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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하나님나라에 대한 4가지 관점

이미와 아직 가운데 불트만, 톰라이트, 도트, 슈파이처의 신학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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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여기저기서 강의를 해야할 일이 많아진다. 신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철학에서부터 시작해서 역사학을 넘어서 신학까지 넘어오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게 되고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게 되었다. 그 동안에 법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을 배우고, 조직신학과 관련된 학자들의 이론들을 들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역하는 곳에서 하나님나라로 강의를 해야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나님나라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나라의 특징과 실제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대한 정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를 받으시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강의를 하시는 김동춘 교수님께 배웠다. 오늘은 짧게 나마 하나님나라의 개념과 함께 니차드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연결성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예수논쟁을 간략하게 알아본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종말론'을 메타인지로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벼보려고 한다.


종말론 Eschatology

시간과 역사에 대한 관점: 종말론은 역사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끝에 중요한 전환점 또는 완성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희망과 경고: 종말론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새로운 창조, 완전한 구원)과 동시에 경고(심판, 파멸)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차원: 개인의 죽음과 사후 세계(개인 종말론)부터 인류 전체의 운명, 지구와 우주의 종말(우주적 종말론)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된다.

윤리적 함의: 종말론적 믿음은 현재의 삶과 행동에 대한 윤리적 동기를 부여한다. 세상의 끝이 다가온다는 믿음은 종종 도덕적 개혁이나 급진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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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현된 종말론 (Realized Eschatology, C.H. Dodd)_현재적 하나님나라의 도래


C.H. Dodd가 제시한 실현된 종말론은 종말이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그의 오심을 통해 이미 현재적 현실로 우리 가운데 도래했음을 강조하는 신학적 관점이다. Dodd는 신약 성경, 특히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능력을 보여주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미 종말론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먼 미래에 기다려야 할 유토피아가 아니다. 예수님의 기적, 그의 가르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죽음과 부활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이 땅에 강력하게 임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오는 변화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질병의 치유, 죄의 용서,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실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해석된다.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졌던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이는 당시 지배적인 하나님나라의 담론이었던 알버트 슈바이처의 '철저 종말론'의 특징을 반격하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예수님이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지만 그것을 실제로 볼 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슈바이처에 대해서 이미 예수님은 그 자체로 종말을 실현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미'와 '아직'의 논쟁에서 Dodd는 '이미'에 속하고 슈바이처는 '아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현된 종말론의 특징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 : Dodd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단순한 미래적 사건의 예고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 부활을 통해 이미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현실로 보았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현재하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미래 종말론과의 차이: 전통적인 종말론이 세상의 종말, 재림, 심판 등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초점을 맞췄다면,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성취된 종말론적 사건들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Dodd는 신약성경의 예언적 구절들이 대부분 미래가 아닌 예수님의 사역과 그로 인한 교회 공동체의 변화를 지칭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미 실현되고, 실현된 종말론이다.

요한복음의 중요성: Dodd는 특히 요한복음이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은 영생이 미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종말론적 의미가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윤리적 함의: 실현된 종말론은 단순히 교리적인 이해를 넘어 현재의 삶에 대한 윤리적 함의를 가진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임이 생긴다. 미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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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결과적 종말론(Consequent Eschatology)_임박한 종말을 향한 예수의 삶과 사역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된 철저 종말론(혹은 결과적 종말론)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의 근본 동기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강렬한 기대에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곧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그의 윤리적 명령들과 희생적인 삶은 바로 이 종말을 촉진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슈바이처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종말이 궁극적으로 도래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과 심판이 있을 것을 예상하셨다.


