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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한동 Aug 13. 2024

케이와 K 사이

  A 장관은 관료 출신답게 업무에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보고를 들어간 간부들은 단단히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 없이 그에게 모두 깨지고 나왔다. 장관실 바깥을 지나기만 해도 호통 소리가 모두 들릴 정도로 매일 고성이 난무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A 장관이 보고를 받으며 가장 많이 지적한 사항은 보고서 내의 외국어 남용이었다. 아무 데나 ‘스마트’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우리말로 손쉽게 대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니즈’, ‘인프라’, ‘마스터플랜’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AI, AR, VR과 같이 우리말로 어떤 설명도 없는 알파벳 약자를 보고서에 사용하면 예외 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유어는 아니지만 외국에서 들여와 이미 자국어처럼 사용하여 대체되기 어려운 외래어라면 몰라도, 좀 유식해 보이거나 새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공문서에서 정체불명의 외국어를 남용하는 관료들의 태도를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과 ⌜국어기본법⌟에 따라 국어 사용을 촉진하고 발전의 기반을 마련할 의무를 지닌 문체부의 수장으로서 A 장관의 태도는 적절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직접 작성해야 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장관의 국어 사랑이 꽤나 부담이었다. 외국어를 다듬은 우리말 대체어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난관이었다. 용어의 정확한 뜻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병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보고서의 지면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거대 자료(빅데이터), 누리 소통 매체(소셜 미디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짧은 영상(숏폼)과 같은 단어들이다. 전체 분량으로는 한 장, 한 문단 기준으로는 두 줄 안에 보고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풀어내야 하는 ‘뺄셈의 미학’인 보고서 작성에서, 우리말 대체어와 외국어가 병기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지면의 압박은 그만큼 가중되었다. 


  사무관들은 내용을 덜어 낼 만큼 덜어냈는데도 도저히 보고서를 한 장으로 끝맺을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고육지책으로 글자 사이의 간격인 자간을 줄였다. 그 결과 보고서 위의 글자는 출퇴근 만원 버스에 밀려 탄 승객처럼 촘촘히 붙어, 읽기 불편할 지경에 이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의 효율성을 살리려 외국어만 썼다가는 장관의 불호령에 시달릴게 뻔했기 때문에, 글자가 좀 겹쳐 보이더라도 보고서의 미학을 포기하는 편이 백 번 나았다.

 

  세계 속의 한국의 대중문화를 나타내는 알파벳 ‘K’ 역시 처리하기 까다로운 존재였다. ‘K-컬처’, ‘K-콘텐츠’는 그나마 ‘신한류’라는 용어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그 하위 장르를 나타내는 ‘K-팝’, ‘K-드라마’ 등의 용어는 사실상 우리말로 대체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올바른 국어 사용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떡하니 알파벳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케이팝’ ‘케이드라마’로 쓰기도 하고, ‘케이(K) 팝’, ‘케이(K) 드라마’와 같이 한글과 알파벳을 병기하기도 했다.(케이팝은 ‘23년 12월 <표준국어대사전>에 추가되어 표준어가 되었음) 


  정부 사업 명칭에 알파벳 ‘K’가 붙어 있는 경우는 처리하기 한층 더 어려웠다. 예를 들어, 한국 출판물의 해외 수출 온라인 플랫폼인 ‘K-book’이나, 중소기업 제품에 공동 브랜드를 붙여 해외 판로를 개척하는 ‘브랜드 K’의 경우 이미 그 자체가 특정 사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다. 고유명사의 경우 한글이든 알파벳이든 그 명칭을 그대로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무자들은 장관의 한글 사랑이라는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춰 ‘온라인 수출 플랫폼(K-book)’, ‘브랜드 케이(K)’라는 식으로 최대한 알파벳을 덜 부각하는 방법을 택했다.




 


  시간이 지나 정권이 바뀌고 취임한 B 장관은 기자 출신이었다. 그는 평생 언어를 다룬 언론인 출신답게 말이 가진 힘을 강조했다. 정책이 국민의 뇌리에 남으려면 인상적인 하나의 단어, 한 줄의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에게는 올바른 국어의 사용보다는, 설사 외국어나 신조어라 할지라도 인상적인 단어의 사용이 우위에 있는 가치로 보였다. A 장관의 신념과는 반대였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간부들은 이번엔 평이한 표현 때문에 장관 앞에서 곤욕을 치렀다. 정책을 쉽게 알리기 위해서 그동안 쓰던 단어가 아닌, 보다 새롭고 신선한 표현을 찾으라는 것이 그의 지시였다.


