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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상징은 언제나 거룩을 지향한다

현대기독연구원_폴틸리히 신학강독_문화의 신학 5장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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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독교연구원에서 진행하는 폴 틸리히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폴틸리히의 책들을 산책하면서 틸리히에 대한 상당한 오해를 해소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에서는 폴틸리히나 칼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명명하면서 이단보다 더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그리스도교의 시대, 문화의 신학을 읽으면서 오히려 틸리히가 말하려고 했던 것들을 살펴보았다. 틸리히는 서양신학이 가지고 있던 합리성과 세속화의 물결에 반항하면서 오히려 비이성적이면서도 신앙의 '황홀경'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실존주의에 대한 경계를 어느정도 하면서 읽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신정통주의'라고 할만한 부분은 확실히 인간은 '궁극적인 관심'으로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조금 어렵지만 문화의 신학에서 상징철학에 접근한다. 오늘 새롭게 알게된 에른스트 카시러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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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언어의 본성


종교가 궁극적인 실재를 향해 있고, 문화의 본질이 종교라면 문화는 기본적으로 궁극적인 실재를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틸리히는 종교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본성은 결국 상징이라고 말한다. 상징과 기호의 관계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틸리히가 쓴 문화의 신학 5장에서는 상징과 기호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상징 문제는 틸리히에게 중요한 개념이다. 틸리히는 모든 신학적 언어를 상징으로 처리한다. 틸리히가 보기에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실재와 연결되어 있는 상징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하나님은 “상징”으로만 표현될 수 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언어는 인간 존재의 심연(abyss, Abgrund)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죄, 그리스도나 하나님나라라는 신학적인 개념은 모두 실재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종교적 상징의 핵심은 '거룩'이라는 궁극적 실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틸리히는 에른스트 카시러의 상징철학에 대해서 접근하면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징의 역량을 드러낸다. 인간은 4차원적인 존재로서 반드시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위치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유한한 장소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틸리히는 이것을 유한한 자유라고 불렀다. 유한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기초월적인 상상력의 존재이면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서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유한성을 넘어서기 위해서 상징체계를 만든다. 문자가 그렇고, 기호가 그렇고, 보여지는 모든 존재들은 살아있는 은유가 된다. 그래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종교적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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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상징 능력이 가능한가?

인간은 자연과 역사의 조건에 제약되어 인간의 자유는 숙명과 유한성에 제한받는다. 그래서 인간은 “유한한 자유”안에 실존한다. 이것은 자유와 유한성의 양극 구조안에 있는 인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초월적 능력'과 '반성적 사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상징을 이해하고 사용할 힘이 있다.

상징은 인간을 인과율의 예속성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고 인간이 그(인간의) 일부인 우주적 실재와 깊은 차원에서 만나고 실재의 다양한 요소를 체험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상징 체계, 특히 '거룩한 상징체계 a sacred symbol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이 필요한 심층적 이유

인간 존재는 다른 존재자들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주 자체와 본질적으로 연관 관계속에 있고 구조적으로 공통된 요소를 공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근원적인 신비한 궁극적 실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의 실재는 자연과학의 인과율의 법칙성으로는 모든 실재의 차원이 해명되고 설명될 수 없다. 자연과학적 지식으로는 이해하거나 체험적 참여가 어렵고,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실재가 존재한다.

생명의 깊이의 차원과 의미의 차원, 그리고 보다 높은 차원의 실재의 구조적 특성을 체험하고 참여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풍요롭고 창조적인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 상징적 참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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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는 독일 출신의 철학자이며, 신칸트주의 철학 전통, 그중에서도 마르부르크 학파(Marburger Schule)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철학의 출발점을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았지만, 단지 이성 중심의 학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문화적 삶 전반을 포괄하는 새로운 철학의 틀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 동물(animal symbolicum)’로 정의하였는데, 이 정의는 인간이 세계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재구성하며, 문화를 창조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의 철학은 인간이 언어, 예술, 종교, 신화, 과학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철학적으로 조명한 결과물이다.


