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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도화 Aug 20. 2024

호치키스를 잘 찍어야 출세하지만

  서비스산업을 획기적으로 진흥할 전략을 마련하겠다며 기획재정부가 여러 부처와 민간의 전문가를 모아 만든 민관 합동 기구의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차관이 헤드로 참석했기 때문에 회의 안건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무관들은 모두 세종에서 서울로 이동하여 배석했다. 다른 일도 바쁜데 회의까지 끌려와야 하는 신세라서 대부분 표정은 좋지 못했다. 


  배석한 사무관들은 이 회의의 끝을 알고 있었다. 민간의 전문가들이 현실성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견을 내던지면, 공무원들이 그 의견을 취합하여 기존에 하고 있던 사업을 덧대 그럴듯한 전략 계획으로 만드는 방식. 말만 민관합동일 뿐 결국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공무원식 보고서가 나와야 이 일이 끝난다는 의미였다. 기재부가 총대는 맸으나 총알은 관광, 콘텐츠, 물류, 보건, 의료 등 서비스산업 분야에서 각자 사업을 하는 다른 부처들이 마련해 줘야 하는 입장. 기재부에 시달릴 일이 눈에 선한 사무관들의 표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나는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일찍 도착하여 구석 자리를 선점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는 인기가 많은지 옆자리도 금세 누군가 차지했다. 간단한 목례만 나누고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먼저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살펴보니 그는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의 사무관. 초면의 어색함이 가시자마자 그는 ‘앞으로 연락드릴 일이 많을 것 같다’며 꽤 너스레를 떨었다. 나의 입장에서 그의 연락을 받을 일이 많다는 뜻은 기재부에 회의 안건으로 바쳐야 할 조공이 많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외모에서 유추할 수 있는 연배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는 나보다 몇 기수 후배로 보였지만, 갑의 위치에서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데는 나보다 훨씬 능해 보였다. 


  그래도 그는 공무원의 세계에서 비교적 ‘젠틀한 갑’이었다. 주말이나 밤늦게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일도 없었고, 회의 안건이나 보고서 내용을 다루는 데 있어 다른 부처 담당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서 있는 위치가 다른데 입장까지 같을 수는 없는 법. 민간 합동 회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때가 다가오자, 그는 보고서에 이런저런 내용이 담겨야 한다며 출처 불명의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사업 부처의 실무자 입장에선 당연히 볼멘소리가 나왔다. 기재부는 보고서만 발표하면 그만이지만, 뒷수습은 각 사업 부처가 해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구성원의 능력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기재부는 각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가 가져온 아이디어는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사업 부처 담당자 입장에선 설익은 의견이었다. 


  보고서를 정리하는 내내 기재부는 반영을 요구하고 사업 부처는 거절하는 피드백과 설득이 오갔다. 결론적으로 이 일은 기존에 하던 사업을 그럴듯하게 갈무리하는 수준에서 끝이 났다. 정부의 보도자료와 보고서엔 ‘혁신적으로 개편’, ‘속도감 있게 추진’ 등과 같은 의미 없는 말의 성찬이 펼쳐졌지만, 현실에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공무원들의 무의미한 고생으로 또 하나의 공무원식 보고서가 탄생했다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정부는 세상의 모든 분야를 씨줄과 날줄로 나누어 소관 부처와 담당자를 두고 있다. 언론 등을 통해 접하는 세상의 문제 뒤에는 그걸 담당하는 사무관이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정부에는 장바구니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한 ‘빵 서기관’, ‘과자 사무관’이 있을 정도이다. 권력이 공백을 허락하지 않듯 행정에서도 공백은 허락되지 않는다. 특정한 영역을 두고 부처 간의 소관 다툼이 벌어질 때도 있지만 대개 업무의 중복 때문에 싸우는. 것이지 공백이나 누락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편, 정부에는 특정 분야의 정책을 담당하지 않고 각 부처의 정책을 종합하거나 조정하는 역할만을 맡는 곳들도 있다. 국무조정실 그리고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의 일부 과들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들은 각 부처에 산재한 내용을 특정한 주제로 묶어 위에 보고하거나, 정책으로 발표하는 역할을 맡는다.


