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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Dec 25. 2023

사랑과 혁명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

  <에로스의 종말>에서 에로스의 혁명적인 성격을 예지한다. 작가는 에로스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저자가 말하는 에로스의 폭발적인 성질은 분명 유효한 면이 있다. 원초적 결합을 향한 리비도의 충동적 성격은 개인의 인생도, 사회의 성격도 바꿔 버릴 만한 잠재성이 있다. 


 개인적인 사례를 보자면, 발터 벤야민을 언급할 수 있겠다. 전 연인이던 이샤 라리사에게 헌사하는 <일반통행로>를 통해 벤야민은 어른이 되었다. 유대교 신비주의에 머물던 벤야민은 라리사에게 마르크스를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벤야민은 완전히 코페니쿠스적 전환을 한다. 신학과 역사 유물론이라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양극적 사유 하는 혁명적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된다. 에로스의 짜릿한 경험이 우리가 아는 벤야민을 만들어낸 것이다. 벤야민은 에로스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했고, 숄렘과 같은 시온주의자가 아닌 당당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김현 선생의 <행복한 책읽기>에서는 황석영 작가의 <무기의 그늘>에서 하나의 전언에 주목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랑과 혁명은 같은 길입니다....(중략) 태어날 아기들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을 물려주겠다고 다짐하고 작전에 나가는 거요. 이것이 바로 내가 전에 말했던 사랑과 혁명이 같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체 게바라의 명언과도 맞닿아있다.

"진정한 혁명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으로 이끄는 것이다." (우루과이 주간지 '마르차'에 기고한 글에서)


 문인들도, 투사들도 비슷한 고찰을 한다. 사랑과 혁명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고, 인과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랑 또는 혁명이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혁명을 한다는 것이다. 


조금의 정신분석학적인 이야기를 곁들이자면, 사랑-그것이 에로스던, 아가페던-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리비도가 분출한다. 특히 에로스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에로스의 본질은 섹스다. 프로이트나 쇼펜하우어처럼 성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되지만, 분명히 섹스라는 제의 의식에는 혁명적인 성격이 있다. 그 제의 의식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노발리스 콤플렉스'처럼, 섹스를 갈망하는 인간의 정신은 곧 불의 정신이다. 극단적으로 살아있는 불처럼, 모든 것을 파괴할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랑 중 가장 혁명적인 사랑은 에로스이고,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에로스가 없는 플라토닉 러브는 무기력하다. 그런 무기력함은 <신곡>이나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이 천재적인 문학 작품을 낳는 멜랑꼴리가 될 수 있을지라도, 혁명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보들레르가 진정한 영원한 에로스를 얻었다면, 내가 아는 시인 보들레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혁명가에게는 에로스가 필요하다. 계급의식은 계급 간의 투쟁에서 생겨난다면, 혁명적 의식은 에로스를 갈망하고자 하는 투쟁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너를 사랑해 같은 시시한 말로 고백하지 말자, 나는 너를 위해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가진 언어는 너무나 연약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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