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침묵의 파도와 상징계의 바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침묵의 파도와 상징계의 바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 세계는 몇 개의 키워드로 응축된다. 죽음, 허무주의, 바다, 우울을 담은 '기타노 블루'의 영상 미학,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서정적인 선율까지. 분명 <긴쿠지로의 여름>부터 <하나비>, <자토이치>까지 그는 세계관의 스팩트럼이 넓은 감독인데도 워낙 다양하다. 그의 첫 번째 페르소나인 비트 다케시가 스크린을 지배할 때, 특유의 건조하고 폭력적이며, 때론 무뚝뚝한 코미디적 감각은 독보적인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비록 감독의 페르소나가 부재한 첫 영화이지만, 대사와 대화 없이도 사랑의 깊이를 표현하고, 그 빈 공간을 히사이시 조의 음악으로 가득 채운 점에서 다케시의 천재성이 빛나는 걸작으로 기억된다. 사랑이란 말 없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운데, 말도, 수화라는 기표도 없이 사랑을 표현한 다케시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처럼 느린 템포와 무미건조한 장면들이 때론 지루함을 안기지만, 영화가 끝난 후 밀려오는 깊은 여운은 감히 비견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지 말 없이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연인들의 사랑을 담아낸 멜로 영화라는 관점이 아닌 성장 서사라는 관점에서 해석해보려고 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또 다른 걸작 <키즈 리턴>처럼, 이 영화도 성장 영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 특히 자크 라캉의 이론적 틀을 빌려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 영화에서 바다는 배경을 넘어 주체의 형성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징계'이자, '아버지의 공간'으로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우선 라캉의 이론을 살펴보자. 라캉이 설파한 '아버지의 법'은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며 언어와 질서를 체득하고, 비로소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제이다. 영화 속 시게루가 집요하게 마주하는 바다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해석된다. 한없이 넓고 변덕스러운 바다는 예측할 수 없는 힘으로 주체를 압도하지만, 동시에 파도라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시게루가 서핑보드에 몸을 싣고 이 바다의 법칙을 익히고 극복하려 애쓰는 모습은, 마치 주체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며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지난한 과정과도 닮아 있다. 이때 서핑보드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시게루의 욕망을 담아내는 팔루스적(상징계의 힘을 드러내는) 대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시게루가 '귀머거리'라는 설정은 이러한 라캉적 해석에 새로운 층위를 부여한다. 그는 언어를 통한 직접적인 명령이나 지시를 들을 수 없으며, 이는 상징계의 핵심인 언어적 질서에서 한 발 비켜선 존재로 그려지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그는 바다라는 비언어적 상징계에 온몸을 던져 그 법칙을 스스로 경험하고 습득하려 한다. 파도와 맞서는 순간은 시게루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법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시간이다.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그 찰나, 그는 상징계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잠깐이나마 자기 몫의 공간을 얻는다. 그러나 그 균형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이 불안정함은 상징계에서 주체의 위치가 영원히 불확실하다는 점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바다는 결국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영원한 '타자'로 남아 있으며, 시게루의 서핑은 그 미지의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욕망과 통합의 몸짓으로 읽힌다.
타카코의 자리 또한 라캉식 해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녀는 언제나 시게루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며, 그의 바다 위 싸을 묵묵히 지켜본다.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상징계 이전의 상상계적 유대에 더 가깝다. 타카코는 상징계의 가혹한 아버지의 법으로부터 시게루를 지켜주고, 그의 존재를 조건 없이 인정해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 안정감을 부여한다. 시게루가 바다에 나아갈 수 있는 힘의 배경에는, 눈길 하나로 그의 세상을 붙들어주는 타카코의 성실한 응원이 자리한다. 그녀의 존재는 시게루가 바다라는 황량한 상징계에 맞서 자신의 자아를 붙잡는 데에 든든한 상상계적 끈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은 이 모든 해석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끝내 시게루가 바다에 삼켜지는 듯한 마지막 장면은, 상징계의 거대한 힘 앞에서 주체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그리고 아버지의 법에 완전히 녹아들거나 저항하다 소멸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타카코가 시게루의 서핑보드를 들고 조용히 바다 앞에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이 욕망의 반복성과, 또 다른 방식으로 상징계와 마주하려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겉으로는 아름다운 청춘들의 멜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라캉적 시각을 들이대면 '아버지의 법'과 씨름하며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려 애쓰는 원초적 서사이다. 영화 속 바다는 바로 그런 싸움과 화해, 그리고 소멸의 서사를 담은 거대한 무대이자, 결코 정복할 수 없으나 주체가 끝없이 꿈꾸는 욕망의 심연으로 잠식시켰다. 실로 기타노 다케시스러운 승리하지 않는, 허무주의적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