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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9. 2024

턱끝까지 올라온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 알아주길 바란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나중에 자신이 이러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 스스로 객관화를 한다는 의미일까? 사실 이런 식의 의미부여, 누군가에게 멋있게 보이기,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 나름대로 평범하지만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앞에 대면해 놓고 그 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하면 너무나 쉬운 일이니깐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지만 일상의 표면적에 접촉해 있는 사건들이 나에게 의미를 물어보는 것이라면, 스스로 해석하는 의미는 달라진다. 


밤이 깊어가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한 없이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 끌어 당긴다. 밤이 되면 낮동안에 보았던 것들과 들었던 것들이 하나로 만나는 시간이 찾아온다. 하나로 만나는 시간에 의미는 추억이 되기도 하고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고 밤에도 해결되지 못하는 물음 악몽이 되어 찾아오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은 가족과의 관계이다. 누구에게나 쉽게 혹은 함브로 할 수 없는 성격의 사람들도 자신의 가족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험악하게 하는 사람도 자신의 가족에게는 따뜻한 아버지, 가장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그렇게 날마다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가 한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자신의 진짜 마음과 만나게 되면 턱끝까지 올라온 대답들을 혼자서 떠들게 된다. 


주변에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 진정성은 자신이 보는 세상과 자신이 욕망하는 세상이 다를 때, 자신이 보는 세상을 바꾸어 버리기 위한 진정성일 때가 많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념이라고 부르거나 고집이라고 부르지만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다르게 이해되기도 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세상으로 투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나는 뒷걸음질 친다. 처음에는 머뭇머뭇거리다가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어느순간은 줄행랑을 치면서 도망간다. 나도 한 때는 진정성으로 똘똘 뭉쳤을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진정성을 낯설게 보기 시작하니깐 오히려 마음에 구멍이 나고 눈동자 속에 맹점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런데 그게 사람들과는 더 잘 지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나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건낸다. 



아버지가 새벽에 저혈당쇼크가 왔다. 어머니가 없는 시간 아버지는 술을 몇 병은 마시고 당뇨를 방지하기 위한 인슐린을 맞지도 않은 채로 잠이 든 것 같다. 늦게 들어 온 나는 곤히 잠든 아버지를 보고 운동을 하고 씻고 잠이 들려고 했다. 그런데 "~어~ 아~ 으~으~"라는 소리가 잠꼬대처럼 들려왔다. 사람이 꿈을 꾸면 그러기도 하니깐 아무일 아니라는 듯이 잠이 들려고 했다. 그때 "쿵! 쿵!"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아버지는 간질 박작처럼 쇼크가 왔다. 혀가 말려 들어가고 손이 오그라들고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누가 봤으면 귀신들린 줄 알았을 것이다. 아니 전쟁에서 총을 맞고 죽어 가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물을 갖다 대기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쇼크는 진정되지 않았다. 구급차를 부를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힘겹게 말리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순간 귓 속에 "~~~~삐"라는 소리가 증폭되었다.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아버지는 다시 잠드셨다. 


그 전날 소주를 3병 쯤은 마신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메일 싸우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왜 맨날 나이가 먹으면 술을 찾는 것일까? 친 할아버지도 70세가 조금 넘으셔서 돌아가셨는데 젊을 때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알콜중독에 걸리셨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항상 코가 빨깧게 익었었는데, 술을 드시지는 않았지만 음성이 어눌하고 항상 삶을 지겨운듯이 대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풍습을 이어받아 소망없는 인생의 유일한 낙은 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몰래 술을 먹고 고집을 피우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난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조용한 것도 아니었다.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보면서 한 가득 허무와 불안에 시달리는 인간 존재를 발견한다. 그러면 나는 어떤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의 언덕으로 끌려가서는 몇 시간이고 비바람을 맞다가 돌아온다. 


어릴적 이야기를 꺼낼 때면 사실 나는 마음이 따끔거린다. 누군가가 나를 불쌍하게 보지는 않을까? 이래 가지고 결혼은 하겠나? 부유한 집안이 아니라면 행복한 집안이라고 되어야하는데, 이건 거의 포커게임에서 망한 패를 지고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차라리 게임이라면 다시 하면 되지만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 않을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제 제법 내세울 것도 있고, 사람들과 있으면 유머있고 말 잘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샤르트르가 말했던 대자존재로써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대하는 때에는 나의 모든 조건을 잃어 버린다. 그러다가 어느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좁디좁은 아파트의 어스름한 가로등 아래 쓰레기를 뒤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휠체어를 타고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할아버지와 불안한 눈빛으로 담배 한개피를 끝까지 빨아들이는 청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떠날 수 없은 곳에 놓여진 인생의 장기판에 다시 멍 떼고, 차 떼고 서 있는 느낌이랄까?


