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첫 승진이었다. 행정고시를 붙은 5급 사무관이 4급 서기관이 되기 위해선 강산이 한 번, 정권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필요했다. 중앙부처에서 4급 서기관의 의미는 상당했다. 서기관은 직원을 약 10명 정도 거느린 본부의 ‘과장’ 보직을 받았고, 유학이나 주재원 등 해외로 나갈 기회도 많았다. 사무관 시절이 본부에서 실무자로 구르며 씨를 뿌리는 시간이라면, 서기관 이상은 과실을 따는 시간이었다. 승진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발 빠른 사람들은 해외 문화원장으로 나갈 준비부터 하라고 조언했다. 요즘은 자기 돈을 써야 하는 유학보다, 현지의 사택이 지원되고 월급이 고스란히 내 통장에 쌓이는 문화원이 낫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유학도 문화원도 아닌 퇴직(의원면직)을 신청했다. 동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로또 맞았냐’며 속을 떠 보았지만,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사과(운영지원과) 조차 말이다. 재직 3년 미만의 저 연차 직원처럼, 조직 입장에서 특별히 관리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일까? 누군가는 ‘4급 한 명이 제 발로 나가면 5급 이하 승진인원(TO)은 얼마나 늘어나는지 아냐’며 대놓고 시시덕거렸다. 공직사회에서 30대 젊은 공무원의 퇴직은 ‘믿을 구석이 있냐’는 가십이나 ‘아직 세상을 모른다’는 조롱거리로 소비되었다.
퇴직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사건은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혹은 언론에서 보듯 정권 차원에서 시킨 위법 부당한 일에 환멸을 느끼거나, 나를 죽일 듯이 괴롭혔던 상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고시 공부 3년, 사무관 10년 등 도합 13년의 세월을 매몰비용으로 지불하고 제 발로 여기를 나가겠다고 생각한 건, 강산이 한 번 변하고 정권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공직사회의 다양한 헛짓거리를 경험하며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습득한 무기력 때문이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나 역시 바틀비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 말이다. 바틀비는 허번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에 등장하는 인물로,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잘하는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부터 업무 지시에 대해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을 반복하며 일을 거부한다. 마침내 어떤 의욕도 상실한 그는 연명을 거부하고 굶어 죽는다. 소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는 규율 사회의 무의미한 업무 안에서 아무런 의욕도 찾을 수 없는 사무직의 수동적인 저항을 의미한다고 본다.
공직사회는 역설로 가득 찬 곳이다. 복잡한 현실을 5분 만에 읽을 수 있는 한 장의 보고서로 이해하려 하고, 현장과 갈수록 멀어지면서도 술자리에서는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을 외친다. 입만 열면 적극행정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저 ‘존버’를 잘 한 순서대로 승진시키고, 국민의 공복을 자처하지만 그 누구보다 권력자에게 약하고 국민에게 강하다. 1급 공무원은 ‘관료사회의 꽃’으로 불리지만 정작 별 역할은 없는 ‘파킨슨의 법칙’의 산물이고, 공무원은 헌법에 의해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지만 그 어느 조직보다 정권과 여론에 휩쓸린 채 중심을 잡지 못한다. 정부세종청사의 외형은 수평과 연결의 이상을 담고 있지만 정작 내부의 구조는 직원 간의 토론과 소통에 무감한 큐비클(cubicle, 한 사람씩 들어가는 칸막이가 있는 작은 사무 공간)로 가득하고, 예산은 ‘국민의 혈세’라면서도 예산 규모를 전년도보다 늘리기만 하면 사업의 성과에 관계없이 칭찬받는다. 요컨대, 공직사회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바쁘기만 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사회의 문제를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포부로 빛나던 젊은 공무원들도 처음에는 현실에 실망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조직 논리에 길든다. 공직사회의 수많은 헛짓거리 때문에 진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행할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그저 세월을 버티기만 하면 정해진 승진과 적당한 명예가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료는 두 얼굴을 갖는다. 평소에는 공익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법과 제도가 준 권한과 직위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갑’의 얼굴을 하지만, 진짜 일을 해야 하는 때가 오면 정권, 국회, 여론의 뒤에 숨어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 ‘을’의 얼굴을 한다. 게다가 관료는 갑과 을의 얼굴을 오가며 1~2년만 버티면, 아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자리를 옮기고 승진을 한다. 과장 이상의 관리자는 1년, 사무관 이하의 실무자는 2년 꼴로 자리를 옮기는 순환보직의 은혜 덕분이다.
정무직 장차관은 1~2년이면 바뀌지만, 일반직 공무원은 30년 이상 한 분야에서 근무한다. 큰 방향은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임명되는 정무직에 따라 바뀌어도, 이를 보좌하고 수행하며 나아가 장기적인 시각을 갖춰 세밀한 정책을 다루는 주체는 전문성을 갖춘 기술관료(Technocrat)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지금의 공직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기술관료가 있는가? 관료들은 때론 억울함을 호소한다. 공직사회의 무능은 때로는 불법을 넘나드는 지시를 서슴없이 하는 집권 세력의 리더십 때문이라고 말이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정치 세력의 무능함과 뻔뻔함은 온 국민이 알고, 정권의 지시를 직접 받는 공무원 입장에선 ‘이래도 되나’ 싶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무관이 하는 일을 기준으로 정권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이 대체 얼마나 된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실무에서 정권의 영향력은 열 개 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공직사회의 다양한 헛짓거리와 거대한 무능을 온전히 정치의 탓으로 돌리는 건 비겁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맞지 않다.
한국의 주택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박철수 교수의 ⌜아파트⌟에서는 우리나라의 단지식 아파트를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표현한다. 단지 외부로는 높은 담을 치고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어 도시 공간에 무신경하지만, 단지 내는 모든 생활 편의시설 등을 갖추어 놓고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한국식 대단지 아파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표현이다. 나는 이 표현을 볼 때마다, 이보다 공직사회를 잘 묘사하는 문장은 없다고 생각한다. 공직사회는 바깥의 현장과 현실에는 무감하면서, 그 안에서는 온갖 종류의 헛짓거리와 승진, 유학, 주요 보직을 둔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이 책은 정권 차원의 비리를 고발하는 글도 아니고, 사무직의 괴로움이나 관료제의 따분함을 논하는 글도 아니다. 그저 공직사회의 무능한 일상과 좌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르포(Repo)에 가깝다.
자, 이제 당신을 내가 살던 공직사회라는 대단지 아파트로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