  공직사회에서는 다른 부처나 부서에서 하는 정책을 모아 보고 하는 일을 일컬어 ‘호치키스 행정’이라고 한다. 다른 부처의 일을 문서로 취합하여 보기 좋게 호치키스로만 찍는다는 의미니까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공직사회에선 호치키스를 찍는 자리에 있어야 승진도 잘하고 출세 하기에도 좋다. ‘말과(末課)의 설움’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부처 내부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 전체로 봐도 주로 호치키스 행정을 하는 기획재정부나 행정안전부와 같은 부처에 있어야 관료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공직사회에선 호치키스 행정을 하는 부처들이 ‘갑’인 경우가 많다. 국무조정실은 정부 업무평가와 규제 혁신, 기획재정부는 예산, 행정안전부는 조직을 담당하고 있어 일선 부처 입장에선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호치키스 행정’은, ‘전문성 없이 갑질을 하며 문서 취합만 잘해도 오히려 승진에 유리한 공직사회의 단면’을 비판하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항간의 부정적인 인식과는 달리 호치키스 행정이라고 해서 모두 불필요한 일은 아니다. 특히, 각 부처가 자신의 관할 영역에만 집착하는 ‘칸막이 행정’의 병폐를 막기 위해선 정부 내의 업무 조정 역할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키즈카페 안전관리의 경우 꼬마 기차 등의 유기시설은 문화체육관광부, 미끄럼틀 등 어린이 놀이기구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행정안전부, 환경 유해 물질은 환경부, 식음료 시설은 식품의약품안전처, 소방시설은. 소방청이 관할한다. 이용자는 키즈카페라는 단일 공간을 이용하는 데 반해 안전관리 책임은 기구별, 시설별로 파편화되어 있다. 단일 부처의 노력으로는 키즈카페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법상 의무를 준수해야 할 사업자도 어느 법과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지기 쉬운 구조이다. 이 경우 업무를 통합하거나 조정하는 것이 제일 좋고,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업무를 종합하는 역할이라도 누군가 맡아야 한다. 실제로 키즈카페의 경우 안전사고가 일어나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비판 여론이 일자, 지난 2018년부터 행정안전부를 중심으로 관계 부처가 ⌜키즈카페 안전관리 지침⌟을 매년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의 호치키스 행정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긴요한 역할을 한다.


  호치키스 행정은 정부 내에 딱 필요한 만큼만 존재해야 한다. 호치키스 행정이 과잉이면 불필요한 취합과 종합 업무가 늘어나 업무의 효율성이 전체적으로 떨어지고, 반대로 부족하면 업무의 조정이 원활하지 않아 칸막이 행정의 병폐가 커진다. 


  대한민국 정부 내에 호치키스 행정은 과잉일까, 부족일까? 당연히, 과잉이다. 각종 기관에서 촉박한 마감 기한을 주며 조금씩 양식만 바꿔 보내는 연락에 대응하다 보면, 어떨 때는 ‘대한민국 정부엔 실제로 자기 업무를 하는 사람보다 남의 업무를 취합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무의미한 회의만 반복하며, 그 회의 자체를 실적으로 여기는 일부 부처의 행태에는 그저 넌더리가 날 지경이다. 


  남의 업무를 종합하여 ‘호치키스를 찍는 일’도 사실은 만만치 않게 괴롭다. 각 부처에서 보낸 자료의 양식을 통일하여 보기 좋게 재구성하는 것은 꼬박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다른 부처 공무원들에게는 ‘안건을 구걸하러 다닌다’는 오명도 심심치 않게 듣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종류의 취합 업무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니, 그 속이 편할 리 없다.

