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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0. 2024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이란 무엇인가?

포스트휴먼 4장 포스트휴먼 인문학 : 이론넘어 생명

0. 들어가기

1. 제도의 불협화음 패턴들

2. 21세기 인문학

3. 포스트휴먼 비판이론

4. 인문학에 '적합한' 주제는 '인간'이 아니다

5. 글로벌 '멀티'-버시티




0. 들어가기


어떤 유물론적 기반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조건을 잘 표현하고 설명하고 찬양하는 인문학은 19세기 말 이래 모든 생명 종의 기원에 대한 타당한 과학적 설명으로서의 다원주의가 등장하면서 후퇴해왔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과학은 비인간이 될 능력이 있는 것, 아니면 휴머니즘적이지만 과학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둘 중 하나로 보이게 된다_샘 워스터(2006: 174)


로지브라이도티는 첫장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의 부정적 부산물들을 논의하면서 인문학(Humanites)에 함의되어 있는 '휴먼(Human) 개념인 비트루비우스적 모델을 비판한다. 언어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이성적 동물인 인간(Man)의 이미지인 비트루비우스적 모델에 대해서 반휴머니스트들은 '휴먼'이라는 정의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 기존의 휴머니즘에 대한 정의가 자기고 있는 자기 재현과 사유 이미지 모두에 초월적 이성과 관념을 가진 주체는 모두 합리적이라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했다.


루트비우스적 인간은 서양의 백인남성을 대표한다


비트루비우스적 모델은 인간에 대한 자기중심적 태도를 촉진하기 때문에 편파적이며 그만큼 더 문제가 있다. 이러한 휴머니스트 주체는 가치가 점점 감소되는 위계적 저울로 차이들을 조직하기 때문에, 자신을 재현할 수록 자신보다 더 위계적으로 높은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재현에서 배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가치 절하된 차이의 자리에 놓여 있던 성별화된, 인종화된, 자연화된 '타자들 에 대한 폭력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정당화 했다. 또한 보편 주의에 대한 주장은 배타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유럽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문화적 특수성을 거짓된 보편으로 바꾸고 정상 상태를 규범적 명령으로 바꾸는 남성중심적, 인종차별적, 혹은 인종우월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했다. 사유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인문학, 특히 이론의 실천을 문화적 헤게모니나 위계적 배제로 왜곡시켜버린다.


이에 대한 대안적 '휴먼'의 정의가 제시되었으며 젠더, 페미니즘, 민족성, 포스트식민, 미디어와 뉴미디어, 그리고 인권연구들이 진행되었다. 비판적 학문연구의 차원에서 이러한 휴머니즘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기존에 개념에 대해서 위협적이면서도 기회라고 할수 있다. 인문학이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진행시켜서 포스트휴먼적 조건에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면 기존의 합리적 이성과 인간중심주의가 자기고 있는 개념과 존재론을 확대시켜서 제도에 대해서, 인문학에 대해서, 포스트휴먼 비판이론에 대해서, 21세기 인문학에 적합한 주제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스트휴먼 비판이론과 21세기 인문학에 적절한 제도적 실천인 글로벌 '멀티'-버시티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제도의 불협화음 패턴들


연방기금의 쇠퇴, 인력시장의 축소, 새로운 지구화의 압력 등과 더불어, 매 우 중요한 내적인 도전들이 인문학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내적 도전들은 한편으로 테크노 과학의 헤게모니, 뉴미디어' 혁명의 영향, 전문가 문화의 성장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 젠더, 소수민족, 장애, 아프리카계-아메리카 연구들과 비유럽 문화 연구 같은 새로운 학제 연구 영역의 전례 없는 민주 주의적 확산으로부터 출현했다. 이 모든 도전은 전통적인 정전 및 인문학의 공통 임무에 문제를 제기한다. (Bono et al, 2008: 2)


