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대한 두 가지의 시선
기독교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마음 속으로 영접하고 마음의 깊은 중심에서 하나님이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곧 이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오순절계통에서 이야기하는 방언과 예언, 환상을 말하고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곧 이 모든 은사라고 부르는 것들이 '초보적' 단계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방식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초월적인 것들은 인간의 삶에서 오히려 극히 일부일 뿐이고 진실로 인간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과 반응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는 의지의 행동이라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미래의 부품 꿈 그러니깐 누구나 꿈꾸는 성공이라는 것을 접어두고 노르베르트 엘리야스의 '문화화 과정'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문명화과정은 문명들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역사적인 경로를 찾아보고, 프랑스 궁정문화에서 시작된 에티켓이 어떻게 프랑스 사회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곧 이어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존롤스의 '정의론'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그것과 함께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다. 생산관계로 대표되는 '유물론'이 어떻게 역사를 해석하는지도 고민했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규정하고 바꾸어가는지도 고민할 수 있었다. 운동권이라고 하는 이들의 어떤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빈곤'과 '세상의 비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게 된 것 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세상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교회'는 그 비참한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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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비참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시선이 존재했다. 적어도 교회 내에서 말이다. 하나는 이 세상은 없어질 곳이다라는 관점이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이라서 정처없이 떠돌다가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은 오직 '전도'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고, '복음'을 알고 있고 전해줄 수 있다는 특권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만의 특별한 비밀'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을 만들어 주었고, 더욱이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은 이미 따 놓은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이 없이 전도를 하고 사역리를 외치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선포했다. 자랑스럽고 우월한 내면의 의식이 태도를 만들었다. 무례한 기독교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이 없어질 곳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 땅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우리 집에 놀러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듯이 세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회정의를 꿈꾸고, 환경을 보호하면서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말리고 가난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국제관계에서도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면서 온 세상에 팽배한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이미 와 있었다. 이미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의 간극에서 고민할 필요없이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와 '내가 너희 중에 항상 함께 있다'라는 말씀을 붙들고 이웃들을 사랑했다. 여전히 그럼에도 세상의 비참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점 세상의 문제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나기는 했다.
비참한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는 두 가지의 시선이 모두 매혹적이었다. 어차피 이 산동네의 비참한 일상을 벗어날 길이 없으니 아직 갈 수는 없지만 죽어서 얼른 갈 수 있는 천국을 기다리는 것이 즐거운 상상이었다. 공부를 잘해야하는 이유보다는 천국에서 '황금집'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선행을 하고 전도를 해야 했다. 중학교때 20명이나 전도했으니 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집까지는 아니어도 은으로 만들어진 집정도는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와 같이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예수님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비참해지는 일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데 그 가난한 환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순복음 교회의 교인이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은 축복하고 번영하게 하시는데 너랑 너희 부모님을 보니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신게 틀림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해서 나에게까지 들리게 했다.
세상에 관심없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근면정신'으로 자본주의의 정상에 설 수 있었고, 성실하게 술담배하지 않고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아서 박사도 되고 사장도 되고 강남에 아파트도 얻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번영을 주시고 풍성하게 인생을 채워가지는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시간의 일부를 할당에서 '자선'을 베풀고 시혜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세상의 비참에는 공감하지 않아도 되었다. 천국이 이미 자신들의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였고, 세상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즐겼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천국을 바라고 산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여기가 더 천국이 아닌가? 천국으로 만약 진짜로 가면 자신들이 여기서 이루어 놓은 것들을 다 놓고 가야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모순이 존재하기는 했다.
