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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빈 방에서 듣는 <광야에서>

by 꿈꾸는 곰돌이

광장에서, 빈 방에서 <광야에서>

광장에서 불이 꺼졌다. 깃발이 접히고 구호는 손으로 눌러진 입술처럼 가라앉았다. 사람들 틈에서 섞였던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걷는 발끝에서 뜨겁게 남았던 진동도 사라지고, 온갖 함성들이 오래된 전구처럼 깜박이며 꺼져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은 고요했다. 얼마 전까지 새벽을 삼키듯 울려 퍼지던 "윤석열 퇴진"의 절박한 목소리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잠잠했다.

자유로를 타고 버스에서 내려, 몸을 반쯤 죽은 상태로 집에 들어온다. 작은 방에 앉아 나는 이어폰을 끼웠다.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고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 이 땅에 피 울음 있다…”
혼란스러운 광장의 그 파장을 뒤로 한 채, 이 노래는 내 내면의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온다. 그곳에서 들었던 <광야에서>는 거대한 태풍이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그 노랫말이 광장 전체를 휘감았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떨리는 촛불처럼 서로를 비추었고, 뜨거운 외침은 억눌린 시대의 상처를 폭로하는 비명이었다. 광장의 광야는 모두가 함께 선 거대한 대지였고, 그 대지 위에선 아무도 홀로일 수 없었다. 우리는 깃발을 들어 올리며 시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래는 우리의 함성이었고, 우리의 신념이자 두려움 없는 맹세였다.

하지만 방 안에서 듣는 이 노래는 다르게 운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광장의 환호를 넘어, 누군가의 고독한 울음소리처럼 들려온다. 이어폰 속에서 흐르는 그 담담한 음성이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를 반복할 때, 내가 광장에서 움켜쥐었던 흙이 차갑게 식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말로 쏟아내고 기치로 흔들어대던 모든 노력들이 지금 나 혼자만의 적막 속에서 다시 스며드는 것이다.

노래는 나를 광장이 아니라 그 반대편으로 데려갔다. 광야는 아찔하게 쓸쓸한 곳이었다. 모두가 떠난 거센 바람 속 들판에서 나 혼자 벌거벗겨진 채 서 있는 장면을 떠올린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라는 구절은 이제 거대한 군중의 환희가 아닌, 한 개인의 두려움이 된다. 대부분은 자신을 민중 속에 숨긴 채 외쳤다. 그러나 이 노래는 내게 나처럼 홀로, 내 자리를 지키는 누군가의 풍경까지 떠오르게 했다. 광야는 거대하지만, 거대함을 이루는 조각들은 언제나 고립이다.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광장에선 이 가사가 분노와 희망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방에서는 이 질문들이 더 깊은 의문으로 침투한다. “정말 우리가 가난하지 않은가? 정말 우리가 주저하지 않는가?” 광장은 정답 하나를 제시하지만, 이 방 안 노랫말은 물음표를 강조한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끝과 시작 사이에 어딘가 멈춰 서 있다.

창밖의 어둠은 여전히 검붉다. 텅 비어진 거리 위에 남은 누군가의 발자국들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스며든다. 노래는 끝나가지만, 내 마음속 광야는 여전히 움직인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의 광대한 시간과 공간, 그 세상은 방 안에서도, 혼자만의 고요 속에서도, 내가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세계다.

광장에서의 우리가 '우리'였다면, 작은 방에서 듣는 <광야에서>는 온전히 나 자신과 대면한다. 내가 움켜쥔 흙은 뜨겁기도 하고, 따갑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다. 언젠가 다시 저 들판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은 이 방 안에서 내가 있는 광야의 풍경을 조용히 새겨본다.

그리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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