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뒤편에는 ‘한글가온길’이 있다. 금호아트홀과 한글학회 사잇길에서 시작하여 주시경집터를 지나, 세종문화회관으로 이어지는 위치다. 한글가온길은 관광 자원의 확대를 목적으로, 서울시가 세종대로 주변의 한글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조형물과 안내문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며 붙인 이름이다.
조형물은 한글가온길 곳곳에 있다. 여기가 한글가온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그맣거나, 일반적인 시선에서 찾기 어렵게 숨겨져 있지만 말이다. 조형물을 찾기 어려운 건 우연이 아니다. 거대한 조형물이 보행을 방해하고 시간이 지나 관리가 느슨해지면, 자칫 흉물로 변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일부러 작은 조형물을 곳곳에 숨겨놓듯 만들었다. 물론, 조형물을 구석구석에서 찾는 재미도 의도했다.
한글가온길에 대해 이토록 잘 아는 이유는, 수습 사무관 신분으로 서울시청에 지방연수를 나갔을 때 내가 맡았던 첫 번째 업무이기 때문이다. 예년의 지방연수는 한 달 정도 형식적으로 진행되어 지자체를 그저 방문하는데 의의를 두었지만, 내가 연수원에 있던 해에는 중앙부처에서 일할 수습 사무관들이 지방행정을 제대로 알고 공직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로 6개월간이나 지자체에서 실제로 근무하였다. 6개월은 긴 시간이다 보니 수습 사무관도 일정한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나는 서울시청에 소속되어 한글가온길의 홍보 및 관리 업무를 맡게 되었다.
지금도 한글가온길을 걸으면 10여 년 전 수습사무관 시절, 청춘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은 ‘런닝맨’ 촬영이다.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홍보를 위해 광장시장, 남산과 같은 유명 관광지와 한글가온길을 엮어 서울시에서 ‘런닝맨’ 측에 협찬하는 조건으로 촬영장소를 제공했다.
한글가온길에서의 런닝맨 촬영은 한겨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스태프와 출연진에 앞서 걸어 나가며 촬영의 동선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다. 한낮이 돼도 영상의 기온을 회복하지 못한 추운 날씨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여도 칼바람이 불 때마다 손과 발 끝이 얼어붙었지만 남산타워, 한양도성, 한글가온길 등 서울 도심의 복잡한 촬영 동선을 따라 택시를 잡아타고 하루종일 동분서주 하느라 추운 줄도 몰랐다. 수많은 사람의 고생 덕분에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광화문광장에서 촬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스태프들의 말에 의하면 그래도 그날은 촬영이 빨리 끝난 편이라고 했다.
촬영을 마치고는 삼겹살 회식을 했다. 한겨울 추위 때문에 저녁을 먹으면서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내게, 과장은 소맥을 섞어주며 '오늘 고생 끝에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연예인은 오디오가 비지 않기 위해선 촬영 중엔 어떤 말이든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반쯤은 농담인 대답을 했다. 하지만 매사에 진지한 과장은 나의 농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답했다.
“중앙 부처에 가서 뭔가를 지시할 때가 되면 오늘 일은 잊지 마. 아래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될까 생각을 하고 지시를 해.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시하면 아래에선 오늘 너처럼 개같이 구르는 거야.”
한겨울에 하루종일 고생하고 온 부하 직원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땐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대충 뜻을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소맥을 들이켰다. 고생 끝에 먹는 술은 역시 달았다.
수습 사무관이 끝나고 정식으로 공무원에 임용되고 나서도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이었다. 시작은 국장이 회의에서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이었다. 문체부가 스포츠산업을 진흥한다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하지만 정작 스포츠산업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형식의 홍보를 한 번 해보라는 지시였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은 국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너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할지를 정하는 순간만 잘 넘기면, 소관이 불분명한 가욋일은 맡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국장이 던진 불똥은 의례 그렇듯,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 가장 젊고 연차가 낮은 사무관인 내게로 튀었다.
국장이 던진 불똥을 어떻게 소화할지 골머리를 앓던 순간 떠오른 이름은, 올블랑(Allblanc)이었다. 올블랑은 잘생긴 남자 멤버들이 국내외 다양한 장소를 배경으로 일반인도 따라 할 수 있는 운동 콘텐츠를 올려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에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피트니스 전문 스타트업으로, 문체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지원 사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들은 흔쾌히 홍보 제안을 수락했다. 그것도 실비만 받고 말이다. 머리를 맞댄 고민 끝에, 문체부 사무실을 배경으로 직장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스트레칭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영상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올블랑 멤버와 문체부 직원들이 함께 출연하는 조건이었다.
촬영 디데이. 올블랑 멤버들이 촬영에 필요한 동작과 동선을 알려주었다. 하나의 동작이 15초에 불과하기 때문에 쉽게 끝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음악과 동작이 끝나는 지점을 정확히 맞춰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동작이 틀림이 없어야 해서 하나의 동작을 완성하는데만 해도 10여 차례 이상을 반복해야 했다.