 

  날이 갈수록 호치키스 행정은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정부의 업무를 더욱 세밀하게 평가하고 혁신을 주도하겠다며 신설하는 상위 기관의 각종 정책은, 사실 일선 부처 입장에선 호치키스 행정을 늘리겠다는 말에 불과하다. 청년 정책, 적극 행정 등의 도입은 새로운 정책으로 보이지만, 실상 내용은 기존에 하던 사업을 갈무리하는 수준에 불과한 전형적인 호치키스 행정이다. 최악은 각종 대통령 소속의 위원회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 등 특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 설치한 위원회는 사무국 내에 집행 기능은 없고 의제만 던지는 식으로 일을 하므로, 정말 말 그대로 호치키스만 찍는다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정부조직법⌟ 개편안도 호치키스 행정의 관점에서 보면 우려가 된다. 개편안의 핵심은 인구전략기획부의 신설. 인구부는 저출생 문제 등 인구 문제를 총괄 대응하기 위해, 저출생 예산 사전심의 권한과 각 부처에 걸쳐 있는 관련 정책 및 사업을 평가 조정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저출생, 고령사회, 인력, 외국인 등의 인구 부문에서 전략 기획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 사업과 집행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등이 맡을 예정이라는 점에서 말이 좋아 전략 기획 기능이지, 각종 대통령 소속 위원회가 그랬듯 전형적인 호치키스 행정으로 귀결될 소지가 엿보인다.







 모두가 괴롭고 현실에서 쓸데는 없는 호치키스 행정은 줄어들기는커녕 왜 늘어나기만 할까? 근본적인 이유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도외시하고, 그저 ‘손에 잡히는’ 간단한 보고서로 세상의 문제를 파악하려는 공직사회의 태만함 때문이다. ‘호치키스를 찍는 자리에 있어야 승진한다’는 오래된 경험칙도 무시할 수 없다. 괴롭고 힘들어도 호치키스 찍는 자리가 아무래도 낫다고 생각하니, 호치키스 행정은 줄어들리 없다.  


  정권의 입장에서 호치키스 행정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빌미로 자리를 늘리는 좋은 수단이다. 저출생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인구부를 만들고, 청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년정책조정위원회를 만드는 식이다. 골치 아픈 실무는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듯한 의제만 취합해서 일선 부처에 던지면 되기 때문에, 정권에 줄 댄 인사들에게 나눠주기엔 안성맞춤인 자리이다.  


  한편, 키즈카페의 예시에서 보듯이 정부에 정말로 필요한 호치키스 행정은 ‘칸막이 행정’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의 조정이다.  ⌜정부조직법⌟에 따르면 각 중앙행정기관을 지휘, 감독하고 정책을 조정하는 업무는 본래 국무조정실의 몫이다. 하지만 ‘방탄 총리’ 라는 오명을 안고 있을 정도로 실권이 약한 국무총리 산하의 조직인 국무조정실은 정책을 조정할 리더십도, 실권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무조정실에서 근무하는 많은 공무원이 다른 부처에서 파견 나온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조직의 역량을 배양하는 데 있어 약점으로 작용한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실질적으로 부처 간 정책을 조정할 수 있는 곳은 대통령실(청와대)이 유일하다. 그곳에 모든 권력과 권한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실질적으로 정책을 조정할 능력이 있을까? 각 부처에서 ‘늘공’(늘 공무원)을 파견받기는 하지만 대선에 공을 세운 정치인 출신의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중심인 대통령실에서, 실무를 속속들이 알아도 어려운 정책 조정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대통령의 참모 조직에 불과한 대통령실이 법상 권한을 가진 계선 기관인 행정 부처를 대상으로 우월적 지위에서 업무를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행정학의 오래된 논쟁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한국판 뉴딜, 역동경제.. 정권에 따라 공무원들이 대동소이한 내용의 사업을 표지만 갈아 끼워 만든, 대표적인 호치키스 행정의 이름들이다. 정권에 따라 호치키스 좀 다르게 찍었다고 국민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이미 존재하는 개별 정책과 사업을 이름만 바꿔 종합한 것에 불과하니, 당연히 변화가 있었을 리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다. 공직사회에 대입하면, 아무리 개별 정책과 사업이 좋아도 하나의 주제로 기획을 잘해야 빛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실에 꿰기 전에 좋은 구슬부터 만들 궁리를 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좋은 장신구의 본질은 꿰는 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 좋은 구슬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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