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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왜 예수님은 비유로 말했을까

유진피터슨 시리즈 _'비유로 말하라'의 핵심내용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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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처음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굴복하여 '주'(Lord)라고 부르고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친밀하여 져서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가 시작된다. 그렇게 한참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만나다가 어느새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정도의 신앙의 깊이를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친구'의 관계로 발전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아름다우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시며 때론 자신의 근심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함께 길을 찾는 동반자와 같은 '친구'가 된다. 누군가는 이 과정을 '성화'의 단계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영화'라고도 말한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외인'이었던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사람'으로 성장하기까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는데 가장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 유진피터슨이었다. 항상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서 책을 보면서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자한 웃음을 지을 것 같은 그는 내가 세상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차 있을 때 부드럽게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했다. 예수님의 뒤를 쫓아 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거친 음성으로 '똑바로 해'라고 외치기보다는 일상의 언어로 '그럴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좋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는 그림자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게 뜨거운 의심의 햇빛 아래 조그마한 그늘이 되어 준 유진피터슨의 이야기를 매일 '메시지 성경'으로 만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을 처음 만난 것은 20년전에 한동대학교를 다닐 때 순장을 하면서 선물로 받았던 '다윗, 현실에 뿌리박힌 영성'을 통해서였다. 처음으로 다윗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오나 흥미로워서 얼른 성경을 들쳐보려고 했던 때가 생각난다. 같은 성경인데도 어찌나 궁금하게 잘 해석을 했던지. 그래서 '메시지 성경'의 음성에 빠져버렸다. 이윽고 한동대를 졸업하고 나서는 친구들과 함께 '이 책을 먹으라'를 매주 스터디하면서 기도의 4가지 단계인 '렉치오 디비나'를 배웠다. 여기에게 드디어 뭉게구름처럼 희미했던 '영성'이라는 단어가 '기도한대로 사는 것'이라는 명료한 정의를 얻게 되었다.


기도의 4단계 (렉시오 디비나)

렉시오(Lectio) - 읽기 (Reading) : 이 단계는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메디타티오(Meditatio) - 묵상 (Meditation) : 읽은 본문을 깊이 생각하고 되새기는 단계이다. 본문의 의미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마치 음식을 씹어 소화시키듯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과정이다.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고 말하며, 말씀을 먹어 말씀이 되는 과정을 강조한다.

오라티오(Oratio) - 기도 (Prayer) : 묵상을 통해 깨달은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단계이다. 말씀을 통해 받은 감동이나 질문, 혹은 적용해야 할 부분을 기도로 표현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대한 응답을 드리는 것이 이 단계의 핵심이다.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 - 살기/관상 (Contemplation) : 이 단계는 말씀을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얻은 통찰과 깨달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며,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삶 전체로 말씀을 체화하고 살아내는 최종 단계이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을 읽는 동시에 그것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서 '이 길을 걸으라'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 모리아산에 오르는 이삭을 바치면서 걸어간 아브라함의 길, 모압 평지 앞에 선 모세의 길, 다윗이 걸어간 숭고한 길, 엘리야 그리고 이사야가 걸었던 길을 나 역시 함께 걸으면서 내가 어떤 '길'로 가야할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더욱이 헤롯의 길이나 가야바, 혹은 요세푸스의 길도 살펴보면서 '선을 행하다가 주의력을 상실하면 위선'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진피터슨은 여기서 '수단을 정결케 하라'고 당부하면서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영성의 길'을 내보였다.



부활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부활을 살라'에서 에베소 성도들의 이야기로 부터 현재까지의 영성을 이야기한다. 유진피터슨의 영성시리즈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이다. 여기서 유진피터슨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역사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놀이하시는지를 살펴본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에 대비하여 '하늘로부터 강하게 내려 오는 케리그마'를 전한다. 나는 이 책들을 손에 들과 몇년을 왔다갔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로소 '비유로 말하라'에서 예수님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에 대한 고민들로 영성에 대한 생각을 비로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복음을 통해서 가장 외롭고 어두운 곳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빛이 되는 길 위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떻게 빛나는지 이제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유진피터슨 소개

1932년 11월 6일 미국 워싱턴 주 이스트 스탠우드에서 태어나다. 몬태나 주 캘리스펠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50-1954년 시애틀 퍼시픽 대학에서 철학(B. A.)을 공부하다.

