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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Dec 30. 2023

3.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행한 책읽기

  카를 마르크스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경제학철학 수고 중


 사랑은 사랑으로만 교환되어야 하며, 교환되지 못하면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알랭드 보통의 연애 소설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가》의 한 챕터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사랑을 다룬다.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사랑이 보답받는 것이 분명 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란, 카를 마르크스가 아닌 미국의 희극인 그루초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그의 낭만적 마르크스주의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이다.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적(그루초 마르크스) 사랑을 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은 낭만화된다. 성스러움의 베일로 감싸여 있으며, 아우라가 쌓여있는 경이롭게 인식되는 대상이다. 사랑의 주체는 그러한 경이로움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한다. 결합하고 싶어 하는 에로스, 죽어버리고 싶어 하는 타나토스... 프로이트는 새 생명을 만들어낼 힘이 있는 에로스와 죽음으로 이끄는 타나토스를 변증법적으로 보았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에로스의 혁명적 욕망을 느끼면서도, 좌절되었을 때의 죽음의 충동-베르테르의 자살을 꿈꾼다. 그래서 최초의 변증법 이론가인 엠페도클레스가 보았듯, 사랑의 감정에 증오가 있고, 증오의 감정에는 사랑이 있다. 그러니 사랑의 주체에게는 고통이 따른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따르면,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고통을 거부한다면 신화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화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는 알랭바디우의 《사랑 예찬》 서문에서 나온, 안전한 사랑과도 맞닿아있다. 안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낭만적 마르크스주의는 그 사람이 아닌, 신비의 베일 속 쌓인 낭만적 아우라의 그 사람을 사랑한다. 대신 그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단테다. 유의미한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했던 베아트리체를 평생 두고 사랑한 단테의 기사도적 사랑은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형이다.  나는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며, 생물학적 욕망에 벗어난 숭고한 사랑이라고 하고 싶다.

 

 다만,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결코 될 수 없다. 에로스의 혁명적 성격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기력하고, 우울한 증상이 나타난다. 역사 속 천재들은 모두 그렇다. 단테, 괴테,  보들레르, 랭보, 벤야민... 모두 위대한 멜랑꼴리 커였지만, 우울에 젖은 채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낭만적 그루초 마르크스주의자에서

혁명적 카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세계의 혁명을 부르짖기 전에, 내적인 혁명을 일으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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