따라서 그는 제자들에게 극한의 윤리적 요구를 하셨고, 자신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종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필연적으로 그 종말을 향해 나아가며, 그 종말을 "결과적으로"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다. 철저 종말론은 예수님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면모와 그의 철저한 종말론적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단순히 도덕적 교사가 아닌 종말론적 선지자로 이해하게 한다. 이는 C.H. Dodd의 실현된 종말론과는 달리 종말의 미래적 도래와 그 임박성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아직이지만 이미 임박해 있고, 그 임박성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아직이다. 그러나 곧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예수님이 기대하던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으로 기다려지는 나라가 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의 주요 특징

예수님의 철저한 종말론적 의식 :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전통에 깊이 영향을 받아 매우 임박한 우주적인 종말의 도래를 기대하고 선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은 이 임박한 종말, 즉 하나님의 나라가 곧 기적적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래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 : 슈바이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C.H. 도드처럼 현재에 실현되는 윤리적 통치가 아니라, 미래에 극적으로, 초자연적으로 임할 하나님 자신의 능력 있는 통치인 것이다. 이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적 진보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에 의해 갑자기 도래할 것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환상'과 '실패' :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이 임박한 종말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강요'하거나 '유발'하려 했다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종말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종말은 예수님의 기대대로 임하지 않았고, 따라서 예수님은 '실패한 종말론적 예언자'의 비극적 인물이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를 이상적인 도덕 교사나 인간적인 영웅으로 묘사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파격적인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윤리의 '일시성' 또는 '중요성 부족' :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예: 산상수훈)은 임박한 종말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일시적인 비상 윤리'로 해석된다. 즉, 세상의 종말이 곧 닥칠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극단적인 순종과 희생을 요구하는 윤리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그 자체로 영구적인 윤리 규범이라기보다는 종말이라는 특정 상황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일시적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비판적 종결 : 슈바이처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 1906'를 통해 18세기 이후 진행되어 온 '역사적 예수' 탐구 운동의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이전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예수를 재구성하려 했으며, 그 결과 '역사적 예수'는 실제 예수라기보다 학자들의 '거울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슈바이처 자신은 예수를 철저한 종말론적 인물로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는 20세기 현대인의 이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1세기 유대인의 묵시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종결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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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존론적 종말론 (Existential Eschatology, R. Bultmann)_실존적 결단으로서의 종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실존론적 종말론은 성경의 종말론적 언어, 특히 신화적 표현들을 현대인의 실존적 이해와 경험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불트만은 성경에 나타난 우주적 종말이나 예수님의 문자적 재림과 같은 신화적 요소들을 현대 과학적 세계관으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았다. 대신, 이러한 신화적 언어가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메시지에 주목하였다. 불트만에게 종말은 더 이상 외부에서 일어날 객관적이고 우주적인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종말은 개인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직시하고, 근본적인 회심과 결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내면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이다.


즉, 개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자신의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순간이 바로 실존론적 종말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며,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 과정이다. 불트만은 복음의 메시지를 역사적 사건이나 미래적 예언에 고정시키기보다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실존론적 종말론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을 느끼고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단순한 접근으로 시작된다. 미래나 과거에서 찾는게 아니라 바로 현재에서 실시간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종말론을 말한다.


실존론적 종말론의 주요 특징

시간이 아닌 실존에 초점: 이 관점은 종말을 미래의 특정 시점이 아니라, 인간이 삶의 매 순간 직면하는 궁극적인 결정의 순간, 혹은 자기 이해의 전환점으로 보는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 종말보다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심층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의 영향: 이 개념은 주로 20세기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불트만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종말론적 언어(예: 재림, 심판, 세상의 끝)가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신화적 외피를 벗겨내고, 그 안에 담긴 실존적 진리를 현대인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금, 여기, 그리고 결정: 불트만에게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선포된 복음)'를 듣고 개인이 신앙으로 응답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는 실존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는 미래의 사건 예고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걸고 결단하라는 실존적 요구가 되는 것이다. 이 결단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이것이 곧 실존적인 종말 경험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관심: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세부적인 정보보다는 선포된 그리스도(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 응답을 중요하게 여겼다. 역사적 탐구를 통해 예수를 파헤치는 것은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 결단을 통해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 실존적 변화였던 것이다.