1954-1957년 뉴욕 신학교에서 신학(S. T. B.)을 공부하다.

1957-1959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셈어 연구로 석사학위(M. A.)를 받다.

1958년 미국 장로교단(PCUSA)에서 목사 안수를 받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재니스 스텁스를 만나 결혼하다.

1959-1962년 뉴욕 신학교로 돌아와 성경 원어(히브리어, 그리스어)와 성경을 가르치며, 뉴욕 시 화이트 플레인스 장로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다. “나는 잠깐 동안 목사 일을 할 생각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고, 당시 내게는 목회자가 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3년을 교수와 목사로 일하면서, 내 소명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마침내 나는 교수가 아니라 목사이어야 함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 일이 큰 충격이었던 것은, 나는 한번도 목사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62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릴랜드 주의 작은 마을 벨 에어에서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Christ Our King Presbyterian Church)를 시작하다. 이후 29년간 이 교회의 목사로 섬기다.

1980년대 초 교인들과 성경을 공부하며 성경 원문의 생생한 의미를 전달해 줄 방법을 고민하던 중, 갈라디아서를 오늘의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서 교인들과 함께 읽다. 이렇게 번역된 갈라디아서를 통해 교인들이 성경에 눈을 뜨게 되다. 이 번역은 나중에 있게 될 『메시지』 작업의 기초가 된다. “내가 번역을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오직 우리 교회 교우들과 그들의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본문 속으로 들어가, 그 의미의 밑바닥까지 살피고,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1988년 새로운 갈라디아서 번역과 설교를 담은 『자유』(Traveling Light)가 출간되다.

1990년 4월 『자유』에 실린 갈라디아서 번역을 수년간 마음에 두고 있던 NavPress 출판사 편집자 존 스타인이,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할 것을 제안해 오다. “나는 정말로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선 마태복음 10장까지 번역해 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실 서재에서 산상수훈을 번역하고 있던 나는, 이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1991년 7월 마태복음 번역과 함께 보낸 16개월의 기도 끝에 신약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하다. 29년간 섬기던 교회 목사직을 사임하다.

1991-1992년 피츠버그 신학교 집필교수로 재직하며 신약성경을 번역하다.

1993년 『메시지 신약』이 출간되다.

1993년 캐나다 밴쿠버 소재 리젠트 칼리지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2002년 7월 『메시지 완역본』이 출간되다. “나는 지난 12년 동안 성경 본문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2006년 리젠트 칼리지에서 은퇴 후 어린 시절을 보낸 몬태나 주로 이사하다.

2018년 10월 22일 “자, 이제 가자”(Let’s go)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여든다섯의 나이로 이 땅에서의 ‘순례 여행’을 마감하다.



1. 왜 비유로 말하라를 썼을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는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다. 종교적 언어로 치환되어 버린 살아 있는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슴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언어'로 우리와 대화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언어 그대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일상에서 쓰는 언어로 우리는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 우리의 과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어법을 부지런히 개발하면서 진리가 전해지고 공동체가 형성되도록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 받은 소소한 대화들 역시 '하나님의 일들'에 사용되는 언어와 대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의 언어는 사회적인 역할 속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기능'과 관련하지 않을 때 쓰는 언어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언어를 통해서 미묘한 감정과 모호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 T.S 엘리엇의 이야기처럼 이러한 언어는 '암시와 추측'으로 가득한 언어이다. 에밀리 디킨스는 "모든 진리를 말하되 빗대어 말하라"라는 표현을 쓰면서 Tell it slant라는 표현을 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유진피터슨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쓰는 언어와 우리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쓰는 언어 사이에 세워놓은 장벽을 깨려고 이 책을 썼다. 결국 일상의 언어와 하나님과 대화하는 언어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영성'이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삶에도 이런 방식으로 깊이 관여하신다. 인격적인 진리는 서두르지 않고 친밀함을 다져야 알 수 있다.