인문학은 스스로에 대한 정의에 대한 위기에서부터 대중들에 인식에까지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상황과 구조에 대한 변화는 사회에 지식을 제공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의 구조에서 '우리시대에 인문학의 과학적 지식'을 무엇이 만드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1990년대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문화전쟁' 혹은 '과학전쟁'이 일어났다. 소칼과 브릭몽은 반포스트구조주의의 관점을 가진 과학자로써 인문학이 현시대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비판하였다. 1970년대 푸코는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인련의 휴머니즘적 가정들을 가지고 지만 그것은 보편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맥락속에서 틀지워진 구성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경험적-선험적 이중화로서 인간은 항상 과정-중인-산물로서 생명이며 노동과 언어로 틀지어져 있다. 인류자체를 문제삼자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 인문학의 문제 : 구조적인 의인화, 방법론적 민족주의

방법론적 민족주의는 기존의 인문학은 두 가지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첫번째는 '생명'과학자들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으로 만들어지는 지식과 소통의 영향력이고 두 번째는 지정학적인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고려해야할 것인지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득세와 함께 이민자 때문에 생기는 외국인 혐오와 대중영학적인 사회문화적 의제들 때문에 인문학 자체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유럽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는 새로운 인문학의 등장을 막고 있다. 새로운 인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배타적 관심을 넘어서 지구행성적인 지적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감으로 가득찬 용기를 찾아야 한다.



2. 21세기 인문학


인문학은 높은 수준의 기술적 매개와 지구화된 다문화적 구조에 관련하여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결국은 인문학과 과학의 두 가지 문화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로버츠와 맥켄지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호환되는 지점을 찾아내고 문화적 재현이나 이미지들, 문학적 장치들이 공개적으로 인정받은 과학을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연구했다. 질리언 비어나 에블린 폭스켈러와 같은 사람들은 과학의 관점에서 인문학적인 텍스트들을 생산했고, 매클린톡의 생애와 작업에 대한 연구와 같은 부분에서는 문화적 통찰과 영적자원 그리고 경험적 과학사이에 인접성을 보여주었다. 과학과 시각의 연결성, 과학과 인류학적인 연결성은 과학연구에 새로운 영감을 주어다.


21세기 인문학의 종류   

문학적 다원주의에 관한 연구(arl.,2009) : 과학 문화 내부에서 작업하는 에블린 폭스 켈러(995 200)는 다른 종 류의 선구자다. 그녀는 인문 지식과 경험과학이 서로 보충적임을 보여주는일련의 중요한 텍스트들을 생산한다. 바바라 매클린복의 생애와 작업에 대 한 연구(Kdles, 198)는 문화적 통찰과 영적 자원, 그리고 경험적 과학 사이 에 인접성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과학의 시각화 :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로자먼드 퍼셀(Rosamond Purcell, 2000)은 이미지와 과학적 정보를 정교하게 상호작용시킴으로써 예술과 과학 사이의 대화를 개척하였다. 이 전통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은 캐리 존스와 피터 갤리슨 (Carrie Jones and Peter Galison, 1998)에 의한 영상과학과 예술 사이의 학제적 협동 작업이다. 과학적 응시에 대한 정치적 분석에서부터(ketter, 1985: Jordanova,1989: Braidotti, 1994) 사진술과 뉴미디어의 문화사(Lury, 1998; Zylinska, 2009)에 이르기까지 이 분야는 폭넓으며 재능 있는 연구자들이 포진해 있다. 바바라 스태퍼드(Barbara Stafford)가 멋지게 보여준 것처럼(1999, 2007)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관계된 시각예술의 교차 연구도 핵심적이다.

인류학과 과학연구 : 마릴린 스트레던(Marilyn Strathern)과 같은 선구자들은 아젠다를 설정했고(1992), 폴 라비노는 '생명 (Life) 과학들을 푸코적으로 해석했으며(2003), 라이나 라프(Rayna Rapp)는 생명공학기술들을 분석할 때 정치적 요인과 인식론적 요인을 결합한다(2000).

주체형성에 관한 접근 : 헨리에타 무어의 주체 형성에 대한 분석은 포스트구조주의 시대 전반을 폭 넓게 다루면서, 신체와 정신적 풍경, 문화와 기술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매우 일관된 통찰을 제공한다(1994, 2007, 2011).