가난과 우울함이 인생을 가득 매우던 시간이 세차게 불어온다. 아버지의 부르르 떠는 등살 뒤로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가 투영되어서 흘러간다. 인생에서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들 속을 비스듬히 비껴서 집에 도착하면 아버지의 모습과 맞닥드린다. 여러번 미화시켜보기도 하고, 자기 암식을 하면서 넘겨보기도 했다. 그런데 안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알베르 까뮈가 처했던 '부조리'의 현실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턱끝까지 올라온 절망이 혓바닥을 타고 진동을 만들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내일이면 나는 다시 일어나서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불을 전하러 다닐 것이다.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과 내가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나는 항상 답답해하고, 힘들하고, 눈물짓고, 때론 웃는다. 불가능한 도전 앞에서 빠르게 기회에 편승하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어서 돈을 벗어서 늪으로 한 없이 꺼져가는 내방에서 탈출을 감행하라는 명령도 듣는다. 




원래 이 글은 아버지가 저혈당 쇼크가 오고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정신만 또렷할 때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는 체력도 없고, 눈물도 없고,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 속에 묶혀 있던 것들을 다시 꺼내어서 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밤을 견디면서 살고 있을까? 상대적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겪는 고통은 언제나 절대적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어떤 이도 대신 지고 갈 수 없다. 그러니깐 결국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어쩌면 고통이 심해질수록 심장에 가해지는 아픔이 늘어갈 때가 아닐까? 그러니깐 고통 중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같다. 누군가 그러던데. 무엇인가 말할 때 자신이 경험해보고 고민해보고 하는 말이라서 믿을만 하다고 말이다. 믿을만 하다는 것은 어쩌면 그 만큼 고통의 순간을 감내했다는 것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턱끝까지 올라온다. 모두 쏟아버리고 싶지만 그 동안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 같아서 다시 삼키고 삼킨다. 어른이 되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 쉽게 이겨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너무 보통의 삶을 추구한 것일까? 남들처럼 일반적인 삶을 산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피해의식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사실 이렇게 써내는 것이 내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슴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누구에게나 공개된 곳에서 하나하나 들춰내는 것이. 나도 안다. 이렇게 마음 먹으면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절망을 선택하기로 하면 언제나 그 자리에 멈춰서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까지 와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마지막까지 가보고나서 다시 돌아올 마음이 생긴다. 


턱끝까지 올라온 원망과 절망이 한 순간 사라진다. 


그건 그렇게 그냥 한 숨 한번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야! 이렇게 한계의 끝까지 걸어간 이후에야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 어쩌면 그 한계까지 가보지 않으면 이 기분을, 이 상태를 모를 수도 있다. 아푸고 저리고 찢어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 마음을 새로운 단계로 나를 안내한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안정감과 깊은 안도감이 주변의 왠만한 변화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게 만든다.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어 놓은 마음의 경계를 한번도 너머 보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주변에서 마음이 아주 넓고 풍성한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끌어 안고서 고통을 이겨낸 것일까라는 내면의 풍경도 생긴다.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갔으니깐 하는 말이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기까지 한참을 피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한번의 카타르시스가 있고 후회와 원한이 하나로 뒤엉켰다가 구름이 되어서 증발해 버린다. 



턱끝까지 올라온 원망과 절망이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영혼의 대지를 훑고지나간 후에 나는 무엇인가 담담해지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이 그 소나기를 맡고 영혼의 대지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본다. 나는 그 너른 대지 한켠에 조그맣게 고개를 내민 새싹과 같다. 한 차례 태풍이 훑고 간 대지 위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것이다. 아마도 내일, 아니 다음날 또다시 아버지는 쓰러질 것이다. 사람들은 전쟁을 하고, 누군가를 칼을 들고 사람들을 찌르고, 영문도 모르는 외국인을 위해서 보이스피싱을 날릴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혼의 대지 위해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포기할 때 다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영혼의 절벽에서 한 없이 떨어지고 부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나지 영혼의 대지를 거닌다. 오늘은 다행히 태양이 떴지만 내일은 언제 먹구름이 쏟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넓어진 마음으로, 움푹 페인 만큼 더 깊어진 생각으로 다시 고통을 맞이한다. 이 작은 방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l5q-5VH4X-E&list=RDl5q-5VH4X-E&start_radio=1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넉살의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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