윤리적 함의: 종말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결단이라면,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책임 있는 선택을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죽음, 죄, 유한성 등 인간 실존의 한계를 직면하고, 신앙 안에서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실존론적 종말론이 제시하는 윤리적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트만 철학의 주요 특징

실존주의적 관점: 인간 존재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불안, 죄, 죽음 같은 실존적 한계에 직면할 때 비로소 '본래적 실존'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신약성경에 담긴 1세기 신화적 세계관(기적, 귀신 등)의 외피를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실존적 진리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복음의 본질인 케리그마를 현대에 맞게 전달하려는 시도였다.

케리그마(Kerygma)의 강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초대 교회가 선포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즉 케리그마라고 강조했다.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이 케리그마는 듣는 이에게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 사건'이라고 보았다.

실존론적 종말론: 종말은 미래의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이 복음을 듣고 신앙으로 결단하는 '지금 여기'의 실존적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 결단을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 종말의 경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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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시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_현재와 미래의 하나님나라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은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종말론적 이해 중 하나로, C.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이미)과 전통적인 미래적 종말론(아직)을 통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갖는 이중적 시제를 설명한다.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 (Already, But Not Yet)이라고도 부른다. '이미(Already)'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그의 사역,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 역사가 이 땅에 확실하게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졌고,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이론이 아닌 현재적 능력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현재적으로 누리는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복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Not Yet)'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죄와 고통, 불의와 죽음이 존재하며,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아래 놓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모든 악이 완전히 근절되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도래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될 궁극적인 때가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면서도, 아직 오지 않은 그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소망하며 인내해야 한다. 이 관점은 기독교인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책임과 동시에, 미래의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력을 제공한다. 다양한 학자가 있지만 그 중에서 영국 성공회 주교인 톰라이트의 신학이 주요하다.


톰 라이트 신학의 핵심 특징

'큰 이야기'로서의 성경: 성경을 단편적인 교훈이 아닌, 창조부터 새 창조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이야기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성경 본문은 이 큰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중요성: 예수님을 1세기 유대교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 왕으로 철저히 탐구한다. 특히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새로운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새로운 관점'의 칭의론: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주창자로서, 칭의를 죄인이 의롭게 되는 개인적인 선언을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선언으로 본다. 율법 준수는 행위 구원이 아닌 언약 백성의 '정체성 표지'였다고 해석한다.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재림을 통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개시된 종말론'을 지지한다. 이 긴장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세상에서 새 창조의 대리자로서 살아갈 윤리적 책임을 부여한다.

창조와 새 창조, 그리고 소명: 하나님이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을 넘어,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일꾼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정의를 실현하며 세상의 회복에 기여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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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적 예수 논쟁


'역사적 예수 논쟁'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인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탐구할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신학적, 학문적 논쟁을 의미한다. 이는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 신앙 공동체의 믿음과 고백을 통해 형성된 '신앙의 그리스도'와 실제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역사적 예수'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역사적 예수 논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수의 역사성이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복음서는 어떤 종류의 문서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21세기 현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살았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살았던지 아니던지 중요하지 않고 그 의미가 중요하다고 보는 방식이 역사적으로 흘러 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제1의 탐구: '옛 탐구' (18세기 후반 ~ 20세기 초)

배경: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신앙의 영역이었던 예수의 삶을 객관적인 역사적 방법으로 탐구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시기이다.

목표: 복음서에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적, 교리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구성하려 했다. 예수를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도덕적 교사나 위대한 인간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로, 예수의 목적은 정치적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국을 회복하는 것이었으나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후에 공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예수의 삶(Das Leben Jesu)'에서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을 신화로 해석하여, 복음서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이 시기의 탐구를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종결지은 인물이다.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에서 이전 학자들이 자신들의 관념에 맞는 예수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철저한 종말론적 예언자로 보았다. 예수님이 임박한 종말의 도래를 기대하며 모든 것을 걸었으나, 그 종말이 오지 않음으로써 '실패한 예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는 1세기 유대인의 묵시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인물이었기에 현대인에게는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고 결론 내리며, 이 탐구가 더 이상 의미 없다고 보았다.