페미니즘과 과학연구 : 페미니즘적 인식론과 과학사회학은 과학 연구와 인식론적인 정치적 주체성을 연결하는 잃어버린 고리로 페미니즘 이론을 제시하면서, 다나 해러웨이(1988), 샌드라 하딩(1991, 1993), 이자벨 스탠저스(1987, 2000), 리자 카트라이트(Lisa Cartwright, 2001), 메트 브라일드와 니나 리키(Mette Bryid and Nina Lykke 1999). 안네마리 물(Annemarie Mol, 2002) 등을 지적 선구자로 내세운다. 과학사회학 역시 매우 혁신적임이 증명되었는데, 프레이저 등(Frater et al)의 작업(2006), 모린 맥닐(Maureen McNeil)의 기술에 대한 명민한 정치적 분석(200), 세라 프랭클린(Sarah Franklin)의 복제 양 돌리에 대한 선도적 작업(2007) 등이 그 증거다.

과학과 문화연구 : 재키 스테이시(Jackie Stacey)는 암의 사회적 문화 및 치유 문화(1997)와 영화 속에 등장 한 유전학(2010)을 분석했다.

미디어 연구 : 존 북스(Zone Books)시리즈와 조너선 크래리(Jonathan Crary, 2001)의 작 업에서 증명되듯이, 미디어 연구 영역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우수한 연구들을 깜짝 놀랄 만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이것들은 프랑스 과학 이론과 철학을 많은 미국 독자에게 소개했다. 호세 반 다이크(Jose van Dijck, 2007)의 디지털 문화 분석들은 선구적이며, 스멜릭과 리키(Smelik and Liykke, 2008)는 현대 과학의 학제적 구조와 그것에 내장된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 대해 다양 하고 독창적인 개입이 가능하도록 이 영역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이며, 미디어적이고, 시각적인 접근은 오히려 '탈인간중심적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요청을 하게 된다. 과학에 대한 문화적이고 사회학적인 연구들은 주체이론에 대한 과학적인 저항에 대해서 논의해야 하고, 반대로 주체 철학은 생명과학에 대한 자신들의 불신과 잘못된 인식을 대면해야 한다. 결국 포스트휴먼시대에는 포스트 휴먼 인문학 연구가 요구된다. 피터 갤리슨은 장 프랑수아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받아들여서 '특정이론'을 주장한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담론이 아니라 시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세부적이고 특정한 이론인 것이다. 이러한 특정이론들은 '물질-실재론적' 트랜드에 따라서 포스트구조주의적 반휴머니즘의 유산과 고전적인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비을 거부하면서 '생명'이라는 시스템으로 통합하여 나아간다. 여기서 생명은 복잡한 시스템으로서의 생명이다.


생명 전체로 놓고 인문학의 범주를 확장하면 환경인문학(심층역사)이나 공중보건학(루돌프 피르호), 디지털인문학(캐서린 헤일즈)과 같은 논의들이다. 이를 통해서 지구행성 내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로 인문학적 연구가 확대되면서 인류라는 종에 대한 사유에 지구에 거주하는 존재들을 주체로 환원하여 서로 연결하는 연구들이 진행된다.


포스트휴먼 인문학은 지구행성적 차원에서 전지구화된 인류, 도덕성의 진화론적 원천, 우리종과 다른 종의 미래, 기술적 장치의 기호학적 체계, 디지털 인문학을 강조하는 번역 과정, 포스트휴먼 곤경에 접근할 수 게하는 요소로서 젠더와 민족성의 역할, 그리고 모든 것의 제도적 함의들에 대해서 새로운 서사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3. 포스트휴먼 비판이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휴먼적인 관점에서 인문학은 초학제적 사유 모델들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새로운 사유모델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게임체인저로써게임의 새로운 규칙은정확한 지도그리기와 그것의 부가물인 윤리적 설명책임, 초학제성, 비판과 창조적 형상화를 결합하는 시도의 중요성, 비선형성의 원칙, 기억과 상상력의 힘들, 그리고 낯설게 하기 전략이다.이런 방법론적 지침은 포스트휴먼 비판이론을 구성하는 구성요소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생명과학들의 관계를 상호존중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포스트휴먼 비판이론 적용   

지도그리기의 정확성 : 권력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서 지도를 그리고 인식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지도그리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보편주의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모두를 비판할 수 있다. 이러한비판은 권력의 위치에 대한 대안적 형상화, 즉 개념적 인물의 추구와 나란히 이루어지며, 이때 권력은 제한하는 권능(즉, 포테스타스)과 강화하고 긍정하는 역량(즉, 포텐 시아)을 모두 의미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주체 /우머니스트 주체/퀴어 주체 /사이보그 주체 이산적, 토착적, 유목적 주체 같은 형상화들은 온코 마우스나 복제 양 돌리와 더불어 단순히 메타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특 정한 지정학적•역사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표지다. 위치를 나타내는 표지로 서 그것들은 보편적인 주장이 아니라 복잡한 특이성을 나타낸다(Bridott),2011a).

