짝수가 아니다'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과 다르게 그리스사람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1은 수가 아니라 말하는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는 1을 수의 출발점 혹은 수의 발원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1은 어떤 복수성의 척도를 의미하고, '수'란 측정된 복수성 혹은 척도의 복수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은 물론 수가 아니다. 척도는 복수가 아니지만, 척도와 1은 둘다 출발점들이다." 때때로 1은 마치 하나의 수인양 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크리시스포스의 '다수의 일')
그 당시에는 혼란으로 여겨졌지만 우리는 현재 '1'이라는 숫자를 '수' 자체로 보고 사용한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부조리하다고 거부하던 것들이 어떤 시점에서는 자명한 진리로 출현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수 분류 가운데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전제도 있다. 초기 그리스에서는 1은 홀수이자 짝수였다. 왜냐하면 1로부터 모든 수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홀수와 짝수를 모두 생성시키기 위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류학적 유사성을 발견한다. 기원에 관한 신화는 그 신화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로 그 범주와 분류를 깨뜨리는 사건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적 차이점은 심층적인 부분인 '그리스 수학과 우리의 수학 간의 인지적 양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Jacob Klein, 1968 그리스의 수학사상과 대수의 기원) 클라인은 수의 개념에 유일하며 지속적인 의미의 전통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한다. 수학의 확장은 '유리수-실수-복소수'까지 확장되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의 의도'(intention of number)라는 수의 의도의 변화에 있다는 것이다. 수학의 전통에서 보는 연속성이란 하나의 가공물이다. 그러한 연속성이란 우리의 사고유형 이전의 연구들에 투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클라인의 논의는 '수는 정해질 수 있는 사물의 수로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블레어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수학자 디오판토스의 연구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디오판토스의 경우
디오판토스의 저서 '산수'(Arithmetice)는 대수 연구에 관한 책이고 중요한 논쟁은 '산수' 2권의 9번 문제에서 드러난다.
"2의 제곱인 4와 3의 제곱인 9의 합인 13과 같은 수를 두 개의 다른 제곡수의 합으로 표시하라"에서 디오판토스는 324/25와 1/25를 찾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풀이과정은 오늘날 대수풀이 과정과 다르다.
2개의 숫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디오판토스는 특정한 전제를 도입했다. 음수라고 부르는 숫자가 대수풀이에서 발견될 때마다, 디오판토스는 원래의 문제는 풀이가 불가능하며 잘못 만들어진 것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유사하게 2차 방정식이 필요한 문제를 풀 때, 보통 그는 방정식을 충족시키는 두 개의 값 중 하나만 취한다. 두 개의 값이 둘 다 양수일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산수 2권의 문제 28번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우리가 보도록 훈련받아온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학습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안적이고 불완전한 수학의 견해는 결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이런 대안적 관점도 완전하게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수에 대한 상이한 접근을 이해하는 방식은 현대의 수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와 직관들이 디오판토스와 얼마나 다른가이다.
수학사학자 한켈의 해석
문제들보다 그 종류에서 더욱 상이한 것은 그 문제들에 대한 해석들이며, 우리는 그의 절차가 취하는 다양한 풀이 과정에 대한 웬만한 전체적인 개관을 하는 것조차 완전히 불가능하다.
더욱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그의 저서에서 발견할 수 없다. 각각의 문제들은 각각 특정한 방법을 필요로 하며, 이런 특정한 방법들은 그와 매우 유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안될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수학자들은 100개의 디오판토스의 풀이를 공부한 후에도, 101번째의 문제는 풀리가 어렵다.
네덜란드 수학자 스테빈Simons Stevin의 해석
수가 단위에 관한 생각, 그리고 그 단위 자체가 특별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고는 16게기 스테빈까지 이어져온다.
스테빈은 1을 하나의 수로서 재분류하는 것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증한 주장 때문에 그런 사고를 채택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테빈은 만약 수가 여러 개의 단위들로 구성된다면, 단위 하나(a unit)는 수의 일부라는 것이다. 부분은 전체와 같은 성질을 가져야 함으로 그 단위 하나는 하나의 수이다.
스테빈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한 조각의 빵이 그 자체가 빵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부분이 전체와 같다는 가정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수의 동질성과 연속성이라는 사고에 공감할 것을 우선 요구한다.