카시러의 대표 저작인 '상징 형식의 철학(Philosophie der symbolischen Formen)' 3부작(1923~1929)은 그의 철학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 정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들을 ‘상징 형식’이라 부르며, 언어, 신화, 예술, 과학, 종교 각각이 독자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상징적 체계라고 주장하였다. 각 상징 형식은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사고를 조직하고 의미화하는 구조이다. 예컨대 신화는 원초적인 감정과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며, 과학은 수학적, 논리적 기호체계를 통해 법칙을 발견하려 한다. 카시러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동일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이며, 특정 형식을 절대화하기보다 이들 형식 간의 관계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철학적 태도이다. 이를 통해 그는 칸트가 제시한 선험적 조건을 고정된 인식틀로 보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적·문화적 형식들로 확장시켰다.


카시러의 철학은 인간 정신의 작용을
광범위하게 해석한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이 주목해 온 논리적 추론과 인식론적 구조 외에도 감성, 상상력, 예술적 표현, 신화적 사고 등 다양한 인간 활동이 갖는 고유한 인식 기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이성과 감성, 논리와 상상, 과학과 예술 사이의 위계를 철폐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상징을 창조하고 해석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활동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다. 이 같은 철학적 통찰은 20세기 초 독일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하이데거와 같은 존재론 중심의 급진적 해체로 나아가지 않고, 인간 문화의 창조성과 표현능력에 대한 긍정적 신뢰를 유지한다.


192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국제철학회의에서 카시러는 하이데거와 ‘칸트 철학’을 주제로 유명한 철학적 논쟁을 벌였다. 이 다보스 논쟁은 20세기 철학사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카시러는 계몽주의적 이성과 자유의 철학을 방어하였고,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탐구하는 존재론을 강조하였다. 카시러는 인간이 상징 형식을 통해 끊임없이 세계를 구성하고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실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칸트의 이성 개념을 규범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계승하면서, 그것을 수학이나 과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문화와 역사, 예술의 영역까지 확장해 해석하였다. 반면, 하이데거는 이성과 상징 체계보다도 ‘존재의 진리’에 대해 사유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논쟁은 철학의 미래를 이성 중심주의와 존재론 중심주의라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게 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카시러의 사상은 이후 철학뿐 아니라, 문화학, 인류학, 언어학, 종교학, 기호학, 인지과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상징 형식 이론은 현대 인문학의 해석적 전통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예를 들어, 클리포드 기어츠는 인간 문화를 '의미의 그물망'으로 보았는데, 이는 카시러의 상징 형식론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또한,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들, 예컨대 롤랑 바르트나 움베르토 에코 같은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철학적 자극을 제공하였다. 카시러는 하이데거나 푸코처럼 급진적 담론 해체를 통해 근대성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인간이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한 사상가였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과 표현이 단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의미의 창조와 재구성의 과정이라는 점을 철저히 보여주었다.


이렇게 볼 때, 카시러는 20세기 철학의 흐름 속에서 과학과 인문학, 이성과 상상, 논리와 예술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넘어, 인간 정신의 총체적인 작용을 이해하고자 했던 포괄적 철학자이다. 그는 근대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문화적 차원으로 확장시켰고, 철학이 단지 존재나 진리에 대한 물음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 삶과 문화의 형태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유는 오늘날 철학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이 인간의 의미구성 과정을 탐구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이론적 자원으로 남아 있다. 카시러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이제 틸리히의 상징체계, 종교언어의 본성에 더욱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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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폴 틸리히의 상징철학