지그재그로 움직이기 : 전 지구적 경계가 선형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거미줄처럼 흩어져 다중심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러한 복잡성은 선형적 사유방식이 아니라 비선형적인 사유방식을 요구한다. 이는 크로노스의 선형적인 지배적 시간선이 순환적인 되기의 시간인 아이온의 사유와 대립하게 된다. 과학의 소수자 되기의 과정은 흥미를 따라가면서 과학적 기획에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들뢰즈가 주장한했던 탈영통화된 연속체 안에서 공-현존하는 복수의 시간-존재들을 가지게 된다.

유목적 사유 : 카오스모시스(chaosmosis)의 지구철학적, 지구행성적 차원을 향항 정서적 개방을 촉구한다(Guattari,1995). 변형된 되기의 생기적 에너지가 비선형적인 원칙을 가지고 쓸모없고 목적없는 행위의 문턱안으로 사유 주체를 집어 넣는것이다.

기억의 역할 : 포스트휴먼 시간이 복잡하고 비 선형적인 시스템, 여러 개의 시간순서들 위로 복합적으로 증식되고 내적으 로 균열되어 있는 시스템임을 고려한다면, 변용태(atftec)와 기억이 핵심 요 소가 된다. 연대기적인 선형성과 말-중심(10g-centric)의 중력에서 해방된 포 스트휴먼적 유목적 양태의 기억은 애처롭게 일관된 자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흥겹게 비연속적인 자아를 적극적으로 재발명한다. 기억은 주체 안 의 잠재적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고, 주체는 생기론적 이고 다중방향적 기억이 거주하는 횡단적인 관계적 존재로 재정의된다 (Rothberg, 2009). 기억이 작동하는 조건은 유목적 변위(tangpostion), 즉 서로 다른 단위나 존재들 사이에서 확장과 관계들의 가능성을 짜 맞추고 섞고 증가시키는 상호 연계성, 창조적이고 고도로 생산적인 상호 연계성의 조건 이다(Braidoti, 2006).

낯설게 하기: 포스트휴먼적 주체가 자신의 기존의 인식틀인 비트루비우스적 틀을 버리고 복잡한 방식으로 관계적으로 나아가는것이다. 주체를 복수의 타자들과 연결하여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폭파시키고 남성다움의 지배적인 인식틀을 버리게된다. '여성-되기'를 넘어서 '지구-되기'로 나아가면서 생기적 지구중심주의인 조에에 대한 사용으로 나악가게된다.



들뢰즈, 신체_참고자료   

속도가 다른 무수한 미립자의 교착이 형성되는 구성, 관계로 이루어지고 다른 신체에 의해 촉발되는 힘으로서의 많은 정동으로 이루어진다. 기관보다도 훨씬 미세한 입자와 기능보다도 훨씬 불확정적인 운동을 한다. 신체를 구성, 재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관없는 신체 혹은 실체를 들뢰즈는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라고 한다. 결합의 구도plan a consistance는 보통 내재성의 장이라고 한다.

무엇인가가 촉발되는 장이 있는데 이러한 장에서 무엇들이 결합하여 어떤 의미를 낸다는 것이다. 서로 인접하는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들 자체를 통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다.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은 리비도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의 힘은 신적인 힘이 되고 그것을 누멘이라고 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목표는 들뢰즈가 읽었을 때는 유동하는 신체가 다른 여러가지 신체의 구성과 관계를 맺어서 활발하게 서로 촉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넓고 보다 강한 하나의 면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는 국가, 사회도 하나의 기관없는 신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기관없는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 윤리, 소수의 정치학_참고자료   

국가장치(알튀세르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는 모든형태의 흐름을 일정하게 조직해 통합적인 삶의 양태(기호체제들, 언표적 차원)를 만들어내는 배치이다. 전쟁기계들이란 국가 장치 바깥으로 끝없이 탈주해가는 무리들이다. 탈주선 긋기가 바로 전쟁기계이다. 창조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종류의 기계들이 전쟁기계들이다.

