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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23. 2024

미니마 코뮤니즘, <사랑 예찬>

미니마 코뮤니즘, <사랑 예찬>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중에서


 철학자임에도 단지 형이상학적 사유에 갇혀 있지 않고 낭만적으로 뻗어나가며, 때로 시적인 문장을 담아내는 철학자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속 마르크스주의를 재발명하기 위해 싸우는 투사, 알랭 바디우가 있다. 물론,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스탈린주의-마오주의의 철학적 재발명이기에, 그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공산주의를 위해 철학적인 사유와저항을 하는 그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의 대담록 <사랑 예찬>은 가히 혁명적이다, 자본주의 속 물화되는 사랑을 사수하기 위한 투사적인 면모도 보인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교조적으로 곡해하는 스탈린주의에서 이탈해, 사랑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는 이 책은 ‘에로스의 종말’을 말하는 시대에 사랑의 아우라를 발견한다. 그 아우라는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만남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구축으로 말한다. 그에게 진정한 사랑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것을 계속 지속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삶의 재발명된다고 말한다. 그런 사랑은 ‘진리의 절차’이며,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렇지만 사랑에도 적이 있다. 연적이라고 부르는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이기주의이다. 내 사랑의 적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나’이다. 사랑은 심지어 자살과 살인이라는 죽음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사랑이 혁명적 정치보다 더 평화로운 것도 아니다. 사랑 역시 모순과 폭력의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충돌을 가장 확연하게 겪게 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으로, 이 세계에서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보는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되며, 이러한 원천에 담겨 있는 물속에서 우리의 기쁨을, 특히 ‘너’의 기쁨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바디우의 <사랑 예찬>의 의미는 사랑을 성욕으로만 치환하는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라캉등 철학계의 거인들과 맞선다. 물론, 시작이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단지 치환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험임을 강조한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자본주의 속 ‘안전한 사랑’-가짜 사랑에 맞선다. 절차를 생략해야 하는 안전한 사랑은 없으며, 위험 속에서만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지속시키기 위해 투쟁하며, 그 과정에서 비로소 삶이 재발명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랑, 정확히 말해 에로스가 갖는 혁명적인 성질이다. 이후 알랭 바디우가 서문을 써준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에서 나왔듯이, 사랑은 자아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적인 잠재성이 있다. 발터 벤야민이 아샤 라리스를 만나 어른이 되어 마르크스를 접해 죽기 전 혁명적인 텍스트, ‘역사철학테제’를 쓴 것도 에로스의 혁명적인 성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뤄지지 못한 에로스는 이내 멜랑꼴리로 좌절되어, 단테, 괴테, 횔덜린 같은 천재들을 낳지만 사회 변혁의 잠재성을 내포할 수 없다. 그러니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은 나를 바꾸고, 지속하려고 하는 욕망은 결국 둘을 억압하는 사회로 향할 수밖에 없기에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은 사회 변혁에 주치체가 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알랭 드 보통, 롤랑 바르트, 프루스트 등 20세기 이후 사랑의 숭고함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여러 작가들이 있지만, 오직 알랭 바디우만이(프롬의 사랑 이론은 다소 공상적이다) 사랑을 혁명으로 이어가는 담론을 제시한다. 구체적이지 않지만 충분히 혁명적이다. <헤어질 결심>처럼 깊은 멜로 드라마를 해설할 때 <사랑 예찬>을 인용하지만, 나는 세계에 맞서는 모든 투쟁에서 <사랑 예찬>을 언급하고 싶다. 알랭 바디우가 사랑에 대한 가능한 정의 가운데 하나로 “최소한의 코뮤니즘”을 언급한 것처럼, 사랑은 내게 공산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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