'비유로 말하라'는 영어표현대로 빗대어서 말하기
혹은 서서히 말하기이다.


이것은 기존의 언어체계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의미를 넘어서서 활활 타오르는 떨기나무 같은 신비를 보여준다. 선입견과 편견, 방어막과 전형과라는 문자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이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으시듯이 우리 역시 말의 신성함, 언어라는 거룩한 선물을 구분하지 않고 일상에서도 사용하고 예배를 드릴 때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면서, 예수님처럼 사는 방법이다.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그리스도로 구현되는 성령이 살아 움직이는 말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거룩성을 이른바 '존중하는 언어'를 개발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가 사용한 '비유'에 집중해야 한다.


설교의 언어_케리그마_의지

예수님은 설교의 언어를 마가복음 1장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시면서 사용하신다.

설교는 선포의 언어이다. 설교는 하나님이 바로 이곳에서 지금 하시는 일, 지금 이 때에 바로 이 장소에서 하시는 일을 선언한다.

설교는 듣는자에게 반응하도록 요청한다. 설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며 행동하고 계시다는 좋은 소식이다. 설교는 현재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에 우리를 개인적으로 참여시키는 언어이다.

설교는 지금 여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나에게 계시해 준다.


가르치는 언어_디다케_지성

복음서의 저자들은 가르시는 예수님, 하나님나라라고 하는 곳에서 사는 것의 의미를 제시해주시는 예수님을 제시한다.

가르침은 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세속적인 것의 연결성을 만들어내고 관계를 지어낸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짚으시고, 우리가 결정하고 분별해야 할 것들, 예수님이 왕으로 계신 이 왕국의 삶을 사는데 적합한 수단과 바업ㅂ들을 자세히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명기나 모세오경, 구약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의 언어 속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같이 오랜 전통에 서 있다.


일상의 언어_파라클레오_감성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언어이며 격없고 가벼운 언어이다.

구조화되어 있지 않은 가벼운 대화들이며 소소한 사건들과 우연한 만남 속에서 일어나는 대화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나 교사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말이 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여행하고 잡담하면서 일상을 살아낸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언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언어는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일상의 언어였다.



2. 이야기하시는 예수님


이야기하는 항상 재현이다. 재현representation은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현재presentation를 지나가면 재현은 모두 자기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이미 타자이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던 타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을 꺼내는 순간마다 '자기로서 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은 영원을 현재를 살기 때문에 과거에서, 미래에서 자기자신을 찾을 수 없다. 과거에서도 자기로서의 타자가 있는 것이고 미래에도 자기로서의 타자가 있는 것이다. 현재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을 살아가고 미래와 과거에서는 자기로서의 타자를 살아간다. 이러한 시간의 변증법에 따라서 회상과 예감은 대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도래할 것들과 이미 도래한 것들 사이에서 어느 시점에서 어떤 감정과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떠오르는 것들이다.


이야기하시는 예수님,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과거에서 우리에게 대화를 거시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그가 들려주신 '비유'가 비단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접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대부분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비유는 비인격적으로 축소된 우리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비좁은 자아의 공간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그리스도의 비유로 초대받은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고, 이윽고 그와 함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을 걷다가 조금씩 알게 된다. 이 길은 결국 '십자가로 가는 골고다'라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그 비유에 초대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하게 된다.


사마리아의 예수님_누가복음 9장 51절 - 19장 27절

언어는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계시의 일차적 수단이다. 말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신다.

하나님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내면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정보로 축소되거나, 잠시 참조되는 정도의 비인격화, 신성모독 차원으로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누가의 여행 내러티브

누가복음의 중심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이 길을 가시면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비공식적 언어가 담긴 부분이 담겨 있다.

갈릴리를 떠나는 부분에서 여행이 시작되며,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를 종종 '여행 내러티브'라고 부른다. 이 부분은 누가복음에만 독특하게 다루고 있다.

