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으로 비행하면서 조종사 공부하기.
80일간의 무급휴가에 이어 제일 할 말이 많은 ATPL 스토리를 풀어봐야겠다.
보통 유럽에서 PPL(Private Pilot License) 자가용 면장을 따고 나면 ATPL 시험을 치르게 된다.
ATPL은 Airline Transport Pilot License의 약자로, 1500시간의 비행시간이 없으면 frozen ATPL이라 부른다. 그리고 1500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이 쌓이면 ATPL이 된다.
유럽에서 이 ATPL 과정을 먼저 하는 이유는 그다음에 치르는 IR(Instrument Rating), CPL(Commercial Pilot License)에 필요한 필기시험 과목들이 모두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험을 치른 2016-2019 년도와 14과목의 구성이 달라진 점이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1) Air law
2) Air frame, system, electrics, power plant
3) Instrumentation
4) Mass & Balance
5) Performance
6) Flight planning & Monitoring
7) Human Performance & Limitations
8) Meteorology
9) General Navigation
10) Radio Navigation
11) Operational Procedures
12) Principle of flight
13) Communications
14) KSA (Knowledge, Skills and Attitudes)
내가 쳤을 당시에는 Communications 이 VFR communication, IFR communication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통합이 되고 KSA라는 게 추가가 되었다.
PPL 면장을 획득한 후 첫 휴가 2주는 ATPL Ground lesson을 듣는데 썼다. 학교에서는 8과목 6과목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진행했다. 커버할 과목이 많으면 이틀에 나누어서, 그렇지 않으면 하루에 한 과목씩 진도를 쭉쭉 뺐다. 이 수업을 듣고 일정 시간을 혼자서 공부를 하고, Test를 쳐서 시험을 치러 가는 Certificate를 받아야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겨우 엔진 하나 있는 비행기를 몰았는데, 커다란 비행기에 대해서 배우려니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수업을 듣느라 내 몸은 교실에 있었지만 모든 정보를 흡수하지 못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나의 상태에 심히 걱정도 되었다.
학교에서 주는 Question bank과 교육 데이터 베이스를 이용해서 self study를 해나가야 했다. ATPL을 비행하는 일상에 흡수시키는 과정에서 몇 가지 도전에 봉착했다.
승무원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승객이 누르는 콜 벨이 '띵' 하고 울리면 반사적으로 내 몸은 점프싯(Jump seat)에서 일어나 콜 벨을 체크하러 캐빈으로 나간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What's next, what's next"를 생각한다. 30분에 한 번씩 조종실 체크도 해야 하고, 캐빈에 나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둘러보기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확인해야 하고, 서비스 준비도 해야 하고. 움직이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다. 그래서인지 휴가를 이용해 첫 번째 그라운드 수업을 듣고 온 뒤로 첫 시험을 대비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에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동영상을 보다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로 무엇을 해 먹을지, 나중에 저녁에 비행 갔다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음 레이오버에서 무엇을 할지. '카톡'하고 울리는 울림에 집중력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아무리 주변 정리를 하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왜 그렇게 더러운 것만 보이는 건지. 그 있잖아요.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이 책상 정리하다가 지쳐서 공부는 못하고 책상만 정리하는. 나도 딱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공부를 하던 언니와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해야 할 집안일들이 보이지 않고, 면학 분위기가 형성이 되니 조금씩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시간이 15분, 20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음을 현재에 두고 집중하는 게 보통 에너지를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한고비 넘기고 나니 이제 또 다른 도전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매번 레이오버(체류 비행)을 나가면 동료들이랑 나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시내 구경하는 게 하나의 낙이었다. 시험을 위한 타이머가 째깍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간도 제대로 활용을 하기 위해 조율을 시작했다.
이미 방문해 본 도시에 가서는 호텔에서 공부를 한다. 호텔방에서 공부하다가 집중이 되지 않을 수 있으니 근처에 괜찮은 카페를 물색해 놓는다. 그래서 맛있는 커피 한잔하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이렇게 조율을 하지 않고 모든 체류를 공부만 했다면 아마 어느 날 견디지 못해 균형을 잃었을 것 같다. 극단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다가 갑자기 폭식을 하는 것처럼. 나는 내 비행하는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고 시간은 나에게 충분히 주어졌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나에게 달린 문제였기에.
혼자서 공부를 하는 시간을 채우고, 시험을 치러 갈 certificate를 받고 나면 CAA에 시험을 응시할 수 있었다. 모든 시험 날짜가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대마다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해야 했다. 휴가 일정이 나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내가 시험을 치는 날로 정해졌다.
다른 친구들은 해외로, 한국으로 가족 친구들을 보러 휴가를 쓰는 게 부러웠다. 나도 아직 가보고 싶을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래도 내가 한 선택이니까 책임을 지고 싶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남들이 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얻는 게 있을 테니까.
그래도 시험을 다 친 날에는 혹은 그다음 날 하루 정도는 프라하 시내를 돌아다니는 일정을 잡았다. 시험만 치러 오는 곳이 아니라 수고한 나를 달래주는 작은 보상도 필요했으니까. 그 덕분에 지금은 지도를 켜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여기저기 많이 생겼다.
2018년 7월, 6번째 시험 기회 중 4번을 사용하며 나는 14과목 중 9과목을 통과했다.
남은 5과목은 공부해야 할 분량도 많고 연습해야 할 문제도 많았기 때문에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2018년 40도에 육박하는 더운 여름 카타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