스테빈은 수와 길이, 크기, 그리고 양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다. "크기와 수의 겹침과 유사성은 너무나 보편적이여서 거의 같은 것에 가깝다"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목적들에 있어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키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목적들은 그들의 사회적 배경과 자연적, 심리적 성향을 통해서 보여져야 한다. 무엇이 이 근본적인 수학적 유추를 통제하려는가는 수의 재분류를 옹호한 스테빈과 그리스의 관점에 집착하면서 스테빈의 주장을 반대한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형식적이고 경직된 사고의 밑에 깔려있는 전재는 수학이 수학에 의미를 부려하는 해석적원리의 맥락과 유리된 채로도 정립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사실 수학사회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수학리 가 고유항 생명과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적당한 수학인가? 일정한 가정을 가진 가지지 않는다면 정당한 수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칭성의 명제와도 같이 전제를 통해서 보편수학이 발달했다면 대안적 수학도 전제를 가지고 발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계산을 시장에서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했지만 이러한 방식의 수의 사용을 수의 속성에 대한 더 높고 지적인 사고와 엄격히 분리시켰다. 그리스 사람들은 병참술적인 석과 산술적인 것, 실제적인 산술과 이론적인 산술로 수학을 나누었다. 수에 대한 이론적인 사고는 수의 '형상'(eidos)이라 불린 속성에 관한 것이다. 클라인은 이것을 수의 종류, 종들, 수의 모양이나 형태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수는 오직 사물의 수를 언급한다는 것과 사물의 수는 항상 점들의 수에 의해서 나타내질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은 정삼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이것은 입체화 시킬 수 있다.
수들을 이런 방식으로 구조화시키면 수의 속성을 도형으로 탐구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그노몬'(gnomon)이라는 개념으로 장치처럼 사용할 수 있다. 그노몬은 적당한 모양을 갖춘 수인데, 위의 모양을 가진 수 가운데 하나에 더해질 때 그 일반적인 형태를 변화시키지 않는 수이다. 산술에 관한 이러한 접근은 밀의 설명과 얼마나 잘 맞는가? 이런 접근들은 대상들을 단순히 질서지우고 분류함으로써 관찰되는 지식에 기초한 수에 관한 지식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방식으로 보자면 수는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형태를 구현하거나 범주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보지 않고 특수한 형태로 수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말하면 수에 대한 '특수한' 의미가 포함된다면 말이다.
산술의 특수성
보편성은 언제나 특수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숨을 쉬는 것이 특별해지는 시점은 '산소가 부족해지는 상황'에서이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노몬과 같은 장치들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노몬을 사용하는 수학은 탐구의 목적이 형상과 수들의 종류를 발견하는 것일 때 일반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현대의 수학과 수이론도 수의 종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피타고라스나 후기 플라톤주의 사상가들처럼 수의 종류를 나열하는 식과는 다르다. 현대 수학자들은 수의 형태들의 전형과 종, 그리고 하위 종에 관한 자연사로 간주하였다.
현대의 사상가들은 산술에서 사회, 삶, 자연을 상징화하는 분류도식을 발견했다. 우주의 통일성과 그 속에서의 우리의 열망과 역할이 분류도식의 질서와 위계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수는 정의, 조화, 신과 같은 속성을 표상한다. 수의 분류는 일상의 사고와 생활의 분류와 공명했다. 전자에 대한 사고는 후자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사고 속에서 포착하는 수단이었다. 수의 분류를 사물의 질서를 토대짓는 본질과 힘에 지적으로 접촉하는 방식이다. 이 수학은 실제적인 문제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 때문에 '응용' 수학의 특정형태로도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 명과 암, 선과 악, 홀과 짝,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구조화된 이분법은 피라고라스 이후 신플라톤주의가 사회적, 자연적, 수적 속성으로 분류했다. 이런 방식으로 수를 이해하게 되면 10이라는 숫자는 건강과 우주질서와 연결됭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는 신적인 효능을 소유하거나 그런 효력을 발휘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상징화가 모든 수를 똑같은 수로 다루지 않는다는데 있다. 사회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마다 수개념은 달라지게 된다.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과는 반대편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상징화된 수'의 개념에 대한 도전은 그동안 위계구조 속에서 '수'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2의 제곱근에 대한 증명은 2의 제곱근이 유리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2의 제곱근이 유리수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리수이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는 이 계산이 즘여하는 것은 2의 제곱근이 유리수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리수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이 계산이 2의 제곱근은 결코 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계산은 그리스 사람들이 이른바 수라고 부른 것들에 적용시키는 사고와 양에 적용한 사고를 분리시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2의 제곱근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 계산을 결정짓는 수에 관한 배경가정들에 대해서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를 헤아리는 수, 즉 점들의 집합이나 형태로 본다면, 이런 계산은 수를 직관적으로 연속선의 이미와 섞는 것으로 볼 때와는 매우 다른 것을 이미한다. 홀수와 짝수의 범주에 의해서 많은 것을 다루어보지 않은 문화에서는 홀수와 짝수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혹은 그러한 구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주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거나 서로 하나라는 관점에서 '공동체'와 같은 방식으로 수를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증명과정이 불필요하게 되고 오히려 불완전하고 애매한 상황으로 놓아두는 것이 미덕이 될 수도 있다.
