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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콩나물>, 방황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보다

9.13 독서일기

by 꿈꾸는 곰돌이

보리네 할아버지의 제사가 있던 날, 보리네 엄마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콩나물을 사오지 않았다. 이에 보리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위해 직접 집 밖으로 나가 혼자서 콩나물을 사오기로 결정한다.

무작정 나서기는 했지만 콩나물을 어디서 사는지도,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보리는 모르고, 집 밖에는 처음 보는 무서운 장애물들로 가득하다. 빵조각으로 개를 따돌리기도 하고, 친구와 싸우고 할머니를 도와주기도 하다가 시장에 가야 콩나물을 살 수 있다는 걸 알아낸다. 아빠의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로부터 시장에 가는 길을 알아내고 해바라기 한 송이를 받아가지고는,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시장 야채가게에 도착한다. 그러나 정작 콩나물을 사야 한다는 걸 잊어버린다.

저녁이 되어 제사가 시작되는데, 어른들은 콩나물이 없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보리가 가지고 온 해바라기를 보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꽃을 잘 가지고 왔다며 보리를 칭찬한다.

-위키백과 수록된 영화 <콩나물> 줄거리


대학에서 시 수업 시간에 영화 <콩나물>을 봤다. 짧은 단편이지만 그 단편영화에서 느낀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산책에서 현대인의 초상을 볼 수 있었다. 시 수업을 진행한 박상수 시인이 기고한 《대산문화》 2023년 가을호에 실린 영화평에는 시인은 이 영화를 통해 시 쓰기의 우화로 읽어낸다고 말한다.


"나는 이 영화를 시 쓰기에 관한 현명하고도 사랑스러운 우화로 읽는다. A로 출발해서 C 혹은 F 로 끝나기. 시는 보통 그렇다. 이상하게 A의 동어반복이 아니라 C나 F가 진실에 더 가깝다. 어떤 경우, 시 쓰는 과정은 (의식적인, 혹은 명명백백한) 자기를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일몽 혹은 무의식의 관여가 상당하다. 익히 알고 있는 나와는 다른 나를 불러들이는 것이 시 쓰기의 출발이라 말해도 좋겠다. 닫혔던 세계가 열리고 타자를 만나는데 이때의 타자는 익숙한 나를 재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낯선 세계를 매개하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길은 점점 달라진다. 이 과정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대산문화》, 2023년 가을호 중에서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의 산책에서 길 잃은 현대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근대 철학자들이 근대에 대해 저마다 기막힌 정의를 내리고는 한데, 그중 인상 깊은 근대에 대한 정의는 하이데거의 '고향상실의 시대', 피히테의 '죄업이 완성되는 시대', 루카치의 '서사시의 상실의 시대' 가 있다. 지혜의 극한을 보여준 철학자들의 말을 집대성하자면, 근대란 결국은 길 잃은 시대이다.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콩나물을 사러 간 보리가 길을 걷다가 무엇을 사야 했는지 잊어버려 마을을 헤메며 모험을 한 것처럼. 근대인은 인간 행복이라는 단순한 명제의 길을 가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려 물신화의 늪에 빠졌다. 목적을 잊어버려 사람들의 말에 홀려 본질을 잃고 마을을 서성이는 보리처럼, 현대인은 목적을 잃고 슬픈 방황을 이어간다. 차이점이라면 보리에게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영적 재회를 통해 콩나물 대신 할아버지가 좋아던 해바라기를 제사에 가져가지만, 현대인에게는 신비한 종교적 체험은 불가능하다. 하이데거 말처럼, 신들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적인 인간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가? 콩나물이 아닌 꽃을 꺽어온 보리처럼, 우리는 인간 행복 외에 무엇을 꺽어야 하는가? 행복이란 단어가 주는 모호함은 있지만 인간 행복이 불가하다면, 우리는 인간 불행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불행이란 심부름에 나선 인간이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 아닐까 싶다. 삶의 목적을 찾아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콩나물 심부름일지도. 공동체인 가족에 기여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고자 나선 꼬마소녀 보리처럼, 우린 나서야 한다. 나의 쾌락이 아닌 공동체의 나은 삶은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보리의 콩나물 심부름 여정이 주는 사랑스러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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