번영하는 신학을 품고 이 비참한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삶을 살게 된 이들의 자녀들은 오히려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자신들이 누리던 것들을 다 놓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두 번째의 시선, 그러니깐 하나님이 여기 오신다라고 하는 관점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시면 여전히 리셋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오히려 없어지는게 자신들이 누리는 일상을 유지하는 비결이 되었다. 맛있고 즐겁고,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하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삶이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해서 대학도 가고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하고 다시 자녀도 낳았다. 안정적인 삶 속에서 매주 드리는 예배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적당히 예수님을 부르고, 적당히 전도하고, 세상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에 후원하는 정도에서 자선을 베풀었다.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생이란 얼마나 풍요롭게 만족스러운가? 하나님이 주신 천국이 여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
이따금 노숙자들이 냄새를 풍기거나, 빨갱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설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내뱉었다. 세상의 비참에 대해서 노력하는 이들이 '헛된 꿈'을 꾸고 있고 공산주의에 경도되어서 가족도 안 챙기고 북한이나 찬양하는 세력으로 보였다. 그들의 일상은 술과 담배로 얼룩져 있고, 불성실한 삶을 사회문제에 치환해서 책임전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들 중에서 국회의원이 되거나 더나가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인가?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고, 이전 대통령의 딸과 같이 권위가 있어도 모자를 판에 대학도 안나온 대통령에 그의 친구가 또 대통령이 되다니 말이다.
그나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라도 목포의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이라도 받았으니 인전해줄 만하지만 말이다.세상이 망해가는 징조가 되었다. 사기꾼 업자가 이제 차기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니, 이 사람은 빨갱이니지는 몰라도 한마디로 '급'이 안되는 인물을 내세우다니.
그에 비해서 현 대통령은 검찰총장에 아버지는 연세대 교수였고, 서울대를 나왔으며 예전에는 잘나가던 집안이지 않은가? 물론 아내를 잘 못만나서 저렇게 된 것 뿐이다. 이 사람은 9수를 해서 검사가 될 만큼 뚝심도 있고 인생의 고난도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술을 너무 좋아하고 무속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저 사기꾼 업자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하나님이 축복하여 대통령도 되었는데 그에게 모든 권세를 주시지 않았는가? 반면에서 공당산 빨갱이에 북한을 찬양하는 세력들의 왕인 사기꾼 업자를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를 축복하듯이 미국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이번주 토요일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광장에 나가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저 빨갱이 사기꾼을 몰아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무지몽매한 청년들이 공산주의에 경도되어서 세상을 그르치기 전에 가서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그 유명한 역사강사도 저렇게 목에 핏줄을 세우는데 말이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건너면서 싸웠던 이방민족들이 떠올랐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전쟁'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면서 우상들에게는 단호하게 목을 베기도 하시는 분이다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의 '성스러운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기 까지 자신이 지켜야 하는 대한민국 내에서의 위치와 재산, 자녀들의 미래가 모두 딸려 왔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번영'을 챙기고 더 나아가서 미래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의도로 모여야 한다.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이 나라를 구원해야 한다! 구하자 이 나라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그나마 남아 있었던 '전도'의 대상자들의 목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정의가 가득찬 깃발이 손에 들려있었다. 현 대통령을 무력하게 만든 빨갱이 놈들을 잡아야 한다. 물론 그가 무속에 빠져있고 매일 40도가 넘는 위스키를 개걸스럽게 자신의 위액 속으로 쏟아부어도 상관없다. 남매호랑개교이든 일본의 종교든 혹은 더 나아가 엄청난 친일파라도 상관없다. 후쿠시마 원전이 이 온 바다를 더럽힌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세상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다. 천국은 어차피 다른 곳에 있다. 그러니 일단 지금 대통령을 보호하자. 하나님이 권세자들을 세우신 것 아닌가? 탄핵을 반대하고 대통령님을 지키자. 동성애 문제를 해결해줄 대통령이다. 빨갱이들을 몰아낼 대통령 아닌가? 그러면 혈세를 어떻게 쓰든지, 국정운영을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 반대로 저 나쁜 놈들을 잡아 족치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품위없게 폭력을 쓰는 것은 아니니깐 적당히 참여해보자. 아이들도 보고 있으니깐.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무신론자가 되거나 교회를 떠난다.
잠깐 빙의해서 썼지만 요즘들어서 더 화나게 하는 일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현 시국에 대통령을 옹호하거나 탄핵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이다. 더욱이 '회개'한다고 집회를 여의도 앞마당에서 하면서 진정 회개해야할 현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빨갱이들 잡겠다고 하는 회개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무지하고, 관심도 없는 이들이 외쳤던 '천국'의 오용된 개념들이 이렇게 만들어다고 생각한다. 죽어서 갈 천국은 어차피 자신들에게는 프리티켓이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이렇게 '나도 정치에 참여해보자'라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물론 다른 의미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다만. 극우 기독교라기 보다는 적당히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가진 생각일 것이다.