계산을 할 때 특정한 의미가 배경가정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일반적 영향력은 더욱 우연적이다. 무리수 존재의 발견은 종종 그리스 수학에서 '무리수의 위기'라고 불렸다. 무리수의 발견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암시한 것은 양과 수의 분리가 선과 도형이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자신들의 경험과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로베르발은 선은 점들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고, 합과 근사값 같으 ㄴ산술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삼각형의 면접, 삼각뿔의 부피, 정육면체와 그 이상의 승의 합을 계산해냈다. 그는 우리가 지금 적분학의 특별한 경우들로 알고 있는 결과를 증명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안적인 수학의 형태들을 알아 보았다. 양식, 의미, 연상, 설득력과 같은 기준들을 가지고 기존의 수학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변이들 혹은 변수들은 사회학적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이것들은 밀의 변형된 이론 형태를 강화해주는 증거를 제공했다. 수학은 경험에 근거하고 있지만 경험은 그 자체로 다양한 원리에 따라서 선택되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경험은 그 하나로 끝나지 않고 그 경험이 만들어지는 광범위한 영역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경험-의미-수학'의 모델이 되었다면 이것은 비유적이고 은유적으로 확장된다.
1+1이라고 할 때 '하나'라고 하는 숫자를 의미화한 수학의 아래에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개인의 경험이 있고 그것을 하나고 연결시키는 다양한 사회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수학의 내면에는 그 사회가 받아들이는 '지식과 사회의 상'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와 '하나'의 결합은 '둘'이라는 것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통념을 대변한다. 그것이 단순히 숫자 2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경험의 다양한 원천들과 만나서 특정한 사회적인 이미지를 형상하는 것이다.
수학사상에서 이러한 변이들은 숨겨져 왔으며 우리의 사고방식에 접근하여 이해되는 수준에서만 진정한 수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덜 분명한 것들은 수학적 사고로 불리지 않게 되었다. 대안적인 수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근접되어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공유하지 않은 확정성에 관한 것이다. 역사서술은 필연적으로 해석의 과정이기 때문에 의미와 해석을 부여해야 한다. 비교와 대조, 가치있는 것과 없는 것 골라내기, 의미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볋기, 체계와 일관성 발견하기, 모호한 것과 일관성 없는 것 해석하기, 간격을 메우고 오류에 주의를 기울이기와 같은 것들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대안적인 수학을 생각해볼 수 있다.
부정하는 것은 객관성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이론들이다
어떤 기준이 과거에 투사되고, 어떤 관심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의미를 구성하는 작업을 지배할 것인가? 학문적 논평과 해석장치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이해를 매개한다. 이러한 투사는 모든 이해의 필연적 특성이다. 어떤 기준들이 현재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과 사회의 상'에 투사되어 있을까? 만약 수학의 '누적적 특성'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들의 해석장치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다. '카조리'(Cajori, 1919)가 수학은 특별히 누적적인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거의 것은 아무것도 버러진 것이 없으며 현재에도 빛나고 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만 부각되어 역사적 왜곡의 문제를 제시할 수도 있지만 정직성이나 학문적 근면함과 같은 미덕이 보여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 숨겨진 대안적인 수학과 같은 방식을 찾아내어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지식이 발견되는 방식이면서 우리의 학문적 근면함으로 보여야 할 때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아직 세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드러난 언어만큼 밝혀졌다면 우리는 더 많은 부분을 밝혀낼 수 있다. 어떤 지식이 그 상황을 밝혀냈다면 그 분야에 대한 '언어'가 탄생했음을 알 수 있고, 오늘로 치자면 대안적인 수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밝혀낸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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