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거기에서 나를 불렀다
어느시점이 지난 이후에는
아침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어제의 기억들을 떠올려야만
내가 왜 존재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연결고리가 끊어진 의식에선
나의 정체성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이야기했던
소크라테스의 말도 어느순간은 이해가 안되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연결이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불러주기를 원했다
가족이 있는 날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토요일 아침에는
더더욱 내가 누군지 분간이 안갔다
나는 왜 존재하는거지?
소외된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고립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문을 닫으면 외부의 어떤 소리도
모두 소음으로 치환되어 버리고
관계의 어떤 연결고리도
모두 자아로 돌려버리니까 말이다
모든 책임이 내면으로 돌아간 이상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고립이 생겼다
이 고립 안에서는
다른이를 부를 필요도 없기에
다른 이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평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갖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답답하고 우울했다
나 스스로가 자신에게
평가를 했고 무시했고
때론 사랑했다
스스로를 사랑했다
거울에 비친 나의모습에 만족하면서
다른 어떤 관계도 필요치 않을 때
나는 우울했고
공허했다
더군다나 이러한 공허함 속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온다는 예감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불러주는 이들에게서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나 역시 새로운 누군가를 부르며
지금의 연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담으면 담을 수록
관계는 더욱 굳건하게 이어져 갔다
내면의 음성이 들렸다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초월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태초부터 줄곳 물었다
"어디에 있느냐?"
나를 찾는 음성은 항상
사랑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사랑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그러나 자아가 내는 목소리는 사랑이 없었다
나르시스의 외침처럼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을 가득찬
메두사의 메아리였다
오디세우스처럼 집을 떠나서
모험의 여정을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노마드를 마무리짓게 하는 목소리는
내 안에 있는 초월자의
사랑의 부름이었다
"어디에있는냐?
함께 걷자!"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던 순간에도
초월자는 기다리고 있었고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초월자와 눈이 마주치면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음이 무너저 내렸다
때로는 집나간 탕자의 아버지처럼
가끔은 양떼들 가운데 선한목자처럼
다정하게 나를 불러 세우고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힘들때 부르면
내가 너와 함께 한다며 힘을 내라고 했다
내가 괴로울 때 부르면
내가 그 마음을 안다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가끔씩 정말 가끔씩 기쁠때 부르면
나보다도 더욱 난리브루스를 추었다
초월자의 뒷모습에서
나는 인생의 방향을 발견했다
그랬었다 나를 비추는 거울을 깨버리고
어떤 초대에 이끌려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도 나를 부르는 그 음성은
다정하고 사랑이 많은 그런 목소리이다
나의 마음은 어그러지고
찌푸둥해있어서 날마다 다른데
초월자의 음성은 항상 밝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문득, 떠오르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불렀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그 부름에서 다시 걸어간다
사랑을 받는 존재에서 시작해서
사랑을 하는 존재가 되어 가는 중이다
계속되어가는 중이다
멈춰서 정해져 버리지 않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