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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06. 2024

이중 폐허 속 ‘인간 실격’

염세주의 작품을 전복시켜 읽기, 소설 <인간 실격>

이중 폐허 속 ‘인간 실격’

염세주의 작품을 전복시켜 읽기, 소설 <인간 실격>     


지나친 밝음은 시인을 어둠 속으로 몰았다.

-마르틴 하이데거, ‘횔덜린 시의 해명’ 중     


 작가는 폐허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다. 저마다 다른 폐허에서 저마다 다른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밝은 꿈일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 그중에서도 맹목적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밝음을 강요한다. 여기서 밝음은 휴머니즘적 빛이 아닌 지배 세력을 향한 한 줄기의 불꽃이 되어 승화하라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작가라면, 그 밝음에 맞선 새로운 밝음을 창조하거나 아니면 어둠을 꿈꾼다. 다자이 오사무는 후자다. 지나친 밝음에 지쳐,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이라는 심연 속을 그렸다. 소설 <인간 실격>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이라는 사회적 폐허 속 인간의 내면 속 폐허를 그렸다. 이러한 이중 폐허는 지나친 밝음으로부터 소외된 독자의 감정에 깊게 스며들어 위안을, 때로는 허무감을 준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희망을 상실한 체 허무주의와 그보다 더 독한 염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 팔린 것도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충분한 고전적 가치를 지닌다. 고전이라는 의미는 특정한 시기가 아닌, 여러 시대에 두고두고 읽힌다는 의미다. 즉, <인간 실격>은 시대가 주는 소외가 심해질수록 많은 이들에게 읽힐 것이고, 분명 진한 감정을 줄 것이다.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소외뿐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다루는 소설이다. 그러니 소설이라는 장르가 인류에게 망각되지 않는 한, 포스트자본주의 시대-유토피아던, 디스토피아던-에도 읽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소설을 실존주의라고 해야 할까? 실존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적 작품으로 불리나 이 소설은 명백히 염세주의적 소설에 가깝다. 실존주의란 사르트르의 말대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는 휴머니즘이다. 폐허에서 본질에 앞서는 실존적 희망을 거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혹은 폐허 자체를 즐기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와 달리 일말의 희망이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대타자의 허무주의를 부르짖는 소설도 아닌, 염세주의적 인간관을 가지고 전개된다.      


 이 소설의 핵심은 타자에 대한 공포와 자신에 대한 혐오다. 이는 작가 오사무의 경험이 많이 반영된 특징이다. 자살 시도 및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인한 죄책감과 좌익 활동 등 요조의 일대기와 오사무의 삶이 유사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 요조는 신기하게도 욕망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배가 고파하거나, 행복함과 같은 원초적 욕망을 느끼지 못한 채,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인정 투쟁’을 벌인다. 그래서 가짜로 행동하고, 거기서부터 욕망을 느끼는 독특한 존재다. 이것이 요조의 존재론적 소외다. 처음 주인공 요조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대상은 아버지였다. 요자에게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반영되었는지 대타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포에 벗어나기 위해 거짓된 행동을 반복한다, 그의 욕망은 남들에게서부터 오는 ‘인정 투쟁’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설의 반자본주의적 경향, 실존주의적 코드가 바로 이 지점이다. 요조의 수기는 타인을 향한 헛된 ‘ 인정투쟁’을 통해 점차 폐허가 되고, 자살도 하다 끝끝내 살아남아 버려 잠시의 기쁨을 누리다가 폐인이 되는 과정이다. 거기서 요조는 작가 오사무가 그랬듯이, 잠시 희망을 잠시 붙잡기도 했다. 그것은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술, 담배, 창녀와 달리 근원적으로 다른 희망인 마크스주의였다. 분명 요조는 유물론으로부터 희망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하며, 단지 비합법적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대타자가 규정하는 상징계에서 잠시나마 짜릿한 일탈을 즐긴다. 이 소설을 좌익의 관점에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희망의 관점에서 읽으면 ‘한 사람이 신념 없이 가볍게 살다가 폐인이 되는 과정’으로 읽힌다. 동기가 어찌 되었건 간에, ‘혁명’이라는 메시아적 구원에서 주체가 되었다면 적어도 요조의 삶은 ‘인간 실격’의 부끄러운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조가 진정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실현된 체제가 주는 소외가 추방된 사회에서 산다면, 적어도 존재론적 고통을 겪더라도 ‘인간 실격’이 아닌 ‘인간 합격’이 될 것이다. 존재론적 소외와 체제의 소외는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의 인정을 자신의 욕망처럼 강요받는 체제가 온다면, 인간학적 폐허 역시 정화될 것이다.      


  이 소설은 존재론적 소외와 사회적 소외가 주는 이중 폐허가 인간을 어떻게 실격시켰는지에 관한 소설이다. 인류 해방의 희망을 염원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의도한 염세주의를 전복시켜 염세주의적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를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인간 실격’의 과정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2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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