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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한동 Sep 03. 2024

사무관은 이름이 없다

  행정고시를 붙고 수습 사무관 시절을 보낸 과천의 중앙공무원교육원은 최악이었다. 사당부터 남태령 고개까지 이어지는 끝 모를 교통체증도 별로였고, 고시 합격이 평생의 가장 큰 자부심으로 남을 것 같던 자의식이 과한 동기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역은 300명이 모여 대강당에서 듣는 강의식 교육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공직자의 윤리’, ‘보고서 잘 쓰는 법’ 같은 따분한 교육이 이어졌고, 강사들은 여느 공무원 교육이 그렇듯 별 열의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교육생이 자리에 앉아 졸기에 바빴는데, 가끔 해당 교육과정을 담당하던 공무원은 ‘국가의 세금으로 받는 교육이니 성실하게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직무유기’라는 식의 유치한 웅변을 수업 전후로 길게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졸 수밖에 없는 강의를 구성한 본인이 직무유기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모든 강의가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감명 깊게는 아니더라도 졸지 않고 버텨 끝까지 경청했던 강의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당시 문체부 장관의 특강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차관으로 공직에서 퇴직해 보니 그동안 ‘나’라는 자연인이 아니라 내 뒤에 붙던 직급과 기관을 향해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음을 깨달았다. 당신네도 임용이 돼서 각 부처 사무관이 되면 정수리까지 보이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속지 말고 겸손해지시라, 그 인사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뒤의 직급과 기관에 향해있으니’라는 내용이었다. 젊은 나이에 고시를 붙었다는 사실만으로 대부분 자신과 자신의 성과를 과하게 평가하는 수습 사무관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시기적절한 조언이었다. 그런 조언조차,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오독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6개월 후, 과천의 연수원을 떠나 수습 딱지를 떼고 정식 사무관으로 임용되었다. 특강의 내용처럼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니 담당 사무관인 나와 잘 지내려 먼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협회, 공공기관 등 업무 유관 단체, 정부 용역을 주로 하는 교수, 보조사업을 노리는 지자체 공무원 등 수많은 관계의 사람들이 기꺼이 내게 먼저 명함과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호의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나의 직급과 기관으로 향해 있다는 건 명확히 느껴졌다. 사회생활이 아니라면 말 한 번 섞지 않을 만큼 나와 다른 유형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인사가 ‘나’라는 자연인을 향한 게 아니더라도 억울할 건 없었다. 대외적으로 공무원은 기관의 일원으로 남을 상대하니까. 그리고 사실 나도, 소위 ‘갑’에게는 기관과 직급을 보고 머리를 숙였으니 말이다.







  사무관의 모든 행위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기관이나 기관장의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래서일까. 서로 다른 성격과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이 초안을 작성하지만, 정부 보고서는 한 사람이 작성한 것처럼 똑같은 결을 유지한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결재 라인의 수많은 상사가 정책 방향에 대한 코멘트부터 조사나 단어(사용과 이용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사소한 지적까지 끝없는 피드백을 하므로, 사무관이 처음 작성할 때 녹여 내고 싶던 개성과 생각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결국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표준적인 정부 보고서’가 완성된다. 그나마 개개인의 글발이 중요할 것 같은 보도자료 역시 마찬가지다. 초안은 사무관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대변인실의 검토를 거치고 나면 놀랍게도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내용과 문체가 통일된다. 보도자료는 정부 자료로는 이례적으로 문서의 상단에 과장과 사무관의 이름 및 전화번호가 기재된다. 하지만 이는 보도자료가 공무원 개인의 성과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히 기자에게 보도자료에 대한 의문 사항을 신속히 물어 볼 수 있는 연락처를 주기 위한 목적이다.


  공무원이 제각기 다른 자기 생각을 외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공무원은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 아니므로 당연히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월급쟁이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으면 사업을 하거나 최소한 전문직이라도 해야 했다’라는 자조나 힐난도 뭐, 일부는 타당하다. 하지만 개개인이 지워진 조직의 진짜 문제는 ‘까라면 까는’ 문화를 시작부터 거부감없이 체득한다는 점이다. 하위직은 어차피 지시에 개겨봐야 변할 것 없다는 생각에 일이라도 줄여 볼 심산으로, 그리고 고위직은 권력을 가진 누군가에 기대 빠른 승진과 출세를 기대해 볼 요량으로. 이유야 직급별로 다르지만, 결국 체득하는 문화는 같다.


  그 결과 정책에 대한 상하 간의 토론은 없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줄도 모를 일방적 지시만 하달된다. 아래에서는 그 지시나 방향에 대한 합목적성이나 합리성은 따져 볼 겨를과 의지도 없이 지시 방향에 맞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정부에서 까라면 까는 문화가 왜 위험한지는 굳이 나치의 아이히만이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라는 예를 들지 않아도 되겠지. 처음에는 알음알음 동기들끼리 불만도 나눴으나, 연차가 쌓인 후에는 모두 순응해 버린 보고서 기계들이 되어 있을 뿐이다. 조직 논리에 젖어 든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건가.


  그래서 사무관은 이름이 없다. 대외적으로 이름이 없는 건 괜찮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조차 이름이 없는 건 좀 슬프다. 술자리에서 가끔 직급 높은 양반들이 젊은 시절 일한 자신의 무용담을 펼치며 젊은 사무관이라면 패기 있고 당당하게, 창의적으로 일하라고 할 때가 있다. 차마 말로 못 했어도 우리는 안다. 그게 한 번도 자기 이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진한 푸념이라는 걸, 직급이 아무리 올라간들 우린 여기에서 모두 이름 없이 사라질 거라는 걸, 부디 운이 좋아 아이히만이 아니라 그저 공무원 A로 퇴직하기를 바란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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