그럼 틸리히의 상징을 다시 생각해보자. 폴 틸리히의 상징철학은 그의 존재론적 신학과 깊이 결합된 독창적인 사유 체계이다. 그는 인간과 궁극적 실재, 곧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단지 개념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으며, 상징(symbol)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상징은 단순한 언어나 기호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깊이와 신적 실재 사이를 잇는 존재론적 통로이며, 종교적 진리의 핵심적인 매개체이다. 그는 철학과 신학의 언어가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상징이라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언어와 종교의 관계에서 성스러움의 개념까지 도달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 틸리히는 상징(symbol)과 기호(sign)를 명확히 구분한다. 기호는 단순히 어떤 대상을 외적으로 지시하는 데 그치는 반면, 상징은 자신이 지시하는 대상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의미를 ‘참여’를 통해 드러낸다. 예를 들어, 국기는 단지 국가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정체성, 감정,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상징이다. 틸리히는 종교적 언어 역시 모두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신, 천국, 구원, 영원 등 종교의 핵심 개념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실존과 궁극적 실재를 연결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틸리히의 상징철학은 그의 중심 개념인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과 연결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궁극적인 것에 몰두하고자 하는 존재이며, 이 궁극적 관심은 상징을 통해 표현된다. 예를들면,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 기호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고통과 희생, 죽음과 구원이라는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정서를 자극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 자체를 드러내고 인간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진다. 틸리히에게 상징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실재를 열어주는 계시적 작용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에게는 '상징'이 더이상 상징이 아니라 그로부터 통로가되어서 실제로 예수님과 만나는 하나의 문이 된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틸리히는 상징이 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되고, 변화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어떤 상징이 더 이상 실재에 대한 참여를 열어주지 못하고 관념적 틀로 고착된다면, 그것은 ‘죽은 상징(dead symbol)’이 된다. 그는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죽은 상징에 대한 파괴였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신학은 항상 살아있는 상징을 통해 존재의 깊이를 해석하고 갱신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문자주의적 종교 해석에 대한 강한 비판이며, 종교 언어의 유연성과 깊이를 동시에 강조하는 틸리히 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오늘날 이성적으로만 들어간 기독교는 이러한 관점에서 상징이 가진 종교성을 죽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현대화를 위한 세속화의 언어는 오히려 살아있는 상징을 저버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위에서 살펴 본 틸리히의 상징철학은 에른스트 카시러의 상징철학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중요한 차이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시러는 인간을 ‘상징적 동물’로 보며 상징을 인간 인식과 문화구성의 구조로 이해한 반면, 틸리히는 상징을 존재론적 참여와 실존적 구원이라는 신학적 차원에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카시러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상징을 이해한 반면, 틸리히는 존재론적·신학적 관점에서 상징의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 정리해보면, 틸리히의 상징철학은 종교적 진리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새롭게 접근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방식은 개념이나 논리가 아니라, 상징을 통한 존재론적 참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문자주의적 종교 해석을 넘어서서, 종교 언어의 깊이와 진리성을 회복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현대 신학과 해석학, 심지어 철학적 인간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상징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고 인간을 궁극적 실재와 연결하는 살아 있는 언어이며, 틸리히 철학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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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징과 기호에 대한 이해


기호(sign)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개념을 지시하거나 대표하는 단순한 표시이다. 기호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순한 연결 고리로 작용하며, 지시 대상(object)과의 본질적 관계나 참여는 없다. 예를 들어, 교통 표지판에서 ‘정지’라는 글자나 붉은 팔각형은 실제 정지라는 행위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사회적 합의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 기호일 뿐이다. 즉, 기호는 외부적이고 기능적이며, 약속된 관계(conventional relation)에 의존한다. 반면에 상징(symbol)은 단순히 대상을 지시하는 것을 넘어서, 그 대상과 내적인, 존재론적인 연관을 갖는다. 상징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경험, 실존, 역사, 가치 등을 내포하며, 상징 그 자체가 지시하는 대상의 의미를 ‘드러내고’ ‘참여하는’ 구조를 가진다. 예를 들어, 국기는 단지 국가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 국민의 정체성, 희생과 자긍심 같은 감정과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에 ‘참여’(participate)한다. 이 말은 상징이 단지 외적인 지시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통로라는 뜻이다.


또한 기호는 대체 가능하지만, 상징은 대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화학기호에서 H₂O는 물을 나타내는 기호이지만, 다른 기호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반면에 십자가는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 내용을 드러내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기호로 쉽게 대체할 수 없다. 상징은 그 자체가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 실존적 체험을 내포하며, 단지 의미 전달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차원을 열어주는 힘을 지닌다.

결국 기호는 기능적이고 외적인 지시에 가까우며, 상징은 내적 참여와 실존적 의미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표현이다. 기호는 설명할 수 있지만, 상징은 ‘해석’되고 ‘경험’되어야 한다. 상징은 인간 정신과 문화, 종교, 예술, 정체성과 같은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는 도구이며, 인간이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심층적인 형식이다.


상징과 기호 정리하기

상징과 기호를 구분하는 차이 : “기호들(표식들)은 자신이 그것들이(기호들이) 가리키는(지시하는) 실재와 그 실재의 힘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들은 비록 상징들이 상징하는 자신이 상징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지만, 상징하고 있는 실재의 의미와 힘에 참여하고 있다”

상징과 기호는 둘 다 자신들을 넘어서 그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상징은 자신이 가리키는 실재에 참여하지만, 기호는 자신이 가리키는 실재에 참여하지 않고다만 “지시”만 한다는 점이다.