어느날 꿈을 꾼 적이 있다.
서울역을 거닐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새파란 청년노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앞을 응시하고 있다가 어느순간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 꿈속이었지만 심장이 멈춘 듯했다.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다!' 그는 매우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응시하는 그의 눈은 내가 성경에서 매일 상상했던 그런 눈이 아니었다. 더욱이 꿈 속이었지만 그가 혹여나 나를 만지면 냄새가 뵐 까면 걱정하던 마음도 생생하다. 이 세상에 만약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고민을 해 보았다. 그 푸른 눈의 청년이 아른 거리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마치 광장에서 바닥에 글씨를 쓰시듯이 나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남겨 놓으셨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적절한 단어나 문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눈빛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것 같다.
세상의 비참은 매일매일 늘어나고 있다. 산불도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교통사로고 사람들이 삶을 마감하고 있다. 계엄령이 성공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나 역시도 최근에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터라서 건너서 건너서 잡혀갔을 것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이것이 피해망상이라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적당한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본 세상의 이미지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통령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깐 야당을 겁주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던 뿔이 4개나 달린 적외성 투시 망원경이 장난감이었든줄 아나 보다. 몇 백개씩 준비한 시체를 담는 주머니는 국방예산이 남아 돌아서 사 놓은 것이겠다. 헬기가 40분만 빨리 도착했어도, 현장에서 국회의원들을 잡아갈 '인원'들이 몇 백명만 더 있었어도, 불을 끄고 국회로 잠입만 했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대통령'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이들.
오늘은 일요일이다. 헌재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고 광화문에서는 탄핵찬성 집회가 추운 날씨에도 진행중이며, 여의도는 오늘만 쉰다. 아니 오늘 오후에도 모일 수도 있겠다. 그 '위대한 역사강사'가 나와서 야당의 대표만 공격하는 입담에 환호하는 이들이 모이겠다.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는 미국 국기를 들고. 세상의 비참은 여전히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제는 '천국'개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가 된 것 같다. 이 판에 말려 들어가는 사람들마다 모두 '정의'를 외치면서 탄핵반대를 외치면서 야당대표 내리기에 급급하다. 기독교인이 오히려 더 한다. '복종'이나 '순종'이라는 단어가 매일 교회의 단상에서 울려퍼지기 때문이다. 이방민족으로 처치하듯이 빨갱이들을 처치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생각을 오랜시간 동안 고민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마음을 토로하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계신다는 것 때문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 서로 싸우고 오해하고 무시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찌르고 사고가 터저도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제한사항을 두고서, 믿지 않기 때문에 저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위 믿는다고 한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판단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죽던 말던 동성애나 공산주의 정도로 치환된 정치적 구호를 따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섣부르게 가지고 온다는게 챙피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온다고 생각한다.
곧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지옥처럼 보이지만, 천국의 미세한 빛이 비추이는 곳도 있다. 조금 더 사람들의 마음을 회복시키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도와주고 세상이 원래 만들어졌던 의도대로 새로워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도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세상의 비참함을 마주하는 것은 이런 고민에서 내가 무력해지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더욱이 같이 열심히 세상을 바꾸어도 모자를 판에 '천국'은 이세상에 없다는 식의 생각으로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심한 평가를 하는 사람들. 더욱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정의'를 내세운 무지한 정치적 판단에 분노가 차오른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우월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인 해석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 이 고민 때문에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글쎄 나는 가난한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지 풍요와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모두가 같이 행복하게 사는 그림이 아니면, 누구 한 사람이 특출나게 잘 나서 그 사람만 특별히 사랑해 주신다는 신앙은 멀리하고 싶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노숙자로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누구나 즐겁게 삶에 의미를 찾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것을 얕은 생각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고민해보아야 하리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천국이라면, 아니 하나님의 나라라면 이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포되고 그것이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함께 걷고 있다면.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누구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남과 경쟁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삶.
먹을 걱정과 잠잘 걱정 안하고 여유있게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오늘 저녁이 있는 삶.
나 혼자만 그런 삶을 누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누리는 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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