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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부리 Apr 26. 2021

상추야, 상추야

2021.04.26

밥과 고기를 많이 먹으란 말이다...


얼마전 집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다이소에서 파는 고기친구세트(적겨자+상추)를 2개 사서 베란다에 놓았다. 

유준이와 우재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놓고, 적겨자와 상추(청상추) 씨를 뿌린 뒤 나오기만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 싹이 나기 시작했다. 햇볕이 그리 잘 들지 않아 그런지 더뎠지만, 어쨌든 계속 싹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싹이 마치 잔디처럼 나기만 할 뿐 하늘을 향해 자랄 생각을 안했다.

초딩시절 집 화분에 강남콩을 키워 수확도 해봤고, 군복무 시절 대민지원 나가 모내기도 해본 '준농업인'인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싶었다. 

지난주...목요일인가(워낙 충격적인 날이라 요일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재택근무 중 점심을 먹고 상추를 자세히 살펴봤다. 딱 보니 문제가 보였다. 상추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내와 장모님이 상추싹들을 여러차레 솎아내기는 했지만, 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길쭉한 화분 하나에 상추 4개씩만 간격을 맞춰 남기고 싸~악~~뽑았다. 이제 상추가 쑥쑥 자랄 일만 남았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조금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신뢰를 주기 위해 약간 뻥도 쳤다. "아빠가 상추박사님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상추가 손바닥만하게 자라려면 몇개만 남기고 뽑아줘야 한대. 그래서 아빠가 좀 뽑았...." 아이들이 총알처럼 베란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미 눈에는 닭똥같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내 상추...다...이렇게...뽑으면.....어떻게...이게...뭐야...." 황급히 변명을 했지만 잘 먹혀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눈은...상추뽑은 아비가 아니라...키우던 강아지라를 잡아먹은 아비를 보는 듯 했다. 아내가 나서서 거들었지만, 잘 먹혀들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고, 또 어르고..달래고. 유튜브로 잘 자란 상추밭을 보여주고, 저렇게 자라려면 뽑아야 한다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 역시 유튜브는 최고의 콘텐츠다. 아이들이 조금 수긍하기 시작했다. "진짜 손바닥 만하게 자라냐"고 우재가 되물었다. 난 확신은 없었지만,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양치를 시키고, 책을 읽고, 아이들이 자면 이제 평화가 오겠지...하는 순간 유준이가 방에서 뛰어나와 베란다로 향했다. 우재도 뒤따라 나왔다. 유준이는 상추를 하나하나 살피더니 말했다. "우재는 2개씩 남겼는데 왜 내것은 하나만 남았어!!!?" 이런. 우재는 적겨자 2개, 상추 2개로 짝이 맞았는데, 유준이는 적겨자 3개, 상추 1개다. 간격에 너무 신경쓰다 보니 짝맞추기는 생각도 못했다. 일단 우겨보기로 했다. "유준이 것도 2개씩이야 잘 봐바. 3번째 것이 청상추야" 그때, 이럴 때마다 눈치없기로는 세계 최강인 우재가 한마디 한다. "아닌데, 내것은 두개 두개인데, 유준이는 3개 1개인데" 유준이가 또 울기 시작했다.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을 재운 뒤 오전에 상추싹을 버린 쓰레기봉투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상태가 좋지 않다. 그나마 떡잎 상태가 제일 좋아보이는 청상추 싹을 골라내어 유준이 화분에 심었다. 줄기가 꺾여있어 그나마 튼튼한 적격자에 기대어 놓았다...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잘 자라게 해주세요. ㅠ.ㅠ


상추를 손바닥만하게 키우려면 이 정도 간격은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아닌가??)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부활시킨 상추는 아직 죽지않았다. 그렇다고 꺾인 줄기가 펴지지도 않았다. 상추의 발육속도는 정말정말 느리다. 손바닥만한 상추를 베란다에서 보기 전에 코로나19가 먼저 소멸될지도 모르겠다. 

아주 다행인 것은...아이들은 이후 상추에 크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다. 벌써 까먹은 것인지, 다른 놀잇감이 생겨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안절부절하며 상추를 키우는 것은 온전히 아내와 나의 몫이 된 것이다. 그나마 재미라도 있는지, 아내는 고추모종을 사려고 검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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