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06 | 요즘 일상
브런치는 참으로 멋진 공간입니다. 혹시, 정말 혹시 글을 쓰는 순간을 잊고 사는 중은 아닌지 걱정해주니까요. 대학교에서 느끼는 점들을 남기고자 다짐했으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게 남겨지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좁게 보면 7차 학기 성적이었고, 넓게 보면 취업이라는 것에요.
할 말은 여전히 많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물론 성적과 취업 면에서는 '다행'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방학을 맞이한 김에 조금 남깁니다. 더 이상 브런치, 이 멋진 녀석이 제 행복의 순간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수많은 알람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7차 학기는 공학에만 치여 살았습니다. 중간고사 기간에는 1달 반 동안 장염에 시달려서 저체중이 되었고, 종강까지는 정말 공부만 했습니다. 외출도 안 하고, 맨날 15분 만에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면서요.
종강을 맞이한 지 거의 한 달입니다. 그동안 이 형편없는 글을 써 내려간다고 글 한 편을 안 올렸냐고 물어보신다면, 지금은 학사 공부보다도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답하겠습니다.
저는 교환학생을 포기했습니다. 저에게도 토플을 공부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1학기. 여름방학에 거금을 들여 토플 문제집을 구매하고, 한참을 풀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곧 끝날 거라고 예상했던 코로나19는 그렇게 2021년까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교환학생을 7차 학기까지만 다녀올 수 있습니다. 물론 9차 학기까지 다닐 거라는 서약서를 쓰면 8차 학기에도 다녀올 수 있지요.
6차 학기를 끝낸 저는 그렇게 7차 학기,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서 교환학생 준비를 포기했습니다. 비용과 확률. 포기할 이유는 정말 많았습니다.
그저 교환학생과 해외연수의 시기를 의도적으로 놓아버린 저에게 주어진 건 전자전기공학 복수전공이었습니다. 문헌정보학과보다 전자전기공학에 더 끌린 탓이었습니다. 충동적인 선택은 언제라도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후회와 반성을 반복하며 7차 학기를 이어나가던 와중에 학교 포털 사이트에서 교내 해외봉사단 모집 공고를 발견했습니다. 이거다. 이거라면 어떤 면접에서도 "너는 왜 그 흔한 교환학생 경험이 없니"라며 나의 영어 실력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하기 싫었습니다. 대외활동을 이미 여러 차례를 했고, 동남아시아 공무원을 대상으로 통역 아르바이트도 해봤습니다. 그러니 인도네시아 대학생을 대상으로, 그것도 온라인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 어느 하나도 지금 제게 필요한 <취업> 요소가 없었습니다. 저보다 경험이 많은 분들도 계실 것이고, 가장 중요한 건 이 활동이 여름방학 내도록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공고가 올라오자마자 확인한 저는, 지원 마감일까지 고민을 하다가 마감 한 시간 전에 지원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꽉 감고 봉사단 지원서를 제출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게 뭐람. 지원서를 제출한 다음날. 작년부터 참여하고 싶었던 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가 올라왔습니다. 앞에 지원한 해외봉사단의 기간이 완전히 겹쳐버렸습니다. 그러나 대강 쓴 지원서. 간절함은 거의 보이지 않는 지원서로 과연 해외봉사단에 합격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국제영화제 자원봉사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취업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좋아하는 음악영화제 지원서를 오랜만에 작성한 저는 꽤나 만족스러운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 지원서를 완성하고 30분 즈음 지났을 때, 저는 해외봉사단에 합격했다는 문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국제영화제 자원봉사자 지원서는 외장하드디스크 어딘가에 박혀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또 영화제 전에 취업의 눈치를 보다가 덜컥 취업해버리면 또 국제영화제 자원봉사는 영영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해외봉사단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습니다. 해외봉사단 담당자분께 저를 합격시킨 이유를 여쭈어보자 제가 간절해 보였다나요. 담당자님 저를 한참이나 잘못 보셨군요. 간절한 게 아니라 체념한 겁니다. 희박하고 비싼 확률에 굴복한 제 모습. 그렇네요. 간절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그날, 기말고사를 2주 앞둔 그 오리엔테이션 날. 모든 팀원들과 친해지라는 의도로,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던 플래시몹 촬영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짐벌 촬영 보조와 영상 편집. 그리고 춤도 췄으니까 거의 모든 부서에 참여한 셈입니다.
모든 팀원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면, 이 플래시몹을 준비하며 활동 대표자를 추천해서 제출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혹시 이번에도 감투를 쓰고 싶어서 저도 그렇게 최선을 다했냐고요?
아뇨. 이번 해외봉사단에서의 제 목표는 팀원이 되는 방법을 익히는 겁니다. 그럼에도 아마 업무 처리량과 활동에 대한 제 태도는 팀장과 거의 같을 겁니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해도 팀장이 하면 '희생', 팀원이 하면 '다재다능'으로 평가받는 장면을 참 여러 번 보았습니다. 게다가 세어보니 지금까지 대학교 입학 이후에 참여하고 마무리까지 지은 활동 모두에서 감투를 썼습니다. 이미 경험한 걸로 팀장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하고, 7차 학기를 겨우 마친 저는 최고의 희생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지쳤다는 게 제 솔직한 주장입니다. 결국 취업입니다. 취업. 면접관님들도 팀장으로서의 희생 경력은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으실까요.