마가는 예수님의 설교의 특징인 케리그마적 요소를 담고, 마태는 가르침의 특징인 교훈적인 요소를 다루지만 누가는 일상의 '대화'를 중심으로 여행 내러티브를 이끌어 간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그 여저에서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삶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누가는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부리면서 긴 여행에서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킨다. 질문에 대답하시는 예수님, 저녁식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하는 예수님, 친구들과 함께 의논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이 담겨 있다.


누가의 여행내러티브의 특징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 :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속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일요일이 아니라 오히려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구조화된 언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마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는 방식이다.

비유라고 부르는 작은 이야기들 : 예수님은 마가복은 4장 34절처럼 여행내러티브 내내 '비유가 아니면 말슴하지 아니하시고' 비유로 말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동원해서 동참하게 만든다. 눈에 띄지 않게, 심지어는 은밀하게, 비유로 듣는 사람들을 끌어 들인다.

비유 : 영어로는 parable이고 ~의 곁에 던져진 무엇이며 para(곁에)와 bole(던져진)의 합성어인데 결국비유를 들으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곧 그 비유에 우리의 존재가 연루된다. 나를 대입해서 생각해보고, 내가 격은 상황을 대비해서 비유를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의 여행내러티브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보다는 일상적인 사건들이다. 농부와 재판관의 희생자들 이야기, 동전과 양과 방탕한 아들이야기, 결혼잔치, 헛간과 탑을 짓는 일, 사기꾼과 걸인 이야기, 무화과나무와 거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케리그마 중독이나 디다케 편향은 사람들의 의지와 지성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기 때문에 강렬하고 초점이 명확하다. 하지만 여행내러티브에서 사용되는 일상의 언어는 목적에만 집중해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고 질문하는 이들에게 집중하게 된다. 종교적인 언어로 비인격하지 않는 방식이 바로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3. 누가복음의 11가지 내러티브


갈리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여행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일어난다. 사마리아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이야기, 즉 내러티브는 누가가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유진피터슨은 이것을 케리그마나 디다케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인 파라클레오 즉 '비유'에 집중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욕망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환대와 기도의 끈질김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라이프스타일을 찾아가게 된다. 여행은 언제나 다녀온 후에 더 큰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사마리아 여행을 마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통해서 마침내 부활 후, 승천하신 예수님 이후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상의 삶을 살아낸다.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일상이 빚어진다.


내려티브의 주요내용

이웃(누10:25-37) :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누가 내 이웃입까?'라는 질문에 '너희는 이 비유를 들을 때 누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로 대답하신 예수님. 우리는 항상 누군가가 나에게 이웃인가를 물어보지만,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내가 정말 좋은 이웃인가, 선한 이웃인가'라고 하는 생각하게 된다. 선한 사마리에인의 비유에 휘말리면 비유의 특징이 항상 그렇듯이 내가 사는 일상에서 게속 적용하게 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일까? 우리 모두는 이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친구(누 111:1-13) :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서 일상에 필요한 '빵'을 구하는 것조차 세속화와 성스러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이어서 한밤 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거래하지 말고, 솔찍하게 말하는 일상의 대화에 집중하게 하신다. 이 내러티브에서 우리는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곳간 짓는 자(누12:13-21) : 부요함을 나누어야할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용해야할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형이 자신에게 재산을 나눠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곳간에 보물을 잔뜩 쌓아둔 사람이 내일 기대하지만 오늘 하나님이 생명을 가져가신다는 비유를 들려준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물이라고 생각할까? 욕망에 지배당한 사람에게서 이 비유는 인격적인 만남을 인생의 중심으로 가지고 온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빈곤에 집중해야 하는데 곳간에 쌓아둘 보물에만 집중하는 우리자신을 이 비유를 통해서 돌아보게 된다.

거름 (누 13:6-9) : 어떤 사람이 마당 앞에 무화과를 심고 3년을 기다렸으나 열매를 얻지 못한다. 찍어버리라는 명령에 정원사는 1년만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거름'을 주겠다고 하는 비유이다. 우리는 '땅만 버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없애버리는 전략을 취한다. 로젠스톡-휘시의 말처럼 우리시대의 가장 큰 유혹은 성급함이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힘든 세대에게 '거름'은 제대로된 대안이 아니다. 헬라어로 '아페스'는 정원사가 말한 '그대로 두기'와 같이 '저들을 사하여 주소서'와 같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름에, 용서, 기다림에 초대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거름'이 된다.

