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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04. 2024

존재에 만족하라!《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시작하는 인류애 혁명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사상가로 마르크스도, 벤야민도 아닌 에리히 프롬을 말하고 싶다.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처럼 과학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거나, 벤야민처럼 독특한 신학적 사유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대중적이고 간결한 문장에서는 늘 희망이 흐르고, 사랑이 넘친다. 학계 및 대중 둘 다 사랑받는 휴머니스트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 《사랑의 기술》은 아름다운 20세기 명작임은 분명하다. 간결한 문체와 명확한 방법으로 사랑의 본질을 규정하는 20세기 최고의 인문학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아쉬움 점은 대체로 추상적이고 개인의 인생론에 대해 해답을 줄 지언정 사회적 차원의 담론적 성격은 미미하다. 단지 여지를 줄 뿐이다. 사회적, 거시적 차원의 문제 제기는 이후 《소유냐 존재냐》에서 잘 설명된다.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라는 간단한 삶의 태도로, 사회적 변혁과 개인적 변혁을 모두 이야기한다. 이 책 역시 《사랑의 기술》에 대한 훌륭한 각주다. 프롬 특유의 인간학적 혁명을 꿈이 담긴 생전 원고들을 묶어 출판한 책이다. 좌파적 프로이트주의적 관점으로 현대인의 사랑에 대해 분석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통한 인류애 혁명을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지 자기계발서 따위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적 붉음과는 또 다른 붉음이 물들어진 혁명적 서적이다.


 이 책은 총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유기성은 떨어지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학술적 논문보다 공통적으로 사랑을 경유해인생론을 이야기하는 대중적 에세이에 가깝다. 인상 깊은 목차들은 앞에 있는 장이다. 물론 뒤에도 기본소득을 말하는등 선구적인 글도 있지만 소비 생활 및 태도를 이야기하는 뒷쪽 글들보다 사랑을 통해 인간학적 혁명을 꿈꾸는 앞의 장의 글들이 인상 깊게 느껴진다. 많은 인문학도들이 사랑을 통해 혁명을 꿈꾸지만, 프롬의 글들은 정신분석학적, 철학적 담론들을 통해 일리있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깊게 꽂힌다.


1장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하는가>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사랑의 길은 폭력 행사의 길과 반대에 있으며, 사랑은 이해하고 설득하며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며 온건해지는 과정이므로 통제와 폭력의 수단으로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삶에 대한 사랑은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최악은 존재로부터 오는 고통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관심이다.


2장은 칸트의 유명 테제에서 온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를 말한다. 현대인의 윤리학에 대해 말하며,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현상을 비판을 다룬다. 19세기 악덕인 권위주의, 착취, 차별, 탐욕과 축재, 그리고 자기중심적 개인주의가 어떻게 현대에 변형되어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다. 그래서 현대의 과제로,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치는 사고의 극복 및 소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창조적 인간이 될 것을 말한다.


3장 <이기심과 자기애>에서는 이기심과 자기애가 서로 대립되었다는 기존의 사고-니체,칼뱅,칸트-를 전복시키며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 이웃을 인간존재로 사랑하는것처럼, 자기애를 긍정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과 증오를 분리될 수 없다는 변증법적 사고를 한다. 특히 사랑에 대해서도 열정적 긍적이라고 말하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낭만적 사랑관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인간 자체를 향한 사랑이며, 나 자신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특정 개인을 사랑함으로써 인류애는 시작되며, 그 사랑의 대상을 특정인으로 두지 말라고 말한다.


 모든 글들에서 가르침을 얻었지만,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이기심과 자기애>부분이다. 사랑과 증오는 같다는 변증법적 진리를 풀어내며,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시작하는 휴머니즘적 혁명-존재에 만족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사회주의적 혁명의 궁긍적 지향은 존재의 풍요다. 그렇기 위해 물질적 토대를 전한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말한다. 그렇지만 프롬은 사회주의적 혁명이 아닌, 인간학적 혁명을 말한다. 물질적 토대를 경시한 체(정확히 말해 이중혁명을 말한다), 존재의 풍요를 위한 사랑의 혁명을 말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에리히 프롬이 지향은 모두 같다. 심지어 니체, 예수, 붓다, 장자, 플라톤과 같은 인류 지성의 대가들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존재를 풍요롭게! 그렇기 위해 물질적 조건들이 먼저 바뀌어야 함은 명백하나, 그의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 역시 함양해야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프롬의 이중 혁명에 동의하면서도, 선행될 점은 사회 혁명임을 이야기 하고 싶다.


 모든 글들에서 가르침을 얻었지만,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이기심과 자기애>부분이다. 사랑과 증오는 같다는 변증법적 진리를 풀어내며,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시작하는 휴머니즘적 혁명-존재에 만족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사회주의적 혁명의 궁긍적 지향은 존재의 풍요다. 그렇기 위해 물질적 토대를 전한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말한다. 그렇지만 프롬은 사회주의적 혁명이 아닌, 인간학적 혁명을 말한다. 물질적 토대를 경시한 체(정확히 말해 이중혁명을 말한다), 존재의 풍요를 위한 사랑의 혁명을 말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에리히 프롬이 지향은 모두 같다. 심지어 니체, 예수, 붓다, 장자, 플라톤과 같은 인류 지성의 대가들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존재를 풍요롭게! 그렇기 위해 물질적 조건들이 먼저 바뀌어야 함은 명백하나, 그의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 역시 함양해야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프롬의 이중 혁명에 동의하면서도, 선행될 점은 사회 혁명임을 이야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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