책상, 펜, 구름, 물, 빵이라는 단어는 실재를 가리키는(지시하는) 기호이다. 그러나 언어는 단순히 지시 기능과 표현적 기능만이 아니라 상징의 기능이 있다. 성찬식에 먹는 <빵과 포도주>와 같이 어떤 객관적 사물을 가리키는 언어는(빵은 빵일 뿐 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이다) 종교적 예전 언어에서 사용할 때, 단순히 객관적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기능'을 넘어 그 언어가 표현하는 실재에 참여하는 <상징 기능>을 함께 갖게 된다.

물의 상징성 : 물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액체물질이고, 강, 바다, 샘에서 발견되는 물질이지만, 종교적 상징으로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면, (예를 들어 세례식에서 물을 붓는 행위) 죄를 정화하는 상징이 된다.

우주적 나무의 상징: 엘리아데는 고대의 신화나 부족마을에서 신성시하는 나무는 단순한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주기적인 재생능력과 창조적 생산성, 꿑없는 무궁성을 가리키는 암호로서 상징적 기능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상징의 기능

대표 혹은 대리적 기능(재현적 기능 representative) : 나무는 우주적 나무를 대표하는(대리하는/재현하는) 기능을 함으로써 우주는 생명으로서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상징은 실재의 감추어 있는 차원과 의미와 힘을 나타나며 그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대리적 기능이 있다.

종교적 상징은 궁극적으로는 궁극적 실재의 신비, 즉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힘과 기반이나 근거, 존재 자체의 심연, 존재의 궁극적 힘을 드러낸다. 이를 총칭하여 거룩(the sacred, the holy)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궁극적 실재의 깊이의 차원은 신성하고, 거룩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적 상징은 거룩의 상징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를 단순한 심리적 환상이나 사회적 산물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신성한 체험으로 이해한 종교 현상학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그는 종교를 구성하는 신화, 의례, 상징, 공간과 시간의 구조 등을 단지 외적 행위나 문화의 일부로 보지 않고, 인간이 세계 안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실재와 접속하려는 존재론적 시도로 해석하였다. 엘리아데에게 종교란 이성과 감정 이전에 존재 전체가 응답하는 신성한 경험의 구조였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종교 현상학은 다양한 종교 전통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성스러운 것(the Sacred)’의 구조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그는 종교가 문화마다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일정한 구조(예를 드면, 성과 속의 분리, 신화적 시간과 반복, 축의 중심성 axis mundi)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 같은 구조는 인간이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우주적 질서와의 접속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실존적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엘리아데는 인간이 세계를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하며 살아간다고 보았다. 성스러운 공간은 질서, 안정, 초월성과 연결된 곳이며, 속된 공간은 무질서와 일상성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성스러운 중심을 찾아 그것에 의지함으로써 세계 속에서 방향과 정체성을 찾는다. 성소, 성산, 성전과 같은 공간은 단지 종교적 장소가 아니라, 실재의 중심이 ‘뚫고 들어오는 장소’, 곧 세계의 구조를 여는 축이 된다.

이러한 구조는 시간 개념에서도 반복된다. 엘리아데는 종교에서 시간은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원형적 반복을 통해 신화적 기원으로 돌아가는 구조라고 본다. 의례와 제의는 최초의 사건, 곧 신성한 창조 행위를 다시 enact하는 반복이며, 이로써 속된 시간은 신성한 시간으로 성화된다. 그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 인간은 영원성과 접속하며, 무질서한 현실을 넘어 신성한 질서를 재현하는 방식을 살아간다고 본다.

엘리아데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으로 정의하였다. 이는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성스럽게 감지하고, 의미 있는 질서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을 구분하고, 반복하고, 상징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이며, 종교는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깊은 차원을 드러내는 언어이다. 신화와 상징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에 참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종교적 현상을 해석할 때,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뒤르켐처럼 종교를 심리나 사회로 환원하는 관점에 반대하였다. 그는 종교를 독립적인 구조로 인식해야 하며, 종교적 상징과 체험은 그 자체의 논리와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비환원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종교는 단지 인간의 투사나 기능이 아니라, 존재와 실재에 대한 깊은 응답이며, 그 구조를 해석하는 것이 종교 현상학의 과제라고 보았다.

