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gar encyclopedia 백과사전 29장 '토착지식과 과학체계
이번 내용은『Elgar encyclopedia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Edward Elgar Publishing (2024)의 29장. <Indigenous knowledge traditions and science> written by Helen Verran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STS 스터디에서 발제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오늘 알아볼 연구는 원주민 지식과 서구 과학이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관계에 주목한다. 기존의 연구들이 두 지식 체계를 분리된 범주로 보거나, 원주민 지식을 과학의 보조적 수단으로 다루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우리는 페루 루나쿠나족의 '수행적 아카이브', 캐나다 이누족의 '아티쿠' 개념, 그리고 대만 의료 시스템에서의 지식 혼종성과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지식이 단순히 객관적인 데이터나 이론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과 가치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실천이자 윤리적 관계 맺기임을 밝힐 것이다.
이 연구는 다양한 사례 분석을 통해 지식의 생산과 활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와 인식론적 차이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어떻게 협력하고 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STS의 이러한 연구는 과학기술학 분야의 지평을 넓히고, 다원적 지식 체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접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과학기술학의 범주는 계속해서 넓어지면서 '모든 것을 해석'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후발주자였던 STS가 모든 영역에서 결국은 왕좌에 앉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새로운 해석들을 혁신적으로 발견하니깐 말이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하나 백과사전의 주요 내용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토착지식과의 만남을 알아보자.
Elgar encyclopedia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2024)는 과학기술학(STS) 분야의 핵심 프레임워크와 최신 연구 동향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이다. 90여 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총 60여 개의 항목을 다루고 있으며, 이 책은 STS의 지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 궤적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 내용이다. 이 책은 과학기술학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고, 학제 간 연구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함으로써 이 분야의 학문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핵심 프레임워크 및 개념
이 백과사전은 과학기술학의 다양한 학문적 접근 방식을 다루는 데 중점을 둔다. 특히,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문화적 맥락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이론적 도구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공동생산(Co-production): 과학적 지식이 사회적 질서와 분리될 수 없으며, 상호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인간 행위자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기술, 사물)까지 포함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기술이 어떻게 안정화되는지 설명한다.
사회적 구성주의(SCOT): 기술의 의미가 사회 집단에 의해 해석되고 협상되는 과정을 분석하며, 기술 결정론에 도전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지식의 인프라: 지식이 생산되고 전파되는 기반 시설과 그 역할을 탐구한다.
여성과학기술학(Feminist STS): 젠더가 기술 설계, 생산, 사용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다룬다.
탈식민주의 STS: 서구 중심적인 지식 생산 방식을 비판하고, 비서구 지역의 지식과 기술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주요 주제 및 방법론
이 책은 전통적인 STS 연구 주제를 넘어, 새로운 연구 방법론과 사회적 이슈를 깊이 있게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공공 참여 및 커뮤니케이션: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중의 참여와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분석한다. 특히, **시민 과학(Citizen science)**의 사례를 통해 전문가와 비전문가 간의 지식 경계가 어떻게 모호해지는지 보여준다.
논쟁 연구: 논쟁이 과학적 사실을 확립하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석한다.
연구실 연구(Laboratory studies): 과학적 사실이 연구실 내의 실제적 실천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탐구한다.
디지털 방법론: 빅 데이터, 알고리즘, 인공지능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 STS 연구에 어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지 설명하고, 디지털 흔적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을 포함한다.
원주민 지식 전통과 과학: 서구 과학과 다른 지식 체계인 원주민 지식을 존중하고, 과학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한다.
과학기술학의 확장된 영역
백과사전은 STS의 분석 대상이 전통적인 과학기술 영역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료 및 생명과학: 디지털 건강, 보건 및 생의학에서의 지식 정치, 돌봄(care)의 역할 등을 다룬다.
공학 연구: 공학 설계 및 기술 실천이 사회적 가치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한다.
과학 정책: 과학 기술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전문 지식, 규제 과학, 과학 자문의 역할을 다룬다.