식탁 대화 (누14-1-14) : 사마리아 여행 내러티브에는 4가지의 식탁대화가 있고, 이 대화의 핵심은 '환대'이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피조물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 집과 옷이 필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 누구도 스스로 족한 사람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위대한 자연과 은혜로부터 받고, 창조와 언약을 받는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환대를 통해서 그 동안 쌓여 있는 냉대를 푸신다. 그 식탁에는 창녀든 세리이든, 죄인이든, 바리새인이든 모두가 환대를 받았다. 낯선이가 길을 찾아 올라오는 수도원에서는 '오 주님 맙소사, 또 당신이십니까'라고 말하는 때가 있다.

잃어버린 형제들 (누 15장) : 치료받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질병이나 질환을 의원병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이와 비슷한 경건병이 있다. 헬라어로 '유세비아'라는 뜻을 가진 거룩함, 경건함, 독실함이라는 단어는 경건하다는 자부심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없이도 없을 수 있는 '자기 의'이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양 한마리 비유, 잃은 드라크마 1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의 비유가 있다. 특히 탕자가 돌아왔을 때 형은 투덜댔다. 사실 탕자만 잃어버린게 아니라 형도 잃어 버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두 형제가 모두 돌아오는 것을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들려 주신다.

부정직한 관리인 (누 16:1-9) : 예수님은 어떤 부자가 고용한 관리인이 회계감사를 받을 시기가 오자 사람들의 빛을 얼마씩 탕감해주시면 자신에게 환대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주인은 이러한 부정직한 관리인을 칭찬한다. 탕자의 비유와 부정직한 관리인의 비유의 공통점은 모두 아버지와 주인의 '자비'에 자신의 인생을 맡겼다는 것이다. 부정직하지만 오히려 '미워할 수 없는 악당'이 되어서 사람들의 빛을 탕감해준 것이 주인의 자비심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다. 비유에서 주인은 이 관리인을 '지혜롭게 분별했다'로 칭찬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우리의 삶을 은혜로 나누는 일에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축복하신다.

눈에 띄지 않는 사람 (누 16:19-31) : 부자와 나사로가 죽어서 서로 지옥과 천국에 간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나사로'처럼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비유는 명령이 아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살아 있는 동안의 회개로 이끄신다. 부활자체가 회개를 만들지는 않는다. 나사로의 부활도,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그러나 이야기가 우리를 오히려 회개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회개'한 사람들을 보라.

과부 (누 18:1-8) : 어떤 도시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없는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의 과부의 끈던진 도움 요청에 결국 도와준다는 비유이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과부의 항상 기도하라라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속성이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방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성이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의 현재적 묵시와 긴박한 일에 참여하게 되는 '기도'는 과부처럼 계속되어야 한다.

죄인들 (누 18:9-14) :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위선'을 마주하게 된다. 위선은 선을 의도하다가 주의력이 떨어지면 낳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위선자임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자기기만으로 이루어진 위선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숨긴다. 사회적인 계층이나, 도덕심, 기도의 분량에 따라서 자신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 당당함을 가지게 된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 세리는 위선을 드러내고 바리새인에게도 위선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인격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기도, 일상 생활 속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와 언어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기도, 소위 기도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의 위선적인 어리석음을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신다.

최소한의 기대로 사는 사람 (누 19:11-27) : 마지막 비유는 달란트에 대한 비유이다. 왕의 돈을 받고 어떻게 썼는지에 대한 비유이다. 그리고 통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청원에 대한 왕의 대답이 들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지키거나 보호하거나 안전하게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써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 불참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



4. 누가복음은 어떤 책인가?