엘리아데는 종교를 인간의 삶 속에 드러나는 실재적 체험의 표현으로 이해하며, 신화, 상징, 공간과 시간의 구조, 반복되는 의례 등은 모두 인간 존재가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방식의 표출이라고 보았다. 종교 현상학은 종교를 해체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깊이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며, 엘리아데는 이를 통해 종교학, 인류학, 철학 모두에 새로운 해석적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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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에 의하면, 태고적 세계에서 참된 실재는, 즉 참으로 존재의 힘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거룩한 것(the sacred) 뿐이다. 종교적 상징은 속된 공간에서 존재의 힘과 의미를 빼앗겨버린 텅빈 상황이 되는데, 여기서 거룩한 것과 접촉함으로써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힘, 즉 궁극적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수혈 받거나 중매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종교적 제의와 예배의식에서 설교, 찬양, 성찬, 세례, 봉헌, 헌신의 행위들은 모두 종교적 상징 행위인데, 그러한 종교적 상징행위들은 “거룩한 자”, 혹은 “신성한 것”을 느끼고 체 험하여 심판과 치유와 갱신과 충만, 재생의 체험에 도달하게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누미누스의 감각(sense of the numinous): 신앙이란 종교적 지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거룩한고 신성한 궁극적 실재와 관련된 것으로 인간의 내적 생명과 영혼이 고양되고 승화된 감정상태이다. 그러한 경외의 감정 체험이 누미노제의 감정이다. 그것은 종교적 상징을 통해 인간이 신성하고 신비하느궁극적 실재에 직접적, 내면적, 인격적 으로 참여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상징은 우주의 실재의 감추어 있는 깊이의 차원을 열어 보임으로써 존재의 구조와 힘과 의미를 드러내 보릴 뿐 아니라 인간 영혼의 내면의 깊이를 반영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종교적 기능의 실존적 가치”이다
_엘리아데


이제 마지막으로 폴 틸리히의 비매개적 경험(immediate experience)에 대해서 알아보자. 틸리히가 말하는 비매개적(immediate)이란 어떤 매개를 통하거나, 개념에 대한 인식이나 해석없이, 또한 언어적 설명없이 (중재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매개적 경험은 존재 자체로 주어지는 체험이다.틸리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교리나 신학적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통하지 않고 존재의 깊이에서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존재의 궁극적 차원, 다시 말해 인간 실존의 한계 상황인 소외, 불안, 죽음에서 드러나는 "궁극적인 것"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틸리히는 종교는 지적인 사유나 제도 종교를 넘어 비매개적 경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만남, 기도, 예배, 예술과 문화속에서 비매개적 경험을 통해 궁극적 실재를 경험

하게 된다고 말한다.



5. 루돌프오토에게서 보이는 거룩과 상징의 연관성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 1917)'에서 종교 경험의 본질을 ‘성스러움(das Heilige)’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명하였다. 그는 기존의 신학이 성스러움을 이성적 도덕성이나 윤리로 환원한 것에 반대하면서, 종교는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이고 감각적인 체험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오토에게 성스러움은 인간이 외부에서 마주하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감정의 대상이며, 그것은 단지 교리나 규범이 아니라 인간 실존 전체를 압도하는 ‘절대적 타자성’의 체험이다. 그는 이 성스러움의 감정을 ‘누미노제(das Numinose)’라고 불렀다. 누미노제는 인간 이성의 범위를 넘어선 전이성적 체험으로, 이 체험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모순되게 보이지만 동시에 경험되며, 바로 이 감정의 결합이 종교적 감응의 본질이라는 것이 오토의 주장이다.


누미노제의 3가지 차원

첫째, mysterium은 이해할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자체를 뜻한다.

둘째, tremendum은 그 신비 앞에서 느끼는 압도감, 전율, 두려움이다.

셋째, fascinans는 그 신비한 존재에 대한 매혹, 끌림의 감정이다.