  관료들은 이번에도 장관의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보고서나 보도자료에 ‘MZ’, ‘중꺾마’와 같이 유행하는 신조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알파벳 ‘A-B-C-D’의 앞자리를 딴 추진전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A는 ‘Attractive Asset’, B는 ‘Beyond the Boundary’, C는 ‘Cultural Care’, D는 ‘Dynamic Diffusion’. 누가 봐도 알파벳에 맞춰 급조해 낸 정체불명의 외국어이자 신조어로, 같은 부처의 공무원이 봐도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표현이었다. 그 외에도 ‘내수 활성화의 특급 엔진’이라든가 ‘수출 지형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와 같이 공무원들이 여간해서는 잘 쓰지 않는 과도한 표현까지 공문서에 속속 등장했다. 그야말로 언어의 범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이니셜 K의 남용이었다. B 장관이 K는 세계시장에서 프리미엄을 발휘하는 요술지팡이라고 했기 때문에, 관료들은 오만 군데에 이니셜 K를 붙였다. ‘K-관광’, ‘K-게임’, ‘K-뮤지컬’, ‘K-클래식’, ‘K-스포츠관광’, ‘K-공예’ 등 장르마다 K를 붙인 건 그나마 양반이었다. ‘K-씨름’, ‘K-도서관’, ‘K-희망사다리’처럼,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모를 신조어가 보도자료 제목으로 버젓이 등장했다. 급기야 ‘K-챗GPT’가 보도자료 제목으로 등장하자, 단어가 가진 조악함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K’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지나친 국뽕의 의미를 알면서도 정부가 아무 데나 마구 가져다 쓰는 것이 적절한지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국어의 발전과 계승의 책임을 맡은 대한민국 정부의 주무부처로서 신조어를 남발하는 일은 그 자체로 창피한 노릇이었다. 






  A 장관과 B 장관의 재임 시기는 채 2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A 장관이 있을 때 정부 지원 사업 명칭에 붙어 있는 ‘K’를 쓰기 조심스러워 ‘케이(K)’라고 쓰던 관료와, B 장관이 있을 때 ‘K-챗GPT’와 같은 정체불명의 신조어를 만드는 관료가 사실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에피소드는 장관의 성향을 무조건 따르는 지조 없는 관료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지만, 여기엔 그보다 더 깊은 함의가 있다.  


  문체부는 국어정책을 담당한다. 올바른 어문규범을 제정할 의무가 있지만 국어정책의 목표는 단순히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결국 궁극적인 목표는 바람직한 국어문화의 확산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국어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공문서 작성법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국어정책 주무부처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의식과 체계, 철학이 없다는 것이 사실은 진짜 문제의 핵심이다. 


  물론, 공직사회에 법과 문서상의 원칙은 언제나 있다. 최대한 표준어를 사용하고 외국어의 사용을 자제하며, 필요시에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은 표현을 쓰면 된다는 뻔한 답변 말이다. 하지만 이는 교과서적인 답변일 뿐 실무에서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 위의 예를 든 거대 자료(빅데이터), 누리 소통 매체(소셜 미디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짧은 영상(숏폼)처럼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은 표현만 사용했을 때 의미 전달이 왜곡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의 발전 속도에 따라 새로운 개념의 등장 속도가 빨라질수록, 다듬은 말로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 외국어 표현을 공문서에 쓸 일이 많아진다. 그래서 실무에서 진짜 중요한 건 법과 문서상의 원칙이 아니다. 어디까지 원칙을 고수하고, 어디서부터 정확한 의미 전달이라는 언어의 고유한 목적 달성을 위해 예외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관료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의 생각과 의식이 있어야 중심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공통의 철학이 부재한 공직사회는 케이와 K 사이에서, 장관의 무게 중심에 따라 극단으로 휩쓸렸다.


  뿐만이 아니다. ⌜국어기본법⌟에서 지정한 국어책임관은 보도자료가 언론에 배포되기 전에 국어 사용 전반에 대해 감수를 하지만, 장관의 성향에 따라 감수의 기준은 달랐다. 바람직한 국어문화를 위한 공문서 작성을 위해 만들어 둔 절차 역시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이는 결코 국어책임관을 맡고 있는 공무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한들, 장관의 성향을 눈치챈 간부들이 그 방향으로 일제히 질주하는데 일개 공무원이 혼자 어떻게 그 흐름을 막을 수 있겠는가. 공직사회의 구성원들이 뿌리 깊게 공감하는 공통의 생각과 의식 없이는, 아무리 그럴듯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낸들 결국은 애초에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공직사회는 왜 지조 없이 흔들리는가? 관료들은 정치의 외풍이 너무 세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행정의 사소한 행위까지 지배하며 공무원을 줄 세우기 하기 때문에 그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없는 척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애초에 공직사회에 영혼이 있는가? 앞서 예를 들었듯이, 국어정책에 대한 주무부처의 강고한 철학이 있었다면 부처 전체가 장관의 성향에 따라 케이와 K 사이를 극단적으로 왔다 갔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옳다고 믿는 영혼과 철학이 없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다른 부처의 다른 정책의 경우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직사회에는 변덕스러운 정치의 외풍을 걷어내면 직업 관료들이 본래의 유능함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화가 있다. 무능의 원인을 관료가 아니라 정무직과 집권세력에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신화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직업 관료의 순수한 영혼도, 유능함도 사실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와 집권세력은 관료를 때리며 국민에게 표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관료는 정치와 집권세력의 변덕을 탓하며, 자신의 무능과 철학의 부재를 교묘히 감춘다. 케이와 K 사이에서 휩쓸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읽어야 할 진짜 함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집권세력과 관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 관료는 순진한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능적 공범이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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