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았던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힘들었던 기억들도 마찬가지.
아직 내 기억속에, 일기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보려고 한다.
2012년 11월 항공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교육은 힘들었지만 천사같은 동기 친구와 언니, 배치메이트들이 있어서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입사 후 1년 동안은 내 세상이었다. 집에 매달 생활비를 보냈지만, 생활비를 보내고 남은 돈도 나에겐 풍족했다. 먹고 싶은거 다 먹어보고,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사파리투어, 기념품도 사보고, 휴가 때 마다 한보따리씩 선물을 지고 가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쁨들도 누릴 수 있었다. 언제 내가 돈을 쓸 때 행복한지, 약간의 후회가 남는 소비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그 흥청망청 1년이 없었더라면 앞으로 살아갈 고민을 할 시기가 더 늦게 왔을 지도 모르겠다.
1년이 지나고, 집에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저금을 잘 한 친구들은 수중에 돈 천만원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결혼을 하기 위해 자금을 모은다고 하고, 생각해오던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건 여자 조종사들이었다. 수직적이지 않은 회사 분위기와, 나보다 연한 화장에, 잔머리도 정리되지 않았지만 유니폼을 입은 그녀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분함,진지함, 프로페셔널함에 반했다. 그리고 내가 나이가 들어도 오랫동안 비행기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종사'. 되고 싶었다.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람들이 조종사가 되는 과정,
외국에서 조종사가 되는 과정
그리고 가장 궁금한 것은 "내가 비행기를 모는 것을 좋아하는 지" 였다.
2014년 1월, 비행에서 정말 좋은 부기장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를 만났다. 아낌없는 조언을 해 주었다. 친구가 그랬다. 휴가 때 어디든 가서 비행기를 한 번 몰아보라고. 그러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같이 비행을 했던 부사무장이 조종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부사무장에게 물었다.
"나 네가 공부하는 학교에서 비행기 몰아보고 싶어. 학교에 미리 연락을 좀 해 줄 수 있겠니."
2015년 3월 나에게 5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친한 친구도 쉬는 날이 겹쳐, 둘이서 요하네스버그 비행기에 올랐다. 카타르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비행 시간은 7시간. 그곳에서 비행학교까지도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치안이 점점 좋아지지 않는 상황이라 조금 겁이 났다. 그래도 마냥 설렜다. 내가 드디어 비행기를 조종한다니!
부사무장 친구가 미리 연락해준 덕분에 도착한 날, Intro flight 을 할 수 있었다.
오른쪽에는 교관님이 같이 타고, 나와 친구는 이륙, 착륙을 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지형이 어땠는지, 공항을 오가는 길목이 어땠는지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재미있어서 입이 귀에 걸렸던 건 확실하다. 그리고 랜딩 한 후로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비행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2015년에 처음으로 비행을 해 보았지만, 선뜻 학교를 찾아서 비행을 시작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집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직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용대출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옵션은 하나, 아끼고 아껴서 월급을 모으자.
모든 비용을 모으려면 시작이 늦어 질 것 같아서, 결론을 내렸다.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의외로 많은 승무원들이 조종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료들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그 학교가 좋은 점, 좋지 않은 점, 학교를 선택 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1. 어디에서 일을 하고 싶은가?
-나는 한국보다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항공사에서 조종사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 인사팀을 방문해서 물어보았다. 내가 조종사 공부를 시작할 건데 지금 회사에서 가장 선호하는 라이센스는 어느 곳에서 따온 것이냐고. (해마다 상황은 달라진다.) 그 당시에는 EASA 유럽 면장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럽 면장. 오케이. 다음
2.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학교 인가 ?
-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일을 하면서 휴가 때 마다, 쉬는 날 마다 가야하는 스케줄인데, 이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학교인가? 그리고 처음 남아공으로 비행을 하러 가면서 느꼈던 점은, 비행시간이 너무 길면 4,5일 짧은 시간동안에 내가 온전히 비행과 공부에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적당해야한다.
3. 치안은 어떠한가?
- 나에게 있어서 이 부분은 중요했다.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는 제대로 생활을 못할 뿐더러. 큰 돈을 쓰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안전도 중요했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준 곳이 체코이다. 유럽면장을 딸 수 있고, 비행기를 타고 5-6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그곳에 있는 학교를 다녀왔을 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사관이 있어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고, 비자관련된 부분들도 문의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을 거쳐 2016년 나는 체코에서 조종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