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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05. 2024

존재의 무게를 결정짓는 에로스의 양가적 성질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관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명작은 결말을 알고도 다시 찾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내게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그렇다. 서사 구조와 결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벼운 사랑을 하는 남자와 무거운 사랑을 하는 여자, 가벼운 사랑을 하는 여자와 무거운 사랑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다소 허무한 결말을 통해 여러 철학적 논제를 던진다. 다만 도입부에서 나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및 당시 프라하의 봄과 신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소설은 자칫 에로틱한 플롯만 남기 쉽다. 그러니 다시금 보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실존주의 혹은 허무주의

 이 소설은 형식적으로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른 구조로 소설이 전개된다.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들며 진행되며, 시점은 단지 등장인물들의 묘사를 위한 장치이기에, 문법적으로 이탈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철학적 테제들을 삽입한다. 기존 문학의 문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형식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84년에 발간된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시대적으로 냉전이 점차 미국에 기울어지고 있을 때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프라하 봄이다. 소설에서는 ‘스탈린주의’로 오염된 공산주의에 비판적이나,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친화적이지 않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지만, 대신 이 소설은 허무주의를 외치는 듯싶다. 자본주의던, 공산주의던 모두 허무하다고 비웃으며, 이데올로기 따위는 부차적으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주인공 토마시는 공산주의를 비웃다가 직업을 잃고 실직자가 되지만, 정치적 수용범을 석방해 달라는 탄원서 작성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가 실존주의자라,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나 기존 도덕을 비웃는 듯 거부한다. 그러나 소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사상보다 허무주의에 가까운 메시지를 던진다. 토마시는 프라하던, 도피했던 스위스 제네바던 모두 그에게는 허무한 공간이고, 소외를 준다. 가벼운 존재였던 그는 가벼운 방식으로 여성들과의 육체적 쾌락으로 갈증을 푼다. 그러다가 아주 허무하게 교통사고로 죽는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 실존주의 소설과 달리, 결말 방식에서 은근히 가벼움을 말한다. 허무한 죽음이기에, 기존 대의를 쫒는 무거움보다 가벼운 쾌락을 즐기라는 것이다. 만약 대의라는 무거움으로, 철저한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다면 도망가거나, 단지 공산주의자들을 욕하는 글을 쓰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투철한 투사가 되었겠지만, 가벼운 토마시는 삐딱이에 불과하다.      


실존주의적 차원에서 보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이 소설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로 조금 풀어내면, 기본적으로 이 소설 속 인간은 두 가지 존재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즉자적인 가벼운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대자적인 무거운 존재다. 그러나 이 소설의 허무한 결말부는 대자적인 무거움을 거부하며, 즉자적인 삶을 살라는 듯 말한다. 즉자적인 가벼움은 원초적이다. 토마시는 정신적 사랑이 아닌 육체적 결합, 이념과 도덕이 아닌 탈피와 분방, 의미와 무의미 중 항상 원초적인 후자를 택한다. 반면 부인 테레사는 전자를 택한다. 그래서 토마시는 허무하지만 편안하고, 테레사는 강박증에 시달려 의부증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사실 토마시처럼 대놓고 외도를 하는데, 그것을 불쾌해하는 것을 의부증이라고 볼 수 없다) 소설은 결국 토마시와 테레사를 한낱, 한시, 같은 장소에서 동일하게 죽인다. 가벼운 존재던, 무거운 존재던 죽음 앞에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할 수밖에-향연으로 보는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인간은 원래 원초적으로 태어난 즉자적인 가벼운 존재다. 그렇기에 날아갈 정도로 허무한데, 그런 허무함을 일시적으로 잡아주는 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강요하는 이념, 도덕, 법률일 것이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신념과 사랑이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는 당연히 기존 사회가 강요하는 이념, 도덕, 법률 등 그들만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렇다고 하여, 쇼펜하우어식 허무주의를 비롯한 가벼움만을 말하지 않는다. 원초적이고 허무한 가벼움보다, 실존적 무거움을 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적 무거움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종교인이 신을, 혁명가가 혁명을 실존의 해답으로 삼고 실존의 문제에서 졸업할 때, 평범한 사람에게 가장 와닿는 해답은 사랑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향연>에서 말하는 파우사니우스가 말하는 선한 에로스에 가깝다. 악한 에로스는 상대의 몸만 사랑하며, 정신적으로는 관심이 없다. 반대로 선한 에로스는 상대의 정신적 성장을 돕고, 우정의 관계로 발달하려는 것이다. 즉, 상대의 육체가 아닌 상대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사랑이 바로 선한 에로스이고, 그런 선한 에로스만이 무거움이 될 수 있다. 테레사와 토마시 역시 둘 다 에로스를 느끼지만, 둘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테레사가 무거웠던 이유는 정신적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선한 에로스를 추구해서이고, 토마시가 가벼웠던 이유는 가벼운 사랑, 육체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악한 에로스를 추구해서였다. 결국 이 둘의 관계와 존재를 통해, 에로스의 변증법적 고찰을 할 수 있다. 가볍고 즉자적인 악한 에로스냐, 무겁고 대자적인 선한 에로스냐. 둘 다 죽음 앞에서 동등한 만큼,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다만, 원초적 쾌락을 넘어 인간적인 쾌락을 느끼려면, 적어도 무거워질 필요는 있을 것이다. 가벼워 날아간다 해도 우리가 머물 천국은 없기에, 머무는 동안 무거운 쾌락을 느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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