카프카의 글쓰기 기계, 뒤샹의 표현기계가 바로 그것이다.전쟁기계는 충돌지점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며, 창조적 파괴라고도 할 수 있다. 지표화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내면서, 새로운 배치들(대안적 삶의 모색, 제도권을 벗어나는 사유, 아방가르드적인 창장 등)을 창조한다. 이것은 노마드nomade 즉 유목민의 발명품이다.

유목주의nomadism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들을 새로운 배치 속에서 끊임없이 탈영토화시키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가치로 기존의 것들의 동일성을 뒤흔들고 전복시킨다. 창조와 생성, 생산의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전쟁기계는 탈주선을 죽음의 선으로 변형시키는 파괴기계가 되고, 유목은 불모적인 방황으로 된다.


생성, 되기_참고자료   

생성(분자-되기, 동물-되기, 여자-되기, 소수자-되기, 아이-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은 새로운 다양체를 구성해가는 것이다. 분자적 생성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탈기관체형성,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n개의 성이 된다. 윤리와 정치의 핵심은 새로운 존재들(개체들)을 새로운 배치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인 것이다. "혁명의 미래에 관한 질문은 안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따져서 이 질문은 어느 층위나 장소이건 사람들의 혁명가-되기에 관한 질문을 막기 위해서 제기된 것이 때문이다.“


연결, 접속_참고자료   

connexion연접은 원시사회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소규모적으로 일어나는 연결방식이다.

disjonction이접은 전제군주제에서 주로 일어난다. 전제군주에 의해서 이전의 접속은 끊어지고 새로운 접속이 만들어진다.

conjonction통접은 자본주의의 방식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통접의 한 형태이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러한 통접을 더욱 가속화시킨다는 데 있다.



들뢰즈의 존재론_참고자료   

사실 들뢰즈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존재론은 그의 저서 ‘안티오이디프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주의와 비인간주의이다.들뢰즈는 그동안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해 오던 ‘의식’중심의, 상상계적 전통이 우위에 있는 것을 부정한다.

프로이트에게는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크라캉에게는 그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표현되지만 들뢰즈는 오히려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무의식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과 자연, 우주의모든 것들이 우리가 의식할 수없는 무의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가 사실은 의식의 세계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거대한 것이다. 무의식의 존재들 속에서 의식적인 존재들은 아주 아주 작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결여하고 있는 모든 사물이 무의식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무의식의 탐구는 존재자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면서 의식이 점하고 있던,다시 말하면 인식론이 우위에 있던 세계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우위로 바뀌는 과정인 것이다.들뢰즈는 존재론이 제대로 정립되고 나면 인간이 토대로 삼고 있었던 인간우위의 존재론이 빚어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첫번째 저서로서 '안티오이디프스'를 썼고, 두 번째 저서로서 '천개의 고원'을 썼다.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존재론의 해체를, 천개의 고원에서는 새로운 존재론을 이야기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본주의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의식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는 가치를 자본에 축적하고, 그 자본으로 모든 존재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켜서 숫자를 매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는 이미 그 자체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이트 모델에서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모두 인간안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진정한 무의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체론을 미리 상정하고 그 안에 존재의 의미를 넣어가는 방식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4. 인문학에 '적합한' 주제는 '인간'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포스트휴먼 이론이 과정 존재론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과정 존재론은 주체성과 합리적 의식을 동일시하는 전통적 방식에 도전하며, 주체성과 합리적 의식이 객관성과 선형성으로 환원되는 것 에저항한다.포스트휴먼 인식 주체를 시간 연속체와 집단적 치로 보는 유목적 전망은, 한편으로는 변화의 과정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지혜적 공동체 의식이라는 강력한 윤리에 이중으로 기여한다. 공현존, 즉 세 장에 함께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과 인간 아닌 타자들 모두와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마누엘 드 란다(Manuel De Landa, 2002)는 들뢰즈적 과학의 강도 있는 양태를 훌륭하게 분석하고, 보편적 본질과 선형적 현실화를 넘어선 잠재적 가능성의 현실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드 란다는 강도 있는 유목적 과학이 반본질주의뿐 아니라 유형적 사유를 피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닮음, 동일성, 유비, 대립은 잠재적이고 강도 있는 되기를 사유할 때 피해 야 하는 지배적인 원리들이다. 들뢰즈는 무엇이 그러한 판단을 하게 하고 그러한 관계를 수립하게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e Landa, 2002:42).