우리가 다뤘던 비유들이 즐비한 누가복음은 어떤 책일까? 누가는 의사였고 1장에서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말한다. 성경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교회에 출입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어떠한 은혜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놀라운 이야기를 전할까? 정체성의 정통성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마태처럼 '케리그마'가 유효하겠고, 율법이 무너진 곳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회복하려면 마가처럼 '디다케' 즉 가르치는 언어가 유효하겠지만. 오히려 성경에도, 하나님의 계시에도, 교회의 문화에도, 그리스도의 존재에도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전할까? 누가는 그래서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비유'로 접근한다.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는 비유를 통해서 명령도 아니고, 가르치는 언어도 아닌 참여의 언어를 펼친다. 누구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우리의 삶에 밀착해 계시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의 주요 특징

직업은 의사였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장 14절에서 누가를 "사랑받는 의사"라고 언급한다.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보여지는 세밀한 묘사와 정확한 관찰력은 그의 의학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방인 출신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중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그리스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시리아 안디옥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누가복음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보편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배경이 된다.

사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다: 누가는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에 여러 차례 동행하며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역할을 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행전 중 일부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 표현을 사용하여 누가가 바울 일행과 함께했음을 시사한다.

역사가이자 작가였다: 누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당시 헬라어 문학 작품 중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으며, 그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서론에서 밝히듯, 그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후 기록했다.


누가복음을 쓴 이유

누가복음이 쓰여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기록을 제공하고, 그를 통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신뢰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확증이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기독교 진리들을 더욱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쓰였다. 이는 당시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복음의 진실성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예수님의 삶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저자 누가는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후 "차례대로" 기록했다고 밝힌다. 이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 승천에 이르는 과정을 시간적, 논리적으로 잘 정리된 포괄적인 기록을 제공하려는 목적이다.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하는 복음서이다. 누가복음은 구원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가난한 자, 여성, 죄인 등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특정 민족이나 계층에 국정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초대 교회의 사명과 정체성을 제시하는 서론이다.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연결되어, 예수님의 복음이 어떻게 세상으로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초대 교회의 역사와 사명의 서론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뿌리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 (1-2장)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와 탄생: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고, 요한이 태어나는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고,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지는 아름다운 장면

성전에서 봉헌: 아기 예수가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에게 인정받는 이야기

소년 예수: 12세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과 대화하는 이야기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사역 (3-9장)

족보: 누가복음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제시하여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대표임을 강조

시험: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이야기

갈릴리 사역: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말씀을 읽으시며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시고, 가버나움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냄

제자 부르심: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제자들을 부르심

산상수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유사한,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수많은 기적: 병자 고침(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 앓는 시몬의 장모 등), 죽은 자를 살리심(나인 성 과부의 아들), 오병이어의 기적 등 다양한 기적을 행함.

여성들에 대한 관심: 죄인인 여인을 용서하시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수 있음을 보여주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과 독특한 비유들 (9-19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사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강도 만난 자를 돌본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이웃 사랑을 가르침.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탕자의 비유):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보여줌.

불의한 청지기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재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겸손한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심.

삭개오 이야기: 키 작은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변화되는 이야기로, 구원이 죄인들에게도 임한다는 것을 보여줌.


예루살렘에서의 사역과 수난, 부활 (19-24장)

성전 정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을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을 쫓아내심.

예수님의 고난 예고와 체포: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심.

재판과 십자가 처형: 빌라도와 헤롯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를 용서하시는 모습도 누가복음에만 나옴.

부활과 승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후 하늘로 승천하심.


책의 주요 문장

P. 25 설교는 현재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에 우리를 개인적으로 참여시키는 언어다.

P. 26 예수님은 정보를 나누어 주시기보다는 비유들을 가지고 우리의 상상력을 재구성하셔서 예수님이라는 살아 있는 다면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셨다.

P. 38 눈에 띄지 않게, 심지어는 은밀하게, 비유는 듣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P. 38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거기에 연루되고 만다.

P. 42 예수님의 말이 논쟁만 무성하게 하고 사람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데 쓰이는 언어적 도구가 되면, 그 말에서 생명이 빠져나오고 수북이 쌓아 놓은 낙엽 더미처럼 죽어 버린다. 바로 그러한 찰나에 주님은 대화 속에 비유를 던져 넣으신다. 더 이상 자신에게 친숙한 언어의 관습 속을 유유히 다닐 수 없게 된 우리는 그 비유에 걸려 넘어...