무(無) 탐구 시기 (1920년대 ~ 1950년대 중반)

배경: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비판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으로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회의론이 지배적이 된 시기이다.

주요 주장: 루돌프 불트만: 그는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kerygma, 복음의 선포)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성경의 신화적 요소를 현대인에게 이해 가능한 실존적 의미로 재해석해야 하는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주창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 만남이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부 정보가 아니었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것은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제2의 탐구: '새 탐구' (1950년대 중반 ~ 1980년대)

배경: 불트만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극단적인 회의론에 반발이 일어났다. 케리그마가 역사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면 공허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목표: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신앙의 토대를 흔들 수 있으므로, 제한적이지만 신빙성 있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찾으려 했다.

방법론: 복음서 자료의 진정성을 판단하기 위한 다양한 기준(예: 비유사성의 기준 - 유대교나 초기 기독교에서 발견되지 않는 예수의 독특한 말씀, 다수 자료의 증명 - 여러 독립적인 자료에 나타나는 내용 등)을 개발하여 적용했다.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와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 불트만의 제자들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강조하며 '말씀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나사렛 예수(Jesus von Nazareth)'를 통해 비판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역사적 예수의 개략적인 윤곽을 재구성하려 시도했다.

C.H. 도드(C.H. Dodd): 비록 슈바이처보다 앞선 시대의 학자이지만, 그의 '실현된 종말론'은 '무 탐구 시기'의 절정에 있던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제시하며 '새 탐구'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도드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실현되었음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을 단순한 미래 종말론적 실패자가 아닌, 현재적 구원을 가져온 분으로 이해하려 했다.


제3의 탐구: '새로운 탐구' (1980년대 이후 현재)

배경: 제2의 탐구의 방법론적 한계와 특정 학파의 편향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더욱 폭넓은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특징: 다양한 관점의 등장: 사회학적, 인류학적, 문학비평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예수를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 유대적 배경 강조: 예수를 헬레니즘적 배경보다는 1세기 유대교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예수를 유대인 율법 교사, 예언자, 지혜 선생 등으로 다양하게 조명한다. 복음서의 서사적 역할 인정: 복음서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보고서로만 보지 않고, 신앙 공동체의 믿음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서사적, 신학적 목적을 가진 문서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공동 창립자로, 고고학, 사회학적 관점에서 예수를 급진적인 사회 혁명가, 유대인 키니코스 철학자로 묘사한다.

N.T. 라이트(N.T. Wright): 방대한 저작을 통해 예수를 1세기 유대교 묵시적 세계관과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었던 메시아적 유대인으로 해석한다. 그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깊은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제임스 D.G. 던(James D.G. Dunn): 신약성경 학자로, 복음서가 '해석된 역사'임을 강조하며 역사적 예수 탐구의 방법론적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초기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토대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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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5가지 유형