핵심적인 요건은 인문학이 포스트휴먼 조건이 제공하는 여러 기회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전통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할당된 인간과 인간의 휴머니즘적 파생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탐구 대상을 설정할 수 있다. 인문학이 과학과 기술과 오늘날의 다른 거대한 도전들과 독창적이고 필요한 토론을 하는데 필요한 방법론적이고 이론적인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아카이브를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문제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과 안트로포스의 최고 지위가 쇠락한 이후에, 과연 인문학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다.





5. 글로벌 '멀티'-버시티


지금까지 살펴본 문제의식과방법론, 전략을 가지고 이제 어떻게 제도화로 나갈 것인지를생각해보자. 결국 이러한 제도화의 시작은 대학에서 찾아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대학은 위기에 처해있다.대학의 개념에 대한 토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끈기 있게 그리고 아무 구속 없이 자신의 연구를 수작업하는 장인이나 예술가인 학자로 정의되던 휴머니즘적 아카 데미라는 르네상스 모델은 간단명료하게 끝이 났고, 학문적 상품을 대량 생산하는 연쇄 생산 단위인 현대의 포드주의적(rondes) 대학 모델로 바뀌었다.


휴머니즘적 대학 모델이 오늘날 미국의 인문대학(Amenicin Liberl Airs Colege)에서 여전히 수행되고 있다는 누스바움의 주장(1999)은 엘리트주의적이면서 향수적이다. 1789년에 처음 출간된 이마누엘 칸트(mimanuel Kant)의 "학부의 갈등(The conficts of the faculties)에 대 한 고전적인 텍스트(Kant, 1992)는 산업 생산 모델에 기반을 두고 현대 대학 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칸트는 대학을 실용적 방향성을 가진 상위 학부들 법, 의학, 신학과 비평을 담당하고 시장과 실용적인 문제들 뒤로 물러나 있는 하위 학부들 예술, 인문학, 과학으로 나눈다.“


1789년에 처음 출간된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학부의 갈등(The conflicts of the ficalties) 에 대한 고전적인 텍스트(Kant, 1992)는 산업 생산 모델에 기반을 두고 현대 대학 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칸트는 대학을 실용적 방향성을 가진 '상위 학부들 법, 의학, 신학과 비평을 담당하고 시장과 실용적인 문제들 뒤로 물러나 있는 '하위' 학부들 예술, 인문학, 과학로 나눈다:" 이 청사진은 역사적으로 여러번 수정되었음에도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 가장 중요한 모델은 아마 19세기의 본 훔볼트(von Humboldt)의 모델일텐데, 이 모델은 대학을 지도력과 지적인 시민권을 함양하기 위해 최근까지도 남성 엘리트만을 각별히 선택하여 훈련하는 장소로 본다.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빌 리딩스(Bill Readings, 1996)는 대학이라는 제도가 '생명을 다했으며 이제는 민족문화를 긍정하고 교육하고 역사적으로 발전시킨다고 자신을 정의했던 시대의 생존자라는 점에서 포스트 역사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대학 모델, 즉 칸트적 모델, 본 홈볼트 모델, 그리고 추기경 뉴먼(Cardinal Newman, 1907)이 옹호한 영국의 식민지 모델조차 지구적 경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의 쇠락은 대학 전체와 특히 인문학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학계의 중심인물은 교수가 아니라 행정관이며, 대학은 더 이상 국가 정체성을 떠받치는 기둥도 아니고 민족국가와 국가 장치의 이데올로기적 오른팔도 아니라고 리딩스는 주장한다.


