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 / G.D.H. 콜을 읽고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의 학대를 정당화할 때, 보통 이러한 역할을 한다.
'이 세상의 수고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며 천국의 것을 바라게 하여
고통이 더 할수록 보상받을 것은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고용주로서는 착취하면 할수록 공덕을 베푸는 셈이다."(p.22)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기독교의 노동관은 '노동자들이여, 고용주에게 주(하나님께)께 하듯 하라!'고 말한다.
다만, '고용주조차 하늘에 계신 고용주를 생각하라!'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하라. 당신들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다!)고 말한다.
여하튼, 1830~1840년대 위와 같은 상황에서 노동 계급 대부분은 협동조합에 대해 단순한 법인형태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해줄 도구로 생각했다. 천년 왕국을 열 '협동조합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은 고용주 간 무한 경쟁, 근로자 간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 근로자 간 무한 경쟁은 1) 농업에 종사하던 노동자의 도시 유입, 2) 저임금의 아동 노동자 때문이었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의 과잉공급과 저임금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 사업주는 사업주대로, 직물 시장이 커지며 앞다투어 공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영세기업들의 생산성은 떨어졌고, 인건비를 줄이지 않고서는 운영에 어려움을 타개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인간성을 거의 잃고 말았다.
- 뒷 얘기지만, 1855년 이전에는 주식회사라는 것이 없어서 공동으로 출자하여 회사를 만들지만 각 주주들은 무한책임을 져야했다. 그래서 사업주들은 필사적인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새우 등 터진 것은 노동자들의 몫. 1855년에 비로소 주식회사 설립 제한 철폐와 유한 책임이 희망하는 사람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물론 개 중에 공장법 제정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고용주가 나오기도 하고, 노동자와의 임금 교섭을 받아들이는 고용주가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성실한 인간성'이 작용하고 있던 게 아닐까. 여하튼 고용주들의 삶도 1페니라도 아껴서 공장을 증축하고 설비를 최신으로 교체하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생활 수준 향상은 뒷전으로 미루었다.
1844년 처음 생긴 로치데일협동조합은 이용 실적 배당에 따른 협동조합 자본의 착실한 축적으로 성장해갔다. 굶는 일이 많았던 영국 노동자들이지만, 협동조합은 운이 좋게도 산업과 고용이 좋았던 1844년부터 2년 간 호황이 이어졌고 곧이어 기아의 1840년대를 이겨낼 수 있었다.
당시엔 협동조합으로서 고민이 하나 있었다.
외상으로 손님들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다. 손님들 중 부를 쌓은 사람도 있었지만 도산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에게 신용 판매를 허용할 것인가. 만약 거절한다면 경기가 나쁠 때마다 신용 판매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몽땅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외상 판매를 하게 되면 신뢰도가 낮은 채무가 많이 생길 수 밖에 없고,(그들은 돈을 못 갚으면 그만인데, 조합 차원에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므로) 채무의 위험을 재빨리 메우기 위해 가격을 올리거나 불순물을 섞을 수 밖에 없었다.(p.36)
토미 숍, 트럭 숍(공장주가 공장 안에 매점이나 상점을 정해서 그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을 임금으로 제공하곤 했는데, 이 매점이나 상점을 말함.)보다 더 착취가 심한 외상 판매 상인들은 실제로 가격을 올리거나 불순물을 섞는 식으로 판매했다.
초기에 성공한 협동조합 대부분은 이러한 고민을 놓고, 단호히 외상 판매를 거절한다.
재무 안전성을 해치는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조합원을 붙잡아두기보다는 조합원을 잃어버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다만 기반이 튼튼하고 자본이 충분한 조합의 경우 조합원들의 출자금 인출은 허용했다.(물론, 이것도 재무 안전성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였다.) 사업이 커질수록 협동조합적 이상이 아닌 배당에만 관심을 갖는 조합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쨌든 로치데일은, 그리고 영국의 협동조합들은 기아의 1840년을 이겨냈다.
이는 상황이 훨씬 나아진 1850년대를 맞이하여 그들에게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