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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타케시의 허무주의적 청춘 송가, <키즈 리턴>

by 꿈꾸는 곰돌이

기타노 타케시의 허무주의적 청춘 송가, <키즈 리턴> – 끝나지 않은 방황과 하루키적 세계와의 교차점

영화의 두 주인공, 신지와 마사루는 문제아들이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권투에 뛰어든 마사루는 타고난 재능으로 잠시 빛을 보지만, 엇나간 길로 빠져들며 몰락하고 만다.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1996년작이자, 복귀작인 <키즈 리턴>은 재기 넘치는 두 청춘, 신지와 마사루의 방황일기, 혹은 청춘 일기라고 할 만한 영화다. 방황하는 청춘이라는 소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기타노는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서정적인 시선으로 이들의 좌절과 그 안에 담긴 희미한 희망을 포착한다. 한편 기타노의 청춘 송가를 통해 90년대 일본의 문화 기표라고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 공통점과 명확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둘은 예술적 철학자로, 상처로 숨 쉬는 현대인의 초상을 포착한다.

영화의 두 주인공, 신지와 마사루는 문제아들이다. 학교를 자퇴하고 권투에 뛰어든 마사루는 타고난 재능으로 잠시 방황에서 벗어나는 듯했지만,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여긴 상사에게 뒤처진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결국 잘못된 길로 빠져든다. 친구 신지는 겉보기에 약해 보이지만, 꾸준히 권투를 계속하며 끈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역시 마사루의 부재와 자신의 한계 앞에서 깊은 허무감에 빠진다. 기타노 감독은 이들을 통해 청춘에 대한 과도한 미화나 무조건적인 찬양을 피하고, 현실의 가혹함과 좌절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수미상관적 구조를 통해 영화 초반 초라한 모습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그들의 방황이 오랜 시간 지속되었음을 암시하며, 과거 전성기의 모습과 대비되는 장면을 통해 깊은 상실감을 전달한다.

이들이 느끼는 허무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것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대개 '계획적으로 살고, 자족적이며 자립적인 동시에 외로운 남자'들로 그려진다. 간단히 말해, 겉으로는 정상적이지만 내면은 병든 인물들이다. (그 점에서 마치 내 자신을 보는 듯하다. 현대인, 특히 청춘 남성들의 허무감을 신비롭게 그려낸다는 점이 하루키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그들은 예측 불가능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며 존재론적 허무와 고립감을 경험한다. 그들의 방황은 내면에서 시작되어 점차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은 공간적 배경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한다. 그들은 상실과 결핍을 겪으며 때로는 술, 음악, 섹스 같은 원초적 욕구에 매달리기도 한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존재론적 공허함에서 비롯된다.

반면 <키즈 리턴>의 신지와 마사루가 겪는 허무감은 더욱 현실적이고 육체적이다. 이들의 방황은 구체적인 사회 시스템(학교, 복싱, 야쿠자)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실패'에서 비롯된다. 하루키의 인물들이 자아를 탐색하며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 한다면, 기타노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타고난 기질과 마주하며 실패를 경험하고, 그 결과로 허무감에 빠져든다. 그들의 세계는 기타노 감독 특유의 무심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포착되며,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조차 어딘가 비장하고 지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두 거장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청춘의 신화를 무조건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성장이 좌절과 혼란의 연속임을 인정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허무감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대사는 기타노식 허무주의의 정수이자, 동시에 가장 기타노다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신지, 우리 바보같다, 그치?” “그럼,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 이 대사는 이들이 겪은 모든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며, 어쩌면 아직 이들의 이야기는 진정으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역설적인 위로를 건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섹스마저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영혼의 성숙'을 제시한다면, <키즈 리턴>은 허무한 현실 속에서 '상처로 숨쉬는 법'을 가리치는 듯하다. 상처투성이더라도, 방황하더라도 그 옛날 <파우스트>의 교훈처럼, 인간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두 허무한 목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직 시작도 안 한' 삶의 허무 속에서 살아갈 힘을 찾는 방황하는 청춘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 빛이 마치 깊은 광휘가 되어 일본 사회의 방황하는 청춘들이 가야할 길을 비추고 있지 않을까? 그 길을 방황이라는 명목 하에 계속 도피하고 있는 나도 걷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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