대학은 이제 더 이상 자원을 낭비하는 기생적 존재가 아니다. 증권거래소나 보험회사가 산업적 생산을 낭비하는 존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증권거 래소처럼 대학은 자본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 자본이 위험과 다양성 을 다룰 뿐만 아니라 그런 관리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곳이다.대학에서 이러한 잉여가치의 추출은 정보 격차에 투기한 결과다_리딩스 1996: 40)


우리 시대의 폭력과 부정의와 저속함에 저항하면서 "우리 시대에 가치 있는(Braidotti, 20116) 포스트휴먼 실천을 현실화하는 제도적 틀을 발전시키기 위해, 생각은 글로벌 하게 행동은 로컬에서라는 경험적 명령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 조건의 역사성을 대면한다는 것은 우리의 위치를 규정하는 조건들을 설명할 책임을 지기 위해서 사유 활동을 밖으로, 실제 세계로 움직여간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인식론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이 나란히 손을 잡고 세 번째 천년의 복 잡하게 얽힌 전경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퇴로가 없으므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창조적 개념과 용기 있는 지성이 필요하다.



멀티-버시티   

앤드루 워낙(Andrew Wernick)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유니버시티(university)로서의 대학은'멀티-버시티(multi-versity)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기능을 맡고 있으며, 흔히 냉전 시대의 사회적 공간의 군사화와 지정학적 갈등에 연결되어 있다.

'멀티-버시티라는 용어는 1963년에 당시 캘리포니아대학 시스템의 총장이었던 클라크 커(Clark Kerr, 2001)가 주요 대학에 부과되는 임무와 요구가 폭발적으로 많아진 것을 언급하기 위해 만들었다.

지속적인 돌연변이의 결과 지난 20여 년 동안 “대학은 수행 중심의 기업이 되었고 전통에서 벗어났다. 전문 관리자들의 보호 아래 대학은 기억이 없는 탈역사적 기관이 되었다"(Wernick, 2006:561). 교수진과 학생 대표체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그들의 통치 권력을 상실하면서 인문학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가치를 상실하고 일종의 사치스러운 지적 소비재가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포스트휴먼 곤경이 오늘날 대학의 시민적 책임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지구화되고 기술적으로 매개된 세계 안에서 학문공간과 시민공간은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있을까? 그것은 대학을 로컬화된 지식 생산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인지적 자료를 전지구적으로 전달하는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학은 "도시 생활을 유지하고 능률화하는 수단을 통해 경제적 진전을 이룬다는 공통 목적을 가 진 공동체적 지성의 집단 에토스(Phillips et al, 2011: 299)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스스로 도시 공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멀티-버시티(Wernick 2006:561)로 변모해야 한다.

냉전 시기에 시작된 도시와 그 도시 대학들의 브랜드화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간다. 마케팅과 판매 촉진 노력을 강화하고 흔히 실제 내용과 무관한 사적이고 공적인 금융 투자 문화의 단계로들어간다.


글로벌 멀티-버시티   

글로벌 멀티-버시티는 기술과 형이상학이 만나는 장소다. 폭발적이면서 아주 흥분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지구화된 기술적으로 매개된 멀티 버시티는 새로운 시스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학은 대학이 반영하기도 하고 기여하기도 하는 그 사회, 지구화되고 기술적으로 매개되며 민족적으로 언어학적으로 다양한 사회,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회 정의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환대와 유쾌함 같은 기본적 원칙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 그런 사회 같은 대학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의도적인 망각과 무신경한 무지에 저항하여, 포스트휴먼적 유대맺기라는 포괄적 원칙에 대한 기본적인 열망을 옹호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를 진지하게 재현하려는 대학은 기술적으로 매개된 세계 안에서 지식 생산, 예술과 과학의 새로운 관계, 지구화가 낳은 다언어적 현실을 탐색하는 초학제적 영역들을 제도화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과 씨름해야 한다.

지적 창조력을 새롭게 분출하면서 글로벌 멀티-버시티에서 포스트휴먼 인문학이 포함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인문학적 정보학, 즉 디지털 인문학, 인지 혹은 신경인문학, 환경인문학, 즉 지속가능한 인문학, 유전공학적인 글로벌 인문학 등이다.

포스트휴먼 인문학은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실천들이 어떤 종류의 연구 방법과 통찰을 발전시키는지 탐색하는 기획을 추구할 것이다. 포스트휴먼 인문학은 인문학의 핵심적 임무인 "더 풍부한 이해를 향한 인간 정신의 쉼 없는 추구'(Colint, 2012: 27)를 지속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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