그리고 플래시몹 촬영을 끝내고 다 같이 만난 첫 번째 전체 회의. 익명 투표로 진행된 모든 팀장과 부팀장에서 제 이름은 불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18명이 한 팀을 이뤘던 기획팀이 아닌 1인 편집팀에 속해 있었으니까요. 학생 대표 투표는 역시 다수 투표. 당연히 팀원이 많은 팀에서 대표가 나올 확률이 높죠. 눈에 띄지 않게 혼자서 제 할 일만 제대로 마쳤습니다. 이거 봐요. 감투를 쓰지 않겠다는 제 다짐은 진심이었습니다.
모두 모인 강의실에서 플래시몹 영상 완성본이 재생되고, '생각보다 좋았다'는 담당자님의 표정과 함께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영상 편집을, 그러니까 누가 한 거라고?'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따봉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하던 모든 걸 얻었습니다. 팀장의 감투 없이 팀원의 다재다능. 딱입니다.
그렇게 플래시몹 영상 발표까지 마치고, 본격적인 사회봉사 교육을 사회봉사의 경험이 많으신 교수님께 받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한 단어. <자본주의> 그리고 뒤이어 <소수자>.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해외봉사인 만큼 참 적합한 주제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소수자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자 아이답게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계속 이어지는 교수님의 질문에 팀원 18명, 담당자님 모두 지쳤습니다.
제 옆에 앉은 분께서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에 '돈이면 다 되는 거요'라고 단호하게 답변하시더군요.
저는 강의 내도록 할 말이 너무 많아 애써 화면에서 눈을 떼고 있었습니다. 강연에 집중하는 교육자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학기 리포트를 당당히 쓰고 있는 앞자리 팀원들에게 '사실 당신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회. 그 자체가 진짜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닐지도 몰라'라고, 굳이 해외봉사단 활동하며 말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결국은 우리 대다수가 예비 노동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잘 모르는 팀원분들의 부모님이 부르주아가 아니라는 조건에서는요.
자본주의가 무엇인 것 같냐는 교육자의 질문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 더 답변하기 전까지 절대 그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지 않을 태세였습니다.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 뭔가 분주해 보이는 봉사단 담당자님.
그래서 저는 미적미적 손을 들었습니다. 팀원분들도, 교수님도 '다행이다'라는 표정을 보입니다. 그렇게 저는 우선 자본의 정의. 20:80, 자본가와 노동자, 우리나라 1퍼센트가 가진 자본 수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업체 노동자의 현실, 소수자의 비가시화, 캠퍼스 내 자본주의의 현실을 줄줄이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우리가 힘내서 끝까지 외치는 게 이 지독한 자본주의를 대항하는 방법이리라,
그리고 자연스레 신자유주의로 넘어가려는 찰나.
리포트를 쓰던 팀원분들도, 휴대폰을 응시하던 과장님도 다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발견.
아참. 여기 사회학과 강의 아니지.
교수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이 강의실에 빨갱이라고 오해받을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며 그렇게 다음 주제로 넘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모든 사람이 제가 사회학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학을 공부하며 사회학 학사 공부를 마무리하는 시점. 7차 학기 중간고사 이후 사회학과 교수님 두 분의 북 토크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학은 참, 우울합니다. 사회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 원인과 다른 요소와의 상호 관계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시간을 내어 나서도 봅니다. 그러나 사회는 쉽사리 변하지 않았습니다. 경제학, 법학, 공학까지 참 다양한 학과에서 공부하던 저에게 사회학만큼 우울한 사람들이 많은 학문도 없다고 느낍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정말 많은 학부생들이 정신건강 관련 상담을 받고, 연락을 다 끊은 채로 휴학하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회에 절망하고 아예 다른 학과로 전과해버리기도 합니다.
한 학우분께서 교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는 변하지 않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지, 그래야 한다면 어디서 그 원동력을 받을 수 있을지. 그 허망함과 허탈함을 교수님께서도 느끼시는지. 그런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교수님도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도 허탈함을 느낀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전과 비해 사회는 참 많은 곳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며 원동력을 얻는다고요.
중증 수준의 우울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사회 문제에 지쳐버릴 때는, 그 문제를 사회로 넘기라고도 말하셨습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문제라며, 조금은 사회에 책임 전가하라고요. 언제까지 우리 주변의 문제를 우리 문제라고 여기며 우울해하고 번 아웃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들이 살아가기 버겁다고 느끼는 건 우리의 목소리가 가진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힘을 죽어라 무시하는 사회 탓이라고요. 그걸 꼭 오늘 여기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기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절망하고 우울할 이유가 없다고요. 넵.
공학은 모든 과제, 시험을 자필로 작성해야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시험이 끝나고, 플래시몹 영상 편집을 끝내자마자 정형외과를 가니 오른손 중지 끝이 너무 휘어있다는군요. 저는 오른손잡이고, 간략하게 식을 쓰기에는 한참 모자란 공학 지식으로 가장 고통받은 건 제 오른손 중지였습니다. 그렇게 주사 치료로 뻐근하게 휘어버린 중지로, 저체중 탈출을 위한 파인애플 한 조각을 우물거리며 해외봉사단 회의 준비를 하던 중에 겨우 시간을 내면서까지 브런치에 남깁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모두에게 사회학을 배급하라!>
네 이상(理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