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둔 나 줍기
초등학교 시절,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다.
세 남매를 키우기 위해 일이 우선이던 집이었다.
나는 6학년, 여동생은 4학년, 남동생은 1학년이었다.
난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 평범한 아이였다.
그 시절 제일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엄마는 인근 대학 국문학과 교수였다.
외가 쪽 집안이 대대로 학자 집안이라고 들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를 잘했다.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던 보습학원이 아닌,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대형 학원에 다녔다.
입학시험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반 1,2등만 다니는 학원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여느 6학년 여자아이들처럼 놀았다.
주말이면 근처 시내에 버스를 타고 나가 돌아다녔고,
중학생 언니들이 하던 화장에 관심을 가졌다.
노래방에서 1시간, 2시간 서비스를 받다 보면 귀가가 늦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친구의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집이 맞벌이라 아이들만 두는 것이 걱정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들은 속 뜻을.
‘내 딸과 어울리기엔 네가 부족하다’는 말.
교수의 딸과 맞벌이 집안의 딸은 어울리는 급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수치심이 들었다.
친구는 공부도 잘했고 집안도 안정적이었다.
우리 집은 달랐다. 평범하고 여유가 없었다.
엄마, 아빠는 세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생계를 먼저 챙겨야 했고, 내 성적은 뒷순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교수 부모님이 나를 거부했다. 나는 수준 낮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 딸과 어울리지 마라'.라는 말은 곧 '너는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뜻처럼 들렸다.
나는 공부를 못했고, 그래서 공부 잘하는 친구와 어울릴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나는 부족한 아이였다.
나는 선택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부족하면 버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내가 더 뛰어났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어린아이는 비판적으로 생각할 힘이 없었다.
그때 겪은 사건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내 삶을 쥐고 흔들고 있다.
그 후 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고학력자, 학자 타입의 사람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공부만 하면 되는 사람들.
SNS로 소식을 전해 듣는 그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은 미국의 명문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다.
여전히 집안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면서.
나는 내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나를 차별했던 사람의 기준을 빌려, 그 잣대로 스스로를 찌르며 살아왔다.
그 기준은 오랜 시간 나를 소모시켰다.
항상 증명해야 했고, 항상 두려웠다.
나는 늘 ‘쓸모없는 사람’으로 증명될까 두려워했다.
그 친구는 순수하고 선한 아이였다.
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집이 정반대 방향이었는데도,
나와 더 함께 있고 싶다며 매번 우리 집 앞까지 같이 걸었다.
우리가 멀어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시간 때문이었을까, 너무 다른 환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른들이 만든 기준 때문이었을까.
과거와 화해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았다.
묵은 기억을 꺼내놓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오래된 기준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 고통은 현재에 있지 않았다.
과거가 계속 현재에서 재생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오랜 기간 나의 무가치함을 진짜라고 느끼며 살아왔다.
사실보다 내가 믿어온 '나'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자기혐오가 심리적 안전지대였다.
그래서 진실을 직면하는 일이 두려웠다.
대단한 회피형이었던 나는 이 지점까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과거와 화해하려면, 누군가는 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나를 흔들 권리는 없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버려진 나를 주워 드는 일부터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