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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 노동과 댄디즘

by 꿈꾸는 곰돌이

꾸밈 노동. 요즘 들어 공감되는 말이다. 사실 남성인 내가 느끼는 것보다 이로 인해 고통받는 주변 여성들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내면의 품격과 개성을 추구하는 19세기 댄디즘에 매료되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이 외부적 치장을 넘어선 본질적인 것임을 믿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운동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화장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나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와 대학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화장이 마치 '기본'인 양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에 깊이 놀라곤 한다. 이러한 사회적 강박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트러블이 생기면 파운데이션으로 두껍게 가리고, 컨실러로 흔적조차 지우려 한다. 얼핏 보기에 깔끔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 이는 피부를 해치는 악순환의 시작일 뿐이다. 진한 화장이 피부에 좋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모공을 막고 피부 호흡을 방해하면서 트러블은 더욱 심해지고, 그 위에 다시 두꺼운 화장을 얹는 고통스러운 반복이 계속된다.

더욱이 현재 뷰티 업계는 파운데이션을 바른 얼굴을 마치 '맨얼굴'인 양 착각할 정도로 과한 화장을 유행시키고 있다. 수많은 광고와 미디어 속에서 완벽하게 커버된 무결점 피부는 일종의 미적 강요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피부결은 감춰지고, 본연의 표정은 가려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개인의 고유한 결을 존중하고 그 개성을 빛내는 데서 나오는 것임에도, 모두가 똑같은 하얀 피부와 매끈한 얼굴을 강요당하는 현실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댄디즘은 외적인 것, 단지 옷을 잘 입고 외모를 꾸미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지성과 고유한 취향, 그리고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미학이었다. 샤를 보들레르는 그의 저서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현대성은 반은 순간적이고, 반은 영원한 것"이라고 했는데, 찰나의 순간 속에서 영원을 포착하려는 예술가의 본질처럼, 우리의 맨얼굴 또한 순간적인 결점 뒤에 영원히 변치 않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솔직히 화장이라는 행위 자체에 반대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꾸밈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압박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들릴 수 있어 조심스럽다. 그렇다면 적어도 획일화되고 두꺼운 미디어 속에 투영된 화장에는 반대한다. 대신 개개인의 고유한 미를 살리는 화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완벽한 커버가 아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화장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얼굴에 자신감을 갖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숨기기보다 드러내는 방식으로 메이크업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진정한 의미의 '댄디즘'이 아닐까. 화장은 본연의 빛을 가리는 도구가 아닌, 각자의 고유한 빛깔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예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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