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republic.
이사 준비로 바쁜 사이에 비엔나 비행이 생겼다면, 반드시 즐겨야한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비엔나가 아니고, 가끔은 레이오버가 아예 없는 로스터도 받는 1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쓰던 스케줄러의 속지는 내년 준비로 마무리를 했고.. 괜히 연말에는 공책이 사고 싶단 말이지요?
인스타그램에서 비엔나 검색하면서 알게된 @yebaksa 님이 소개하신 @페이퍼리퍼블릭을 보았다. 자주 가던 식당 근처라서 본 적은 있지만 안이 어떤지 한 번도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런 숨겨진 보석 같은 공간이 있다니.
주소 : Paper Republic
Sonnenfelsgasse 3, 1010 Wien, 오스트리아
포근하고 아늑함, 가죽 향 70% 종이의 미묘한 향이 감싸는 공간이었다. 새 책을 사면 책을 열어 그 사이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는 나에게 이 공간에서 주는 향은 최고의 안정제라고나 할까.
아주 통째로 들고 거실에 옮겨다 놓고 싶은 공간이었다. 여기에 하버드 도서관에 있을 법한 초록색 전등과 조금 폭신한 의자가 있다면 금상첨화일듯.
비엔나 비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라, 막바지 독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함께 나눌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저 공간을 통째로 떼가고 싶다는 나의 다짐이 순식간에 부끄러워졌다. 박완서 작가님의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라는 책을 읽었다. 한 구절에서 서재보다는 요를 깔고 글을 쓰는 게 좋다고 하신 소박한 모습에.. 겨우 블로그에 글이나 올리는 내가 욕심을 과하게 낸건가 싶었다.
이곳의 다이어리 제작방법은 신선했다.
일단 전시된 다이어리와 속지를 둘러보며 디자인, 사이즈를 정한다.
그 다음 직원에게 직접가서 원하는 속지, 가죽, 스트링 색을 알려준다. 그러면 직원이 거기에 맞게 다이어리를 제작해준다. (이름도 새겨준다!)
그 다음 계산대로 이동해 계산을 한다.
나와 같은 문구 덕후인 여동생의 다이어리는 망설임없이, 같은 디자인으로 주문을 했다. 우리 막내 남동생은 글쎄 싶어서 물어봤더니 흔쾌히 아날로그에 입성을 하겠다고 했다. 새해에는 좋은 일들 가득 적고, 속상한 일 털어내길 바라며 우리 삼남매 다이어리도 구매 완료.
그 안에 있는 까페에서 따뜻한 플랫 화이트 마시며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좋다. 아 좋다 라는 말이 숨쉬듯 새어나왔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많은 사람들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가 왔어도 나처럼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많은 위로와 응원을 받고 나왔다.
얼른 동생들 선물 가져다 주고 싶다. !
2025년 마지막 비행은 사우디 아라비아 가심이었는데, 리포팅 2시간 전에 이스탄불 턴으로 바뀌었다. 듀티시간이 배로 늘어났다.
좋은 캡틴 덕에 기분좋게 비행을 하고 내렸는데...
아니 이게 왠걸?
곧 이사 나간다고 짐 열심히 싸고 있던 집에 전기가 나간 것이다. 일주일을 내리 비행한 터라 화를 낼 에너지도 없었고 그냥 허탈함에 코웃음만 나왔다.
멋진 풍경보고 내린 현실은 컴컴한 암흑..
당장 이사가 내일인데.. 싸야할 짐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고.
건물 관리인은 비어있는 3층을 이용하라고 그 집 열쇠를 주었다. 그 곳은 나의 충전소로 이용되었고, 비행기 외부점검을 할 때 사용하는 손전등을 켜 두고 어둠속에서의 짐싸기가 시작되었다.
어둠속에서 짐싸기
3층의 공간을 사용하라고 했지만 어수선하고, 짐을 들고 올라가야하는 번거로움에 그냥 쇼파에서 잠을 청했다. 마지막에 싸야할 짐들은 자연광에 의지에 마무리를 했다. 12월의 30일 굉장히 다이나믹하다.
안녕! 나의 에피소드 가득했던 첫 공간
12월 30일 이사.
속전속결
한 번 해봤다고 요령이 생겼나?
계약서 쓰고, inventory check, 이사 업체 부르기, 청소업체 불러서 해 질때 모든 짐을 정리했다.
12월 31일에는 올해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여유도 가졌으니.
제법 가까운 거리에 사는 성숙이와 새로 이사온 곳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러 했다. 대충 샐러드와 재료 준비를 마치고 스파클링 와인 한 잔 하며 저녁준비를 시작했다. 손이 어찌나 야무지고 빠른지. 자연스럽게 주방의 주도권을 잡고 메인 요리를 뚝딱뚝딱 해나갔다.
백합 조개가 들어간 파스타, 스테이크 샐러드 그리고 치즈 플레이팅까지. 올 한해 돌아보며 아쉬웠던 점, 좋았던 것들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게 참 감사했다. 다가올 해에 이루고 싶은 것, 계속 해 나가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돈된 공간에서 시작한 새해는 괜찮았다. 소음도 적고 누수는 아직 마주하지 않았고, 새로운 공간이 주는 아늑함도 있다.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공간들도 생겼다.
2025년 내가 한 비행은 171개, 총 433시간, 19414명의 승객과 함께 했다.
친구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신년 카톡 메시지처럼 좋은 일만 가득하면 좋겠다.
잠시 잃었나? 이래도 되나 싶었던 사라진 식욕은 다시 나에게 탑재되었고, 주방에서 앞치마를 매는 시간이 늘어났다.
무료함을 달래는 김치공장도 돌리고, 책상에 앉아 삶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도 가지고 있다.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쓰고
빠져나가는 근육을 잡기 위해 체련단련에 힘을 쓰고
어쩌면 내가 혼자 지내는 시간이 주어진 마지막 한 해일 수 있으니 이직준비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많이 가지며 행복을 자주 느끼는 사람으로 2026년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이 다짐이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마음을 돌아보고 다져라고 새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같다. 각자가 소망한 일이 차근차근 풀려가는 병오년 한 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