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집을 짊어지고 움직이듯, 나도 110kg를 짊어지고 새로운 삶이 펼쳐질 곳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후덥지근하더니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이사하는 날 비 오면 잘 산다던데. 나도 여기서 좋은 일이 있으려나? 싶었다.
운수 좋은 날.
9월 둘째 주, 남이 있는 시험에 필요한 certificate를 받으러 학교에 갔다. 이제 이걸 마무리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설렘과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는 여유에 시험 치러 가는 길목이 기대되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certificate를 발행해 주는 학교 관계자가 나에게 더 이상 시험을 치러 갈 수 없다고 한다. WHATTTTTTTTTTT??????!!!!!!!! WHY???????!!!!!!!!!!!!!!
HOW COME !!!!!!!!!!!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내가 내던진 세 마디는 기억에 남는다. 뭐가 문제인지, 왜 더 이상 내가 시험을 못 치러 가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내 지난 1년 10개월의 비행과 시험을 병행한 노고가 리셋되는 느낌이었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설명을 들었다.
이유인즉슨, ATPL 시험을 치는 데 두 개의 18개월의 기간이 존재한다. 우리가 atpl 수업을 들은 날로부터 18개월 안에 14과목의 certificate를 받아야 하는 18개월. 그리고 또 다른 18개월은 우리가 시험을 치러 가는 그 달부터의 18개월이다.
내가 atpl 수업을 듣기 시작할 때 첫 번째 18개월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시험을 친 순간부터 18개월이 시작된다는 설명만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내가 공부할 때만큼 distance learning, part time으로 하던 학생들이 그만큼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승무원들이 파트타임으로 공부를 시작하며 이 규정을 지키지 못한 상황이 생겨났다. 그래도 이걸 빨리 발견하면 다시 한 달의 그라운드 수업을 듣지 않고 certificate를 받아서 시험을 위한 18개월을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모든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첨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라운드 레슨비 250만 원, 추가 시험비 25만 원 플러스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시험 대비 기간까지..
학교 측의 실수니까 그라운드 레슨 비용이라도 절반을 해 주던지 무슨 수를 써 달라고 했지만, 학교 운영자와 이야기하란 말만 했다. 담당자는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맞다, 이들은 자선단체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억울한 마음을 가진 채로 학교에서 내 불평을 늘어놓아봤자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복잡한 마음에 구척장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 친구야… 내 시험 다시 쳐야 한대… 수업도 2주씩 다시 한 달 듣고. 돈도 다시 내라 하드라
구척장신 : 뭐고 진짜?? 우리 친구 속 상하 제. 근데 친구야 그거 아나?? 아인슈타인은 뇌의 불과 몇 퍼센트만 쓰고 죽었대. 자기 할 수 있다! 속상한 마음 내한테 다 털어놓고 얼른 다시 시작하자!
나 : ㅋㅋㅋㅋㅋ 친구야 아인슈타인이랑 내랑 급은 달라서 위로가 와닿지는 않지만 힘내서 다시 해볼게! 나는 그래도 시험을 쳐 봤으니까 친 과목들은 금방 통과하겠지.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시험 준비
여기서 잠깐, 유럽의 ATPL 시험을 어떻게 치는지 간단히 설명을 하고 넘어가 보자.
총 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는 6 번, 각 과목은 4번 안에 통과를 해야 한다.
한 번의 기회마다 몇 과목을 선택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단 그라운드 레슨을 듣고 나서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이 시험의 기회 6번을 모두 다 쓰거나 과목당 응시 횟수가 4번이 넘어가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 목표는 1월에 시작되는 두 번째 그라운드 레슨 전에 8과목을 모두 다 치는 것이었다.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는 가장 쉽고 공부할 분량이 적은 것을 포함해 5과목,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은 과목은 12월로 배정해두었다.
그래, 살면서 이렇게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길은 내가 끝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것일 뿐. 힘내서 영차 영차 또 가보자!
하루 딱 8시간, 3일에 한 번씩 외출
아침에 일어나서 방 정리를 해 두고, 아침밥을 적당량 챙겨 먹는다. 너무 많이 먹으면 졸음이 몰려 오기 때문에 먹는 양도 조절을 했다. 2시간 집중해서 공부하다가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려고 하면 로비로 내려간다. 내가 생활했던 곳은 학생들이 사는 건물이어서 공용 요리 공간, 그리고 라운지 공간도 있었다. 저녁시간이면 시끌벅적한데 낮에는 학생들이 학교를 간 시간이라 대체로 조용했다. 구석에 박힌 공간에서 공부하다가 조금 트인 공간으로 오면 분위기 전환이 되었다. 그리고 배꼽시계가 꼬르륵 울리기 전까지 책상 앞에서 시험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점심을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졸음이 밀려온다. 식곤증이기도 하겠지만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알람을 맞춰두고 낮잠을 청해본다. 알람을 놓쳐 낮잠이 길어지면 그다음 날 컨디션이 조절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웬만하면 패턴을 지키려고 노력을 했다.