도덕적인 개인이 어떻게 사회속에서 비도덕적으로 변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했던 라인홀트니버. 그의 형은 신학계에서 라인홀트니버만큼 유명하다. 세계관과 관련해서 중요한 책을 뽑으라고 하면 바로 '그리스도와 문화'이다. 라인홀트 니버가 아니라 리차드 니버가 쓴 바로 이 책 말이다. 리차드 니버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기독교 신앙과 세상 문화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다섯 가지 대표적인 유형을 제시한다. 이 유형들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왔던 다양한 방식들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이론적인 분류를 넘어, 각 유형은 특정한 신학적 관점과 삶의 방식을 반영하며, 기독교 공동체가 문화적 도전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오늘은 간단하게 설명하는 정도로만 하고 다음에는 더 깊이 있게 세계관과 유형에 대해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와 문화가 만나는 5가지 유형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Christ against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분리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 세상 문화는 죄와 타락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가치, 제도, 생활 방식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고 단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나, 특정 급진 재세례파 운동, 그리고 오늘날에도 세속 문화를 배척하고 순수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가려는 일부 근본주의적 공동체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수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Christ of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본질적인 연속성과 조화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문화의 영웅이거나, 특정 문화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인물로 이해된다. 기독교 신앙은 문화의 가장 고귀한 가치들과 자연스럽게 일치하며, 심지어 문화를 통해 그리스도가 계시될 수 있다고도 본다.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이나, 특정 시대의 문화적 이상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하려는 시도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는 복음이 특정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으며, 문화의 발전을 곧 기독교 정신의 실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above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모두 긍정하지만, 그리스도를 문화보다 훨씬 상위의 존재이자 문화의 완성자로 여긴다. 문화는 자연적인 영역에 속하며 제한적이지만, 은총과 계시를 통해 초월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와 완전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이 대표적인 예시로, 이들은 이성과 계시, 자연과 은총을 구분하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문화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정화되고 승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끊임없이 긴장하고 갈등하는 역설적인 관계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명령과 하나님의 의는 죄로 타락한 세상 문화와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세상의 죄성과 불완전성을 깊이 인식하며 두 왕국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고 믿는다.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론"이 이 유형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관점에서는 세상 문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인 소망과 충성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문화 안에서의 모든 노력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가 문화를 변혁하고 성화시키는 강력한 존재라고 믿는다. 세상 문화가 죄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모든 문화 영역이 변화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의 능력을 통해 문화의 모든 측면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야 한다고 본다. 칼빈주의 전통이나 청교도 신학, 그리고 현대의 기독교 문화 운동들이 이 유형에 해당한다. 이 관점은 문화 변혁에 대한 강한 소명의식을 가지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입장이다. 구조는 선하지만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은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대해서 갖는 태도나 신념을 보여준다. 문화가 변화의 대상인가 아니면 불편한 동거인가? 아니면 정복해야할 대상인가 동치시켜야할 대상인가에 따라서 문화적 현상이나 사회참여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결국 이러한 세계관은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것이 쌓이면 습관이 된다. 보통 한국 기독교에 소개된 개념은 이원론을 비판한다는 견지에서 '문화 변혁자'인 그리스도의 구조와 방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신교에서는 대부분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 만드신 구조는 선한데, 방향이 악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표현이 바로 이 책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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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나님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


마지막으로 살펴볼 주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간이다. 하나님나라가 내제적인가 혹은 초월적인가에 따라서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실현되는 영역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이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서 실현되는가는 계속해서 논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내재성(Immanence)과 초월성(Transcendence)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나라가 실재로 임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원리로써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민해볼 수 있다. 먼저 개념들을 알아보고 두 가지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한 가지가 과잉되었을 경우 어떻게 되었는지도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Transcendence)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을 넘어서시고, 그들과 구별되며, 그들에게서 독립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며, 인간의 이해나 경험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는 관점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성 :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한 주권자이시며, 어떤 피조물이나 세상의 질서에도 얽매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

완전한 다름 : 하나님은 인간이나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사야 55장 8-9절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은 인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법, 기술과 공동체, 국가와 사회 등등과 완전히 다르다.

미래적 완성 :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아직 오지 않은" 종말론적인 측면을 가진다. 완전히 악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때는 장차 도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월성이 강조되면 미래적 하나님나라와 친밀한 연결성을 갖는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 (Immanence)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과 가까이 계시고, 그들과 관계하며,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역사와 멀리 떨어진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과 세상 속에서 개입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 :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게 계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하신다. 시편 139편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내재하심을 찬양하며,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고백하는 구절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을 보여준다.

현재적 실현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17:21)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미래에 도래할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 속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증거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한다.

삶 속의 역사 :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 역사, 그리고 자연 속에서 일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정의와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 속에 동참하신다.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공간은 바로 여기이다.