경제 및 시장: 금융, 평가, 자산화가 기술과 시장의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1. 토착지식과 과학의 관계
'토착 지식'과 '과학'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식의 본질적 동일성'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품어왔다.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자들은 모든 지식이 보편적 원리를 공유한다고 보았으나, 과학기술학(STS)은 이러한 관점을 비판하며 지식이 특정 상황과 조건에서 구성되는 사회적 실천임을 강조한다. STS는 지식의 우열을 가리는 대신, 서로 다른 지식이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하고 전달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글은 헬렌 베런의 '엘가 과학기술학 백과사전' 29장을 바탕으로, 지식의 복수성(plurality)과 관계성(relationality)에 초점을 맞추어 토착 지식과 과학의 만남을 탐구한다. 두 지식 체계는 단순히 정보의 차이를 넘어, 대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근본적인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지식이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 자체로 권력, 문화, 정체성과 깊이 얽혀 있음을 의미한다.
본문은 아카이브, 지도, 약용 식물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토착 지식과 과학이 어떻게 충돌하고, 혼합되며, 때로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지식이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있는 실천이자 사람과 환경을 잇는 관계의 총체임을 보여준다. 각 사례는 지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하고,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는 세상을 위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기술학 즉 STS는 이렇게 기존의 지식체계에 과학적인 접근이 연결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깊게 고찰한다. 이런 방식의 접근으로 '세계 끝의 버섯'이나 '물기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나오게 된다.
아카이브: 과거의 현재화와 루나쿠나족의 수행적 아카이브
페루 안데스 지역의 루나쿠나족은 서구 사회의 ‘아카이브’ 개념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서구식 아카이브가 과거의 사건과 지식을 객관화하고, 책이나 데이터베이스에 박제하여 일정한 장소에 보관하는 정적인 행위라면, 루나쿠나족의 ‘수행적 아카이브’는 과거의 고통과 투쟁, 그리고 삶의 기억을 현재의 노래, 춤, 그리고 이야기에 끊임없이 재연하는 살아있는 실천이다.
이는 과거가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동과 신체 속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행위로서의 지식’임을 강조한다. 루나쿠나족에게 과거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살아있는 경험’이다.
이들의 아카이브는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저지른 학살의 기억을 담은 노래인 ‘마푸체 엘람’(Mapuche Elam)과 같이, 구전과 수행을 통해 세대를 거쳐 전해지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지식이 종이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카리부와 아티쿠: 존재론적 차이와 지식의 충돌
캐나다 이누족에게 ‘아티쿠’는 단순히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과 정체성이 투영된 ‘존재’이다. 이들에게 아티쿠는 인간과 상호 관계를 맺고, 인간의 행동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지는 ‘영적인 존재’이다.
이누족은 아티쿠를 사냥하기 전에 신에게 감사하고, 그들의 영혼을 존중하는 의식을 행한다. 반면, 환경 과학자들에게 ‘카리부 개체군’은 통계 모델로 분석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생물 자원’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개체 수를 측정하고,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이를 바탕으로 보호 및 관리 계획을 수립한다. 이 두 개념은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만, 그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적 지식이 ‘카리부를 개체군으로 존재하게’ 하고, 이누족의 지식은 ‘아티쿠를 세계관의 일부로 존재하게’ 한다. 이 사례는 지식의 충돌이 단순한 정보의 차이를 넘어, 대상을 ‘어떻게 존재하게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차이’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임상 의학: 지식의 혼종성과 새로운 실천의 창출
대만의 의료기관은 한의학(전체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신체)과 서구의 생체의학(부분적이고 환원적인 신체)이 만나는 ‘혼종적 공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의학이 혈압계, X-ray, MRI와 같은 서구 과학 기술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식 체계 속에 능동적으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의사는 환자의 맥을 짚고 혀를 관찰하는 전통적인 진단법 외에, 현대적인 진단 장비를 활용하여 환자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전통적인 한의학 이론에 통합하여 진단과 치료에 활용한다.
이러한 혼종성은 ‘유연한 인식론’에서 비롯된다. 한의학은 외부의 지식을 배척하기보다 자신의 프레임워크 안에 흡수하고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이러한 실용적 혼종성은 두 지식이 단순히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새로운 임상 실천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코로나와 집단 웰빙: 위기 상황에서의 복합적 지식 실천
호주 원주민 욜른구 부족은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며 현대의 생체의학적 지식과 자신들의 전통 지식을 모두 활용했다. 이들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지식은 없다’는 인식 아래, 바이러스의 확산 경로와 예방법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부족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보건 문제를 해결했다.