오토는 성스러움이 비이성적인 체험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이 반이성적인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성스러움이 이성으로 완전히 포착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그 외곽을 해석하고 상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스러움은 신화, 의례, 상징, 교리, 예배 등의 종교 전통 속에서 문화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점에서 오토는 신비주의와 신학, 철학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하였으며,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종교적 실재를 존중하였다. 그는 특정 종교만이 성스러움을 지닌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성스러움은 힌두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체험되는 요소라고 보았고, 종교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조화롭게 이해하려는 종교 비교학적 시각을 발전시켰다. 이로써 오토는 종교다원주의와 현대 종교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스러움’이 인간 문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초월적 체험의 실재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토의 사상은 이후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학,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 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칼 융의 무의식 개념 등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틸리히는 오토의 개념을 발전시켜 하나님을 ‘존재 자체’로 설명하였고, 엘리아데는 성과 속의 분리와 종교적 공간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오토의 개념을 활용하였다. 이렇게 오토는 종교적 체험의 독자성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현대 신학과 종교학, 심지어 철학 전반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오토의 성스러움 개념은 종교를 단순히 도덕과 교리로 환원하는 이성주의적 해석을 넘어서, 인간 존재 전체를 흔드는 실존적, 정서적, 신비적 체험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상은 종교적 언어와 체험의 복합성을 존중하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절대자의 감각을 일깨우는지를 설명하려는 진지한 철학적 시도였다. 성스러움은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경외해야 할 신비이며, 오토는 그 신비의 철학자였다.


오토에게 거룩함의 의미

루돌프 오토에게 ‘거룩함(das Heilige)’은 단순히 도덕적 선이나 이성적 진리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이고 전율적인 체험의 차원이다. 그는 거룩함을 ‘누미노제(das Numinos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이 절대적 타자, 곧 신적 존재를 마주할 때 느끼는 전율(tremendum)과 매혹(fascinans)의 감정을 강조한다. 이 감정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으며, 언어로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이다. 오토에게 있어서 거룩함은 존재 자체를 압도하며, 인간을 무릎 꿇게 하는 신비이며 힘이다.

이와 같이 직접 설명이 불가능한 거룩함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상징(symbol)’을 통해 감지되고 표현된다. 오토는 상징이 단순한 기호나 표시가 아니라, 거룩한 실재가 인간의 세계 안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불, 빛, 성소, 산, 성례전 같은 것들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신적 실재가 임재한다는 감정과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방식이다. 상징은 거룩함을 단지 지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그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통로이다.

오토에게 상징은 인간이 만들어낸 표상이 아니라, 초월적 거룩함이 인간에게 자신을 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개 구조다. 거룩함은 표현 불가능하지만, 인간은 상징을 통해 그것을 느끼고 반응하며, 예배와 종교적 행위를 통해 그 신비에 접속하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상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비와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종교적 체험의 핵심 언어이다. 종교는 바로 이 상징을 통해 거룩함과의 조우를 가능하게 하며, 인간은 상징 속에서 절대자를 만나는 깊은 실존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루돌프 오토에게 있어서 상징과 거룩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거룩함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절대적 신비이며, 상징은 그 신비가 인간의 정신과 감각 안에 파고들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존재론적 매개체이다. 상징은 단지 설명이 아니라, 참여이고, 예배이며, 경외의 체험이다. 오토는 상징을 통해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고, 이를 통해 종교란 이성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거룩함에 대한 감응과 참여의 구조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489px-Amiconi_Moses_and_the_Elders_See_God.jpg?type=w420 루돌프 오토에게 '거룩함'은 이성을 넘어서는 비매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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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견해는 언제나 상징을 기호로 해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구조의 관점에서 인간이 가진 언어구조는 기표와 기의에 의한 기호의 탄생이다. 그러나 오늘 틸리히의 견해와 함께 카시러, 루돌프 오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징은 오히려 실재를 지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는 그 자체로 궁극적인 관심으로써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징은 보이는 것 넘어의 궁극적인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틸리히는 오히려 상징이 아니더라도 비매개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성경에서도 너무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어느순간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교회, 성경, 십자가, 사제, 목사, 수련회와 같은 상징적인 단계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배운다. 물론 여기서 이단이 나올 수 있겠으나 이단 역시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언제나 비매개적으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성경을 언제나 즐겁게 읽고 묵상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도 많다. 그러나 메시지성경에서 유진피터슨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상징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상징이 없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면서 어디서나 계시하신다. 인간이 가진 실존적인 의미는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떠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안에 있기에 말과 문화는 모두 궁극적인 관심과 연결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하는데 오히려 더 믿음이 강한 것 같은, 더 보수적인 것 같은 틸리히를 만났다. 앞으로 틸리히가 보는 다양한 문화매체에 대한 접근도 살펴볼 것이다. 꾸준히 고민하고 성찰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바른 신앙을 만들어가보자. (책의 내용을 요약했다기보다는 강의내용에 개인적인 견해를 포함했으며, GPT의 도움도 받았다. 더글라스 존홀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 보고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2746


https://www.youtube.com/watch?v=cKdPkLRBG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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