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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앙마 Jan 23. 2024

어릴 때 나는 어떤 아이였나?

한 달 쓰기 챌린지 다섯째 날(2023.12.25의 기록)

#사십춘기, 나를 찾는 매일 글쓰기

#한 달 쓰기 챌린지

#어릴 때 나는 어떤 아이?


* 말 잘하는 아이 



  어릴 때 나는 태생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말이 트인 3살 무렵부터 동네에서 '똑순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부모님께선 그런 나를 보고 없는 형편에도 5세부터 유아원에 보내셨다. 사실 초중고 학창 시절에는 이렇다 할 사교육(초등학교 아니 사실 국민학교 시절에 피아노와 컴퓨터 학원을 잠시 다녀봤고, 중학교 때는 친구 따라 종합반을 2달쯤 다니다 그만뒀다가 외고 합격 후 합격한 다른 아이들과 팀 짜서 입학 전까지 1~2달 영어 과외를 받아본 게 전부다. 고등학교는 기숙사에서 살아서 사교육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다.)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내 인생에 유아 시절 조기 교육은 좀 의외다.


 아무튼 그렇게 간 유아원에서 매일 노래랑 춤을 배워와서 아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게 당시 최고의 인생 목표였던 것 같다. 그때 유아원에서 정말 잘 배워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요즘도 각종 교육기관에서 안전 교육 시간이면 어김없이 하는 '길을 잃었을 때 행동 요령'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후반 겨울, 당시 내 나이 5세였다.

이사를 하던 날이었는데, 아빠가 이사를 돕느라 오셨던 삼촌을 터미널까지 배웅하시는 길에 내가 따라나섰다. 삼촌은 나를 많이 귀여워하셨고 아마 어린 마음에도 삼촌이 계신 지금이 맛있는 간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슈퍼에 가서 과자를 얻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아빠는 삼촌 버스 시간이 늦을까 봐 조바심이 나셨고, 나한테 왔던 길을 따라 집에 가라고 말씀하시고 서둘러 삼촌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셨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어른인 아빠 생각에는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과자에만 한 눈이 팔려있던 5살 꼬맹이에게 그날 갓 이사 와서 처음 보는 낯선 길, 그것도 두 개로 나눠진 갈림길 앞에서 옳은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걸어도 집이 나오지 않았다. 큰 길이 나오고 많은 사람들과 건물들을 지나쳤다. 그러다 내가 누군가를 잡고 도움을 청했고, 경찰서에 앉아있다 아빠와 다시 만났다.


 내게 어렴풋이 남아있던 그날의 기억은 훗날 아빠를 통해 정확하게 밝혀졌다. 내가 잡은 어른은 법원에 다니는 서기관 아저씨였고, 내가 경찰서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고 한다. 섬뜩한 사실은 그 법원을 끝으론 집 한 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었다는 것이다. 겨울이라 날은 춥고 캄캄해서 만약 그때 내가 아저씨를 잡고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면, 난 혼자 계속 걷다 지쳐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착한 공무원이었으니 망정이지 나쁜 사람이었다면, 어느 쪽이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여하튼 없어진 딸을 계속 찾아 헤매다 안 되겠다 싶어 경찰서에 신고하러 온 아빠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됐다. 이게 다 본인의 탓이라며 5살 딸의 실종 신고를 하러 오던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다른 기억은 희미한데, 비둘기색 패딩을 입은 아빠가 자전거를 밀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시던 모습과 “네가 아빠 이름 잘 알고 똑똑하게 말 잘해서 아빠 찾은 거야,”라고 칭찬해 주시던 경찰 아저씨의 목소리 만은 30년이 훌쩍 지나고도 잊히지 않는다. 


 내 삶엔 이외에도 ‘말’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무궁무진하다. 초등 시절엔 내가 없는 교실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칭찬해 주시던 선생님이 계셨고, 성당에선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사회, 시 낭송, 연극까지 1인 3역을 도맡기도 했다. 말은 아니지만 입에서 나간다는 건 같아 선지 노래도 좋아해서, 6학년 때 할아버지 회갑 잔치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고 노래를 불러댔다가 어디서 돈 주고 부른 아이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중등 시절엔 자기소개를 그럴싸하게 했던 것이 눈에 띄어 과목 선생님들께 실장(지금의 회장) 감이라고 불렸고(실제로 실장도 계속), 나를 눈여겨보신 국어 선생님 추천으로 시민 회관이라는 큰 무대에 서서 시 낭송을 하기도 했다. 고등 때는 리더십 캠프에 추천받고 전교 부회장 선거에 나가는 친구의 참모 연설을 하기도 했다. 대학 땐 어쩌다 보니 학생회 지인들과 얕은 친분을 이유로 새터(새내기 배움터-신입생 환영회) 사회와 동아리 축제 사회를 보기도 했다.


 물론 다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 어디론가 숨고 싶었던 이불킥 각의 순간도 많았고, 지금 어디? 나는 누구? 를 혼자 수없이 반문해야 했던 때도 많았다.


 이놈의 주둥이! 사실 남의 말을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늘 내 이야기를 하는데;; 그 때문에 괜히 내 이야기를 많이 해서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던 때도 많았다.


 뭐, 어디까지나 위의 이야기는 다 어릴 적의 나다. 언제부턴 가 남 앞에 나서는 것도 너무 싫고 심지어 말도 좀 그만하고 살고 싶다. 실제로도 대학 시절에 했던 MBTI에서는 E였던 성향이 최근에는 I로 변했다. 아마 교사라는 직업이 늘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일이라 이제 많이 지친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흥미를 잃어가자 좋은 점이 생겼다. 원래도 듣는 것을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들으며 늘 내가 할 말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분산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자체에 충분히 집중하여 반응할 수 있게 됐다. 내 말을 더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없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음;;; 근데 피는 못 속인다고. 지금 우리 집에는 저체온증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서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도 떠들어 대서 "너는 입부터 살아 나는 구나?"라는 간호사님의 우스갯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을 많이 또 잘하는 아들이 있다. 과학 덕후라 자기가 알게 된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도 어찌나 좋아하는지 내 말 수가 줄어든 이유가 진짜 말하는 것이 싫어진 건지 아들한테 하도 말할 기회를 뺏기다 보니 그런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말하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고 해놓고 또 내 이야기만 한 바닥

#어릴 적 나는 어떤 아이? 2탄은 마이너스의 손? 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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