촬영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운동으로 단련된 올블랑 멤버들과는 달리 나를 비롯한 저질 체력의 공무원들은 팔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했다. 멤버들은 영상이 잘 나오려면, 동작은 좀 망가져도 표정만은 끝까지 웃어야 한다고 조언하며 우리를 큰 소리로 격려했다. 아마추어들을 이끌고 나가려면 평소보다 힘들텐데도, 전혀 지치지 않는 프로의 모습이었다. 완성된 영상엔 시간이 갈수록 팔다리가 오징어처럼 휘어 버린 채로 입 끝만 간신히 웃는 공무원들과, 여유로운 모습의 멤버들이 교차되어 대조되는 모습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런닝맨과 올블랑. 몸은 좀 고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기억이었다. 일이 아니고서야 나 같은 일반인이 언제 유명 예능 프로그램과 몇 백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유튜브 촬영에 함께 해보겠는가.
하지만 정부가 의도한 홍보 효과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내가 한 일이지만, 나 스스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런닝맨부터 평가해 보자.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단순히 런닝맨의 촬영지라는 이유만으로 한글가온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과연 누가 얼마나 했을까. 예능 방송의 촬영지로 선택하기에 앞서, 소소한 조형물 위주의 한글가온길이 수억 원을 넘나드는 정부광고비를 들여 외국인에게 홍보할 관광 자원으로 적합 하기는 했던 것일까.
올블랑은 또 어떤가. 정부와 협업했음을 명시한 해당 영상은 족히 백만 회는 우습게 찍는 올블랑의 다른 영상보다 조회수부터 현격히 낮다. 역시 정부가 묻으면 흥행은 어렵다는 기존의 공식을 그대로 재현한 셈이다. 더군다나 청사를 배경으로 한 스트레칭 영상이 스포츠산업을 홍보하는데 최선의 방법인지, 혹은 스포츠산업 자체를 왜 정부에서 홍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나아가면 나조차 설득력 있는 답을 할 자신이 없다.
그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공무원 식의 답변 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 홍보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주말 오전, 지역 방송사의 광고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이미지 광고로 채워지고, 유튜브에는 각 부처 계정으로 재미가 없어 아무도 보지 않는 홍보 영상만 잔뜩 올라온다. 이러한 각종 정부광고에 소요되는 예산만 ‘22년 기준 약 1.2조 원. 문체부의 ‘22년 예산이 약 7조 원임을 감안할 때 어마어마한 수치다. 1.2조 원이 중앙 정부와 지차체의 광고 예산을 모두 포함하는 숫자임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정부광고 예산은 단순히 방송사 등에 협찬하는 금액의 합계일 뿐, 각 부처와 공공기관 대변인실 등에서 운영하는 조직 및 인력에 소요되는 경상비와 그 인력이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사업비는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따라서 정부가 홍보를 위해 사용하는 예산은 실제로 연 1.2조 원보다 훨씬 크다.
정부는 본질적으로 홍보나 광고가 불필요한 조직이다. 민간의 기업과는 달리 홍보로 인한 효과가 정부의 수입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과도한 홍보비 지출은 세금만 축내는 꼴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의 모든 홍보 업무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거나,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어 국민에게 홍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거나, 좋은 제도인데 국민들이 몰라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 등에는 정부의 홍보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기관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광고, 각종 사업의 연례적인 홍보, 심지어는 기관장의 인지도 올리기 등에 정부는 무분별하게 세금을 동원하고 있다. 그중 최악의 세금 낭비는 단연코 기관장 홍보이다. 여기저기 아무 데나 장관의 얼굴을 가져다 넣으면, 무조건 장땡이라는 식의 홍보 말이다. 실제로 각 중앙 부처의 유튜브 계정을 방문해 보시라. 장관이 주인공인 콘텐츠들이 처참한 조회 수를 자랑하며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부의 홍보 예산이 날이 갈수록 비대해진 이유는 다양하다. 정부광고로 공생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정부와 언론의 밀월관계, 국정의 실패가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치권력의 어긋난 인식, 세금으로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기관장의 도덕적 해이, 민간이 하면 그대로 따라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공직 사회의 풍토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문제다.
미래도 비관적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은, 대 언론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정부 광고를 확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기관 단위로 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기관장이 온들, 자신의 인지도를 올려주는 공짜 홍보를 마다할 리 없다. 그러니까, 이건 기본적으로 주인-대리인의 구조적 문제다. 주인(국민)의 세금으로 대리인(정부)이 빛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해결될 리 만무하다는 뜻이다. 최근의 긴축재정의 기조 아래에서도, 정부의 홍보 예산이 줄었다는 소식은 찾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런닝맨 촬영이 끝난 밤, 삼겹살과 소맥을 앞에 두고 과장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지를 쫓아다니는 건 본래 공무원의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공직을 이제 막 시작하는 수습 사무관에게 그런 일부터 시켜야 했던 선배로서의 미안한 마음이 소맥처럼 뒤섞여 있었겠지.
포털 한 귀퉁이에 모기 같이 귀찮게 따라붙어 x표시를 쉽게 찾을 수도 없는 정부지원사업 배너 광고가, 이제 나는 무척이나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