예를 들어, 사회적 거리두기는 부족의 전통적인 가족 및 공동체 구성원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또한, 욜른구의 전통적인 노래와 이야기는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복합적 접근법은 위기 상황에서 지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양한 인식론이 협력하여 가장 실용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토지 관리와 불: 의례적 실천과 도구적 개입
호주 원주민 욜른구에게 ‘워크(Worrk)’는 단순히 불을 놓는 행위가 아니라, 땅과 조상, 그리고 공동체와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의례적 실천’이다. 이들에게 불은 땅을 정화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성한 도구로 여겨진다.
반면, 환경 과학자들에게 ‘계획 화재(prescribed burn)’는 생태계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적 개입’이다. 과학자들은 불의 강도, 확산 속도, 면적 등을 통제하여 산불 위험을 낮추고 생물 다양성을 관리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 두 행위는 겉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그 목적과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자들은 불을 도구로 사용하며 예측 가능한 결과를 추구하지만, 욜른구에게 불은 땅에 대한 존중과 보살핌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이는 대대로 전해져 온 구전 지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지도: 공간을 구성하는 다중적 지식
지도는 ‘공간이 지식을 구성하고, 지식이 공간을 구성하는’ 상호작용의 훌륭한 사례이다. 원주민 항해술 전문가 투파이아가 고안한 ‘번역 지도’는 제임스 쿡 선장의 서구 과학 기반 지도(정확한 측정과 좌표 중심)와 자신의 내러티브 기반 지식(경험, 이야기, 관계 중심)을 결합한 것이다.
투파이아의 지도는 섬과 해류, 바람의 패턴을 이야기와 그림으로 표현하여, 쿡 선장의 지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이해하고 항해할 수 있게 했다.
혼합 지도는 지식이 단일하고 보편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인식론적 배경을 통해 다르게 구성되고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와 관계가 담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약용 식물: 인식론적 지움의 복원과 윤리적 실천
남아프리카의 약용 식물 ‘칸나’에 대한 연구는 서구 과학이 식민주의 역사 속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토착민의 지식을 복원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인식론적 지움(epistemic erasures)이란, 서구 과학이 다른 지식 체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삭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식물학자, 인류학자, 그리고 칸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산족(San people) 공동체가 협력하여 칸나의 약효에 대한 토착 지식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이를 통해 과거 식민주의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화해의 작업이다.
이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넘어, 지식 생산 과정에서 누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권력 관계를 재조정하고, 다양한 지식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숫자들: 개념의 연결과 변형을 통한 지식의 진화
나이지리아의 한 교실에서 요루바어 기반의 숫자 개념과 현대 과학의 숫자 개념이 만나 충돌하고 연결된다.
요루바어의 숫자 체계는 20진법을 기반으로 하며, 덧셈과 뺄셈을 활용하는 독특한 계산 방식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25는 ‘30에서 5를 뺀 값’으로 표현된다.
이는 현대적인 10진법과 맞지 않아 서구 교육 시스템에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교사는 두 가지 개념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을 고안했다.
교사는 요루바의 숫자 개념을 존중하면서, 현대 숫자를 병행 학습하도록 유도하여 학생들이 두 체계를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사례는 지식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결과 변형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교육적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어와 루오세: 가동성과 고정성을 통한 지식의 정치적 유효성
노르웨이의 사미족과 환경 과학자들은 모두 ‘연어’(사미족에게는 ‘루오세’)를 보살핀다는 공통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사미 의회에서 이들의 지식은 다른 정치적 유효성을 보인다. 과학 지식은 논문, 데이터, 통계 등 명확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가동성이 높아 쉽게 전달되고 정책 결정에 활용된다.
반면, 사미족의 지식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구전 이야기, 특정 장소의 물결과 바람에 대한 경험,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 속에 고정되어 있다.
이는 지식의 형태가 그 정치적 유효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지식이 얼마나 잘 ‘이동’하고 ‘표준화’될 수 있는지가 정책적 영향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돌 이야기: 관계 엮기와 화해의 정치적 작업
사미족에게 ‘시에이디디’라는 돌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고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시에이디디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현대의 토지 개발 사업에 반대하며, 여행자들에게 돌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과거 식민의 고통을 현재로 불러낸다.
