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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9.12 독서일기

by 꿈꾸는 곰돌이


남진우 《사랑의 어두운 저편》 중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에서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 남진우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 시집, <사랑의 어두운 저편>(창비, 2009)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 있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너를 생각한 적이 있다. 네가 일어났을까, 네가 충분히 잠을 잤을까. 혹시라도 네가 악몽을 꾸거나 밤잠을 설치까 걱정되어 간편한 아침 식사조차 목을 메이게 한 적이 있다. 해가 뜰 때는 해가 너무 해가 밝을까, 해가 없을 때는 해가 없어 우울할까, 바람이 불 때는 그 바람에 베일까, 비가 올 때는 그 비에 젖어 불쾌할까 마저 늘 걱정했다. 한사코 너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너에 흠뻑 취해있던 적이 있다. 너의 영혼에게서 불어온 그 잔잔한 웃음이, 내 인생을 송두리 채로 옭아맨 적이 있다. 너를 만나지 못한 날이 까마득하여도 너를 만날 수 있었다. 새벽에 잔잔한 풀벌레 소리에 기대에 몽상으로 너에게 향했고, 너를 끝까지 생각하다 잠에 든 적 있다. 잠에 들어도 꿈속에서 난 늘 너로 채워졌고, 너에게서 망각된 시간을 망각하지 않고자 꿈속에서도 되새긴 적 있다. 한 편의 꿈속에서마저도 너를 생각했으니 한사코 너를 놓지 않던 적이 있다. 무책임하게, 아주 비겁하게 너에게 한 편의 편지로 타오르는 고통을 끝내려고, 전가하려고 흰 백지 위에 연필을 잡았다. 너와의 짧지만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가장 무거웠던 시간을 돌이켜 보아도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달이 뜰 때부터 해가 뜰 때까지 온전히 너의 이름만 쓴 적이 있다.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는 그토록 바래야 할 것보다 너의 이름을 계속 반복하여 쓰고 있었고, 그때가 돼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너에게 있어 한 줌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기 두려웠고, 연애를 욕망하는 마음을 접은 적 있다. 단테의 <신곡>을 펴고 베아트리체를 상상하며 너를 대입해 평생을 짝사랑하기 맹세했고, 베르테르처럼 로테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피해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나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며 다짐했고, 타인과의 성애적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마치 도시의 수도승이 되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모조리 너로 간주하고, 그 이뤄지지 못한 비운의 사랑의 주인공을 너로 생각한 적이 있다. 로테에게 조금의 호감을 받았던 베르테르마저도 동경한 나를 보며 타락할까 봐, 타락하여 너를 다치 하게 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홀로 쓸쓸히 평생을 사랑하는 것조차 너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했고, 스스로의 운명을 비탄했다. 치료할 수 없는 우울에 휩싸여 홀로 호수 주위를 배회했고, 호수의 저편으로 들어갈까 망설인 적이 있다. 내가 고요히, 아무런 소식도 없이 이 세상을 뜨어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죽음 따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혹여라도, 정말 이 지구에, 은하에, 우주에 존재할지 모르는 아주 적은 가능성의 확률로 네가 내게 관심이 있더라면, 정말 불행히 내 최후를 알게 될까 하는 불안에 감싸였다. 나 하나의 사람이야 너라는 존재에게 대수롭지 않겠지만, 그러나 우주의 붕괴 속 살아남을 확률로 너의 눈가에 무언가 맺힌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 몽상한 적이 있다. 내가 최소한 너에게 음이 되지 않는 이상 살아가야 다짐했고, 그런 너를 한평생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란 너를 잊고, 그 열기로부터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너의 이름이 적힌 백지를 계속 지워봐도, 아무리 너의 이름을 망각하고자 발버둥 쳐봐도 너를 잊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너를 만날 나를 살해함으로써 이 고통의 굴레에서 이탈하고자 해도 결코 너를 잊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파고들어, 사랑은 사람으로 잊는다던 낭설을 믿었고, 너를 잊기 위해 타인과의 지상낙원을 구축하는 관계인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타인을 사랑해도 결코 '너'가 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너를 진실로 사랑할 수 없어 그 타인에게마저 소홀했다. 타인과 만날 때마다 너의 영혼이 깃든 그 사람을 만난다고 스스로 세뇌했지만, 타인으로 결코 너를 대체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심각하게 삶의 근원적 고통을 느꼈다. 살아가는 치욕을 느끼며 더더욱 너를 사랑할 수 없음을, 너를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함을 깨우쳤다. 그리하여 너에게 가능한 가장 멀리 벗어나 목가적 삶을 산 적이 있다. 밤이면 빛나는 별들을 향유했고, 그 낭만적 성좌 아래 놓인 풀 숲을 밝히는 반딧불로 너를 잊으려 했다. 그러나 그 둘은 잔잔하게 웅성거리며 너의 이름을 반복했고, 그 움직에 자꾸만 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너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나를 완전히 붕괴시킨 후 그 편린마저 부서지더라도, 너에게 내 영혼이 와닿길 간절히 소망한 적이 있다. 내 육체가 부서진 후 내 영혼이 파괴되어 정처 없이 우주를 떠돌 때 고요히 잠들던 네 곁에 잠시 머물길 몽상한 적이 있다.

그런 나를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못했다. 그런 나라서 너에게 다가가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속삭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난..., 단지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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