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 227일.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오늘 하루 이 정도면 괜찮았어. 만족스러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누구냐 넌.
매번 "아 드디어 하루가 다 갔다. 그럼 뭐하나 좀 있으면 또 내일이 찾아오는 걸"이라는 생각을 반복하는 내게 저런 만족스러운 하루의 마무리는 너무도 낯간지러웠다. 더군다나 살면서 저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신기하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삶이 만족스럽다니!
이게 말이 되나?
오늘 딱히 뭐 한 게 없는데?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 영어공부를 빡세게 한 것도 아니고 뭐 이렇다 하게 성취감을 느낄만한 행동을 한 게 없었는데..
뇌 호르몬의 신비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처음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을 때 에스벤 서방정 50mg과 폭세틴 캡슐 20mg을 복용했었다. 차츰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사라질까. 하던 생각도 옅어지고 활기찬 하루를 보내는 날들이 늘어갔다. 무언가 의욕이 생기기도 하고 슬픈 일에 슬플 수 있었다. 당연히 웃긴 것들엔 웃을 수 있었고.
생활습관들을 재정비했고 신랑의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치료를 해나갔다. 그러다 가을의 문턱에서 나자빠져서 알 수 없는 우울의 늪에 기존 폭세틴 캡슐 20mg을 40mg으로 높였다. 선생님은 내게 약용량이 과해질 것을 염려하셨고 , 다시금 30mg으로 낮추게 되었으나 어쨌든 처음 복용했을 때보다 용량이 많아지기는 했다.
그러자 들쑥날쑥했던 감정의 진동폭이 차츰 잔잔해졌다. 혼자서 있는 시간엔 '편안함'도 느낄 수 있었다. 둘째가 낮잠자는 시각. 따듯한 물 한잔을 가지고 쇼파에 앉았다. 호로록- 하고 물을 들이키니 따듯함이 마음까지 번졌다. 아 이게 바로 편안함이구나. 마음이 안정됨이 느껴진다. 처음 느끼는 감정들에 황홀할 지경이다. 편안함과 만족함이라니.. 보통의 사람들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하루를 보내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우울증 이전의 평균적인 기분 세팅값이 타인에 비해 좀 낮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감정을 0이라고 하고 우울증 시작을 -5라고 했을 때 , '-2' 정도의 기분이랄까. 그러다 아이들을 낳고 삶에 치이다가 '-5'를 넘어선 순간에 치료를 시작했고 원래 내가 느끼던 감정인 -2에 도달했을 무렵 나는 그게 제일 괜찮은 기분인 줄 알았었다. 늘 느끼던 감정이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익숙함에 안도를 했다.
그러나 약을 좀 더 높여보니 이제는 0에서 -0.5 정도의 기분까지 도달한 것 같다. 선생님이 염려하시던 약용량이 과한 증상보다는 부족했던 부분이 메워지는 기분이다.
건강한 뇌는 내가 '무언가'를 해냄으로써 '괜찮은 나! 괜찮은 하루!'가 아니라 그냥 나 자체를 긍정하게 해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강박적으로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내가 조금은 가엽게 느껴졌다. 무언갈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 조금은 게으르게 보냈었도 괜찮은 나. 그저 아이들과 웃기만 하고 밥을 먹었을 뿐인데 '충분히 괜찮고 근사한'하루가 되어가는 마법이 이어진다.
더불어 이런 만족감을 느끼는 날이면 '소비욕구'를 자세할 수 있게 되었다. 문득 맛있는 커피가 먹고 싶으면 참을 수 없이 바로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가서 호로록 마셨고 , 꼭 오늘 장을 보지 않아도 되지만 마트에 가서 괜히 기웃거렸다. '가족들 식재료 사는 건데 뭐'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그리고는 가계부를 작성하면서 의지박약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했었는데.. 나도 이제! 조금의 참을성을 발휘한다면 소비욕구를 참을 수 있다!!! 하하하 으하하하하.
뇌 건강 만세.
편안한 기분 만세.