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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Sep 12. 2022

나지막이 걷다가 맞이한

대학교 08 | 미래의 시작, 과거의 연속

    흐린 하늘에 휘날리는 낙엽. 나는 부스럭거리는 방호복을 입고 학교 벤치에 앉았다. 대학교 면접이 진행되고 있었다. 학교는 긴장한 표정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그저 지루함을 달래려 검역소 밖으로 나와 수동 감시자를 기다렸다. 대학교에 입학한 지 3년 만에 마주하는 수시 면접. 굳이 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건 별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나는 외로웠고 우울했을 뿐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지만 유달리 달리기만은 잘했던 나는 초등학교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했다. 소극적이고 흔들리기만 했던 성격은 점차 굳건히 세상에 뿌리를 내리며 곧게 성장했다. 한겨울에도 바람과 함께 웃으며 운동장을 상쾌히 달렸다. 운동을 하며 행복을 느꼈고, 앞으로의 인생도 그렇게 쾌청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육상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유는 일시적 신경 마비로 인한 무릎 운동 능력 부족. 새벽까지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라는 의사의 음성과 함께 일평생 계획하던 미래와 행복했던 과거 모두 공중에서 흩어졌다.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몸이 덜컹거렸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한 손에는 오른쪽 무릎을, 남은 한 손에 요점정리 노트를 꽉 쥐고 버텼다. 그날은 수능을 두 달 정도 앞둔 초가을이었다.


    공부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나 자신이 더 어리석다고 믿었다. 공부 때문에 운동을 못하게 되었는데도 공부를 포기하지 못한 나의 미련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내게 학습실이 아닌 건물 출입문 앞에 방치되었던 책상에 다리를 겨우 펴고 앉아 공부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늦가을, 초겨울이 다가올수록 나는 수차례나 탈진할 정도로 공부에만 더욱 매달렸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검은 무언가가 눈앞에 번져나갔다. 그게 꾹 참아와 고인 감정에 잠겨 잘게 찢어진 미래일지도 모른 채.


    쓰러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끝에 대학에 합격했다. 낯선 도시 속 처음 마주한 사람들이 가득한 길거리에서 메마른 다리를 끌고 다니며 1년을 보냈고 팬데믹과 마주했다. 무릎을 붕대로 묶고선 이를 꽉 물고 달려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목표 없이 아무 곳이나 달리다가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고통을 참았지만 성취한 건 없는 삶을 줄곧 살아왔다는 자괴감에 다리를 부여잡고 매일 무너졌다. 몰려오는 통증에 방 안에 틀어박혀 지금껏 고여있던 감정을 내뱉으며 2년을 보냈다.


    사람을 보지 못한 지 대략 한 달쯤 지난 시점에서야 사람을 보겠다며 향한 곳이 검역소 옆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주변에는 면접 대기실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학부모와 학생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코로나는 참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며 나는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들었다. 장갑에 손을 구겨 넣으려고 미간까지 구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간격 사이에 서있던 두 사람을 바라봤다. 면접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듯한 커다란 가방을 메고 간절하게 긴장한 아들을 안아주던 아버지의 모습. 그걸 보며 나는 저분들도 여기까지 오느라 참 수고하셨겠구나, 훌륭하다 싶었다.


    그때 잊고 있던 어느 장면이 내 눈앞을 메웠다.

    3년 전 이 학교 건물 앞에 긴장한 채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공중에서 흩어진 꿈의 한 조각을 손에 쥐고 목발을 짚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나는 뭐가 그렇게 간절했을까.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노력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했을까. 고작 왜 그걸 포기하지 못했을까.


    나는 살고 싶었다.

    노력할 무언가가 없었다면 나는 그 순간에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공중 속으로 분해되던 순간에도 꽉 붙든 기억 조각 하나. 운동도 공부도 모두 서툴렀던 나는 충만한 노력으로 꼭 해내겠다는 그 한 조각을 붙들고 지금까지 걸어왔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한 번쯤 다시 예전처럼 행복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심결에 의지했다.


    노력할수록 분명 더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나는 매일 달렸다. 점점 균형을 잃어가는 몸을 붙잡으려 스스로 안간힘을 썼다. 아픔을 버티려 꽉 쥐던 손. 그 속의 노력의 파편은 살에 파고들어 이미 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 피가 흐르고 응고되기까지 3년. 고통에 무뎌지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매일을 살아가던 내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나를 무너지게 했던 노력이 나의 미래를 붙잡아준 구원자가 되어 나를 매 순간 살렸다. 잘 살 거라며, 훌륭하게 행복할 거라는, 그간 외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비틀거리는 등을 향해 눈물이 고일만큼 외쳤다.


    환한 미소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바람에 벌어진 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내려와 방호복 위에 닿았다. 마음속 거먼 얼룩이 물과 빛에 하얗게 녹아내렸다. 말갛게 드러난 마음속을 싱그러운 바람이 가득 메웠다. 운동장 위를 달리는 듯했다. 나는 분명 살아 있다. 달리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나지막이 걷다가 내일을, 행복을 맞이하자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학생, 수동 감시자 왔어"라는 직원분의 말이 들려온다. 저 멀리서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학생을 보며 페이스 실드를 착용했다. 눈앞에 비치는 내 얼굴. 내가 벌써 이렇게까지 자랐구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굳어버린 무릎을 잠시 주무른 후 벤치에서 살포시 일어났다.


    "우리 함께 갑시다"


    "저, 남들과 조금 다른데 괜찮겠죠?"


    "괜찮아요. 달라도 결국 훌륭하게 행복할 거예요. 저 믿어요."



*작년 늦가을에 적어두고선 마음에 발라둔 글 조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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