잠에서 깨면 다시 책상 앞에 앉아서 구석구석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잠시 노려본다. 익숙한 녀석들이 있으면 떼어버리고 아직 눈에 익지 않은 친구들은 며칠 더 붙여놓기로 결정을 한다.
Question bank 사이트에 들어가서 오늘의 목표 문제 수를 풀기 시작한다. 어차피 이게 목표로 정해두고 플래너를 짜도 그날 안에 끝을 못내는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기로 했다. 매일 이렇게 앉아서 같은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것도 충분히 수고하고 있는 자신인 것을 알기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계획을 세우고 끝내지 못한 부분은 주말에 끝내는 식으로 쉼표를 두었다.
@숙소 공용 라운지
그러다가 정말 목구멍까지 음식이 꽉 차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기내용 트롤리를 끌고 MP3를 귀에 꽂고 근처 슈퍼로 나갔다. 건물 리셉션에 계시는 분은 가방을 끌고 신나게 나가는 나를 보고 물으셨다.
건물 관리인 : 어디 휴가 가니?
나 : 아니, 슈퍼에 물 사러 가.
건물 관리인 : 물은 수도에서 나오는 거 마시면 되는데 왜 돈 주고 사 먹니? 그럼 이 가방은 왜?
나 : 물들고 오면 무거우니까, 가방에 넣어오려고.
건물 관리인 : 똑똑한데? ㅋㅋㅋ 잘 다녀와.
나 : 엉 고마워.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한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슈퍼로 가는 길은 즐거웠다. 늘 예습 복습 문제 풀이로 반복되던 흐름을 잠시 멈춰 주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물을 6팩 사고, 3일 동안 집에서 해 먹을 메뉴도 생각하고, 오늘은 슈퍼에 가면 어떤 과일이 나와 있을지. 며칠 전 파머스 마켓에서 찾지 못한 잔파가 오늘은 좀 있었으면 좋겠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갔던 것 같다.
기내용 가방에 채워 둔 물 6병, 노란색 이마트 가방에 담긴 3일 치 식량을 담아오면 기분이 좋다. 가방은 무겁고 내 발걸음 퍼포먼스도 느려지지만 냉장고를 채워 둘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내 패턴을 읽으신 건물 관리자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가방을 끌고 나가면 이렇게 인사를 건네셨다.
Enjoy your water shopping.
8개월간의 대장정의 마무리.
내가 목표한 대로 11월, 12월에 8과목의 시험을 마쳤다. 눈이 가득 오는 겨울에 두 번째 그라운드 레슨을 마치고 다시 남은 6과목의 시험을 준비했다. 호기롭게 공부도 제대로 마치지 않고 일단 부딪쳐보자는 마음으로 평균점에서 한참은 못 미치게 떨어지기도 했다. FAIL이라는 글자가 시험 컴퓨터 화면에 뜨는데 정말 낯부끄러웠다. 53점이라니... 이것도 나중에 최종 성적표에 몇 번의 시도 끝에 합격을 했는지 점수도 함께 나오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준비를 해서 떨어지더라도 가까운 점수에 떨어져야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두꺼운 외투를 뚫고 들어오는 겨울을 지나, 꽃 피는 봄에도 시험을 꾸준히 치르었다. 화사하게 핀 CAA 앞의 벚꽃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기록한 2019년의 봄.
2019년 5월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최종 성적표와 Frozen ATPL 성적표 인쇄를 기다린 순간은 정말 떨렸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에 거쳐서 내 시험 응시를 관리 감독해 주셨던 분이 마지막으로 악수를 건네며 "Congratulations. You made it"이라 따뜻한 말을 전해주셨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얼른 CAA를 나왔다.
내가 마지막 시험을 치는데 컨디션 조절을 잘 하라고 브루노에서부터 운전을 해서 프라하까지 모셔온 우리 행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 당일에는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오믈렛에 반달 모양으로 썬 아보카도,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커피 한 잔 쥐여주며 CAA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시험을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고마운 남자친구에게 얼른 달려가서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등 뒤에 빳빳하게 코팅 된 Cerfiticate를 숨기고 차로 다가갔다. 짜잔!!! 이거 봐라!!! 차에서 나온 남자친구는 수고했다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이 기쁜 순간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나를 응원해 준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어쩌면 내가 나를 믿고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나를 믿고 응원해 준 이들이 있었기에 내 마음을 잘 추스르면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CAA 앞에서 맞이한 2019년의 봄
@마지막 시험 친 날
8개월간의 시험 준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기록을 사진에 한 장 남겨보았다.
이제 복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모든 과정을 다 끝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욕심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