P. 50 그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할 수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숨은 의미와 입 밖으로 뱉지 않은 말, 우리가 생각 없이 사용하는 언어를 뒷받침하는 침묵들을 들으며 서로가 그것을 듣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P. 82 기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여러 측면 중에서 인간성 자체와의 접촉을 잃어버리기가 가장 쉬운 단 하나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인간성을 박탈할 때 우리 자신의 인간성과도 접촉을 잃어버리게 된다.

P. 92 기도는 오로지 인격적인 관계(아버지! 친구여!)의 단어와 문법으로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도는 결코 제대로 된 용어를 바른 순서대로 사용하는 것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결코 좋은 태도, 바른 기질, 혹은 능숙한 조작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좀 얻거나 나 자신의 내면과 접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도는 오로지 관계다. 오리지 그리고 영원히 인격적이다.

P. 110 하나님은 우리를 간신히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천국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의 은혜를 조금씩 나누어 주지 않고 아낌없이 주신다. 우리는 축복이라는 단어를 특징으로 하는 삶의 길에 들어서 있다.“내 잔이 넘치나이다!”




5. 유진피터슨의 신학적 특징


유진피터슨의 신학은 신학적인 이론보다는 일상의 언어와 고민 그리고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사건에 대한 해석까지 소소함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와 계시로 가득하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던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보면 현실 속에서 씨름하는 성경의 저자들의 내러티브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과 사역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함께 걸어가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때론 설명하고 때론 이야기하고 때로는 케리그마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특히 말년에 사역했던 '리젠트칼리지'는 '영성신학'을 강조하는 대학으로 이름난 것도 유진피터슨의 영향이 크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각 책마다 소개하는 인트로가 아름다운 말로 가득하다.


일상에 뿌리내린 영성을 강조한다

유진 피터슨은 영성을 특별한 종교적 행위나 신비로운 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의 영성 신학은 '현실, 하나님의 세계'와 같이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는 성육신(Incarnation)의 원리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 깊이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며, 신앙이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비유로 말하라에서 보여준 것처럼 '일상의 언어'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만나는지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있는 '영성'을 부활시킨다.

오늘날 '미국'의 사회 혹은 북미의 신학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들이 모든 라이프스타일이 '세속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유진피터슨은 세속화된 방법론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상'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비유'에 집중한다.


이야기 중심의 성경 해석과 설교를 추구한다

피터슨은 성경을 단순한 교리나 도덕적 지침서가 아닌, 살아있는 이야기로 이해하고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메시지' 성경 번역 역시 원문의 메시지를 현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체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다.

그는 설교를 통해 성경의 '낯설고 새로운 세계' 안으로 청중을 초대하여, 성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나고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도록 이끈다.

유진피터슨은 학부시절에 철학을, 석사에서는 셈어 연구를 진행했고 뉴욕신학교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면서 '언어'자체에 대한 '내러티브'를 원어 그대로 살리는 사역을 한다.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리쾨르는 주요 명저인 '해석의 갈등'에서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을 타자로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이야기'이다. 자신이 가진 이야기를 써놓으면 그 이야기가 타자가 되어서 자신을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정체성을 만든다.

이야기에는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가 들어 있다. 유진피터슨은 이야기에 집중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사회 성도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통한 '정체성 회복'을 추구한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회자'에 집중하여, 목회자들의 진정성의 회복을 추구한다.


목회적 정체성과 소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자의 정체성과 소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목회를 단순히 교회 행정이나 프로그램 운영으로 보지 않고, 영혼을 돌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형성하도록 돕는 근본적인 사역으로 이해한다.

그의 책 '목회의 기초' 등에서는 목회자가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목회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며, 기도, 이야기 서술, 고통 분담, 거절, 공동체 건설과 같은 목회의 핵심 원리들을 제시한다.