내재성과 초월성의 균형

하나님 나라는 초월성과 내재성 중 어느 한쪽만을 강조해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 두 가지 속성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속성을 드러내는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초월적 존재이기에 내재하실 수 있음 : 하나님이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분이시기에,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에 개입하실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피조물과 같은 존재라면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재적 사랑이 초월적 능력을 드러냄 :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는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초월적인 능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내재적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맛보는 내재적인 현실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의와 평강이 실현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있는 초월적인 실제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풍성하고 역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변화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변화까지 확인할 수 있다.


내재성만 강조할 경우 문제점

하나님 나라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실현된다고 보거나, 인간의 노력과 사회 개혁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인본주의적 경향과 세속화로 이어진다.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할 수 있는 지상 낙원으로 오해하게 된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약화시키고, 인간의 능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 교회가 사회 개혁 운동에만 몰두하다가 본질적인 복음 전파와 영적 성장을 소홀히 할 위험도 있다.

좌절감과 환멸을 겪을 수 있다. 세상의 악과 고통이 여전히 존재하고,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쉽게 좌절하거나 신앙에 대한 회의감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데 왜 세상은 이 모양인가?"라는 의문에 답하기 어려워진다.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와 거룩함을 간과하고,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거나 심지어는 죄를 용납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의 편의와 만족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진리를 놓칠 수 있다.

종말론적 소망을 상실하게 된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고, 현세적인 성공과 만족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인내하고 소망을 붙들 힘을 약화시킨다.



초월성만 강조할 경우 문제점

하나님 나라를 오직 미래에만,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영역으로만 생각하여 현세의 삶이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해지는 경향이다.

현세 도피적이고 비현실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 미래의 천국만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세상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무관심해지거나, 심지어는 이 세상은 어차피 망할 곳이니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는 식의 숙명론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게 된다. 가난, 불의, 차별 등 세상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다. 이는 기독교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외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신앙이 삶과 괴리될 수 있다. 예배당 안에서의 신앙과 일상의 삶이 분리되어 이중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앙이 개인적인 영적 만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율법주의적이고 고립된 신앙으로 변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초월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죄와 연약함을 지나치게 정죄하고 사랑과 포용보다는 심판과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다. 세상과 소통하기보다는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과 초월성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과 구원 계획을 왜곡하고, 건강한 신앙생활과 교회의 역할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하여 현재적으로 경험되고 있지만,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아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고 기다려야 할 미래적인 실재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의 균형 잡힌 이해만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궁극적인 소망을 잃지 않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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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오기


벌써 20년도 넘은 이야기이다. 토요일 아침 기숙사를 나오는데 97학번 형들이 싸우고 있었다. 한동대의 기숙사의 흔한 풍경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는가 아니면 아직 안왔는가였다. 대부분의 논쟁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나라로 정리가 되었지만 가끔씩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형들의 논쟁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 분은 경영경제에서 경제학을 가장 잘하는 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지금 영화감독이 된 언론정보를 전공한 형이었다. 나는 그당시 이게 무슨 말인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쉽게 지나쳤는데 가끔씩 이런 공부를 할 때가 되면 그 때가 떠오른다.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우리의 삶 안에 엮어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이해한 만큼 우리의 삶의 태도와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나라고 한다면 말씀을 읽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날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서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탄생한다.


이런 첨예한 논쟁의 시작에 불을 지핀다. 요즘들어서 극우화현상이 심해지는 가운데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나라를 접근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욱이 역사적 예수 논쟁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문화가 만나는 지점들을 찾아가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주위에 극우화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역사속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하나님나라 논쟁에 대해서 계속 깊이 있게 공부하고 파고들어야 겠다. 고수는 종합하고 하수는 절충한다. 프로는 세상이 놀이터이지만 아마추어에게는 전쟁터가 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다시 한번 돌아가보자. 다음달부터는 논쟁적인 신학자인 한스큉으로 8주간을 시작한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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