이 행위는 지식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땅 사이의 관계를 ‘엮는(relation-weaving)’ 행위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이야기 엮기’는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 저항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화해의 순간을 창출하는 정치적 작업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주로 과학기술학(STS)과 인식론(Epistemology)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지식의 사회적 구성론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이 핵심적인 이론적 틀이 존재한다. 토착지식과 과학체계는 서로 다른 인식론과 실천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이 둘의 만남은 갈등, 혼합,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형성으로 나타난다. 두 지식 체계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며 공존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주요한 이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식의 사회적 구성론 (Social Construction of Knowledge)
지식의 사회적 구성론은 지식이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특정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과학적 사실 또한 과학자 공동체의 합의, 실험 방식, 정치적 이해관계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토착지식 역시 그 사회의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토착지식과 과학체계는 각각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지식이기 때문에 그 형태와 본질이 다를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지식을 인간 행위자(과학자, 부족 구성원)와 비인간 행위자(기술, 돌, 동물, 문서)가 얽혀 있는 네트워크의 산물로 본다. 지식은 이 네트워크 안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변형되고, 유통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토착지식은 특정 장소(돌, 땅)와 사람들의 관계(이야기, 의례)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결과물이며, 과학지식은 실험실, 논문, 기계장치 등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네트워크의 결과물이다. 두 네트워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식의 형태도 다르게 나타난다.
ANT는 지식이 특정 장소에 '고정'되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되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지식의 가동성(mobility)과 정치성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하이브리드 인식론 (Hybrid Epistemologies)
이 관점은 토착지식과 과학체계가 서로 충돌하고 병립하는 것을 넘어, 섞이고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이는 두 가지 인식론적 전통이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하는 '하이브리드(혼종)' 지식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한의학과 생체의학이 공존하는 임상 현장이나, 토착 지식과 환경 과학이 결합된 토지 관리 정책은 이러한 하이브리드 인식론의 실제 사례이다.
이러한 이론적 틀은 서로 다른 지식 체계의 경계를 허물고, 복수적인 지식이 함께 존재하며 새로운 해결책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토착지식과 과학체계가 만나는 현상은 지식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만남은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넘어, 두 지식 체계의 존재론적 차이, 가치 체계, 그리고 권력 관계를 드러낸다. 과학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반면, 토착지식은 특정 장소, 관계, 그리고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이 두 지식 체계가 상호작용할 때, 때로는 충돌하지만, 때로는 서로 보완하며 새로운 형태의 혼종적 지식과 실천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는 지식의 생산과 활용이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는 행위를 넘어, 윤리적 관계 맺기이자 사회적, 정치적 과정임을 시사한다. 이처럼 토착지식과 과학의 만남은 지식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협력하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지식의 충돌과 정치
토착지식과 과학체계가 만날 때, 종종 지식의 권력 불균형이 드러나기도 한다. 과학 지식은 그 보편성과 명확성 덕분에 국가 정책이나 공적 논의의 장에서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 사미족의 연어에 대한 지식은 그들의 삶과 직결된 중요한 내용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과학자들의 명확하고 통계적인 데이터에 밀려 쉽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는 지식의 형태 자체가 정치적 유효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지식의 혼합과 공존
충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지식 체계가 결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기도 한다.
대만의 의료기관에서 한의학(전체적인, 유기적 신체)과 생체의학(부분적인, 환원적 신체)이 공존하는 것처럼, 두 지식 체계는 서로의 장점을 취하며 새로운 실천을 만들어낸다. 한의학이 X-ray나 혈압계 같은 서구 과학 기술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호주 원주민인 욜른구 부족이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며 현대 의학과 그들의 전통 지식을 결합해 보건 관리를 수행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관계로서의 지식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을 잇는 '관계'라는 점이다. 남아프리카 약용 식물 '칸나'에 대한 연구는 식물학자, 화학자, 인류학자가 협력하여 서구 과학이 배제했던 토착 지식을 복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지식을 통해 식민주의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다양한 지식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관계를 재구축하는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
또한, 사미족이 여행자들에게 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는 지식을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 사람과 땅을 잇는 관계를 '엮어내는(relation-weaving)' 중요한 실천이 된다.
앞서 살펴본 모든 사례들은 지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게 한다. 지식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복수적인 존재이다. 또한 지식은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환경과 깊이 연결된 관계의 총체이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 지식의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토착 지식이 지닌 고유한 합리성과 가치를 재평가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토착 지식과 과학의 만남은 두 지식 체계의 우열을 가리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식론과 실천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STS는 이러한 만남의 역동성을 탐구함으로써 지식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조명한다. 이는 모든 형태의 지식이 동등하게 존중받고, 서로 소통하며,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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