아가서에서 기도하는 목회사역을, 룻기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목회사역을, 예레미야애가에서 고통을 나누는 목회사역을, 전도서를 통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목회사역을, 에스더서를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목회사역을 설파한다.


반소비주의적, 반성공주의적 신앙 제시하기

그는 현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소비주의, 성공주의, 그리고 천박한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교회와 목회가 세상의 이익 창출이나 외적인 성장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과 참된 영성 형성이라는 본질적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성공주의 목회 신화를 포기하라'와 같은 책을 통해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한 '그 길을 걸으라'를 통해서 헤롯의 길과 가야바의 길이라는 성공과 욕망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수 많은 선지자들이 걸었던 길에 대해서 독자츨 초대하고 있다.


성경 언어의 회복과 일상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 원문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면서도, 그 의미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데 탁월하다. 그는 신앙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전문 용어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메시지' 번역은 이러한 철학을 잘 보여주며, 복음이 우리의 실제 삶의 언어로 다가올 때 비로소 진정한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로마서 8장에는 "우리의 삶은 구름이 드리운 삶이 아니라 항상 내일을 향해 '다음은 또 뭐죠 아빠'라고 부르는 희망에 넘치는 삶"이라고 강조하면서 성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원어를 살리면서도 이야기로 풀어낸다.



0. 나오기


2008년에 이스라엘에 2달간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이스라엘의 생활공동체인 키부츠 중에서도 북부 헬몬산 근처에 있는 '바람 키부츠'에서 2달간 사과팩킹을 하면서 봉사를 했다. 주말에는 이스라엘 이곳저곳을 다녔고, 때마침 1월 1일도 맞이하게 되어서 이스라엘식 '로쉬 하샤나'를 기리면서 사과를 챙겨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레바논 근처의 침엽수림이 가득한 지역이라서 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히치하이킹으로 예루살렘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금요일 정오에 출발한 여정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마침 샤밧이라서 차가 한대로 다니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친구와 멈춰 서서 한손에는 사과를 들과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밤 12시가 되는 시간 우리는 다시 바람키부츠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뒤로 돌았다. 차가 한대도 다니지 않고 모든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하늘에는 아브라함이 보았던 수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주 멀리서 산 중턱에 있는 동네의 불빛이 정말로 '숨길 수 없는 존재감'으로 드리우고 있었고 우리가 걷는 길은 이내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이 되었다. 실제로 이 길을 예수님이 걸어갔던 길이었다고 생각하니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감격에 휩싸여서 황홀감까지 들었다. 예루살렘과 헬몬산 사이를 걸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들을 풀어 놓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했다. 이렇게 깊고 기쁜 순간들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신 비유와 함께 하나의 등불이 되었다. 앞을 비추이는 등불.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은 미래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한 다급한 선택의 순간에, 혼란스러운 교차 가운데서, 누군가를 찍어버리려고 하는 폭력의 결단 앞에 비유가 등장할 것이다. 누가 보면 머뭇거림이겠지만 우리의 내면에서는 비유로 말하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역으로 초대하는 목소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함께 나누기

누가의 여행내러티브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비유'는 무엇이었나요? 왜 그런가요? 과거의 어떤 사건 혹은 현재의 어떤 상황 아니면 미래에 예상되는 일들이 있으신가요?

일상의 언어에서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방식은 종교적인 케리그마나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언어 안에서 성스러운 문장들을 만드는 것이라면, 나의 일상의 언어는 얼마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상의 언어와 닮아 있나요?

케리그마에 중독된 사람을 본 적 있나요? 스스로 케리그마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정당성이 언어에 있기 때문에 말하면 말할 수록 자기강화가 일어나게 되는데요, 혹시 이런 경우가 자신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 중에 있나요?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혹은 큰 변화를 만든 이야기, 비유가 있나요?

'찍어 버리고 싶었지만' 오히려 참아주고 거름이 되어본 경험이 있나요? 그 사람이 변화되고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거름이 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https://brunch.co.kr/@minnation/1735


https://www.youtube.com/watch?v=V0Xr_FWmQQ8&list=RD7mnnjnR7AaU&index=17

한웅재 선생